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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워버그 왕따시킨 인터넷 위력
[기자수첩] 워버그 왕따시킨 인터넷 위력
  • 이경숙 기자
  • 승인 2002.05.1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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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대의 증시 사기꾼을 고발합시다!” 5월10일 오전 증권가 메신저 여론은 후끈 달아올랐다.
증권맨들이 정보를 주고받는 인스턴트 메신저에 UBS워버그증권의 매도공세를 비난하는 글이 눈 돌릴 틈 없이 오갔다.
심지어 어떤 글에는 담당 애널리스트인 조너선 더튼의 전화번호까지 적혀 있었다.
증권가 여론이 이렇게 격앙된 건 워버그가 삼성전자 주식을 팔아치우려고 투자등급을 내리지 않았다는 ‘혐의’ 때문이었다.
외국인이 삼성전자 주식을 11일째 팔아치웠던 이날 외국인 매도물량 50만주(1728억원어치) 중 워버그를 통해서 나온 것이 37만주에 이르렀다.
외국인 지분율은 18개월 중 최저치인 53.4%로 낮아졌고 주가는 33만4천원까지 떨어졌다.
종합주가지수는 817포인트까지 떨어졌다.
워버그는 그 이틀 전인 8일까지 꾸준히 매수추천을 유지하고 있었다.
앞서 4월4일에는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지수 비중확대를 이유로 “상당한 펀드의 유입이 예상된다”고 했다.
5월8일엔 “최근 지수조정은 예상했던 것”이라며 국내 증시와 D램주에 대한 낙관적 전망을 지속했다.
그러다가 5월9일 D램 가격하락과 휴대전화 출하량 추정치 감소를 이유로 투자의견을 ‘강력매수’에서 ‘보유’로 하향조정한 것이다.
이후 삼성전자 주가는 급락했다.
과연 워버그의 거대한 ‘작전’이 한국 주가를 휘두른 것일까? 워버그는 “고객 주문을 처리한 것일 뿐 자기매매(자사 보유주식을 매매하는 것)는 절대 하지 않았다”고 강력히 부인했다.
외국계 증권사 감독을 담당하고 있는 금융감독원의 한 간부도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 격으로 보인다”며 워버그의 항변을 수긍하는 눈치였다.
실제로 3월 한때 4달러38센트까지 갔던 128메가 SD램 가격은 이날 2달러9센트까지 하락했다.
시스코가 양호한 실적을 발표한 덕분에 9일 하루 급등했던 나스닥도 급락했다.
이날 시장상황으로만 보면 워버그의 목표주가조정은 일면 개연성이 있어 보인다.
이를 두고 한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외국인 매도물량이 많이 들어오자 앗 뜨거라 하면서 투자의견을 조정한 것 아니냐”고 추리하기도 했다.
한국의 개미들도 워버그의 투자자들을 따라 팔았어야 마땅했을까? 워버그 외의 다른 국내외 증권사는 대부분 기존 의견을 유지하고 있다.
골드만삭스는 되려 투자등급을 ‘시장평균 상회’에서 ‘추천리스트’로 높였다.
D램 가격약세에도 삼성전자 수익구조는 흔들리지 않을 전망이라는 것이다.
이 모든 정보는 워버그가 매도공세를 펼치고 있는 동안에도 인터넷과 메신저를 통해 빠르게 돌았다.
국내 투자자들이 워버그를 비난하고 매도를 자제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이번 ‘이지메’로 워버그도 한가지만은 크게 깨달았을 것이다.
한국 개미들이 ‘인터넷’이란 방울을 외국인 투자자한테 달아놨다는 사실을 말이다.
정보의 옥석 구분없이 아무 때나 울려댄다는 단점은 여전히 있지만, 가끔은 꽤 쓸 만한 방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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