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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드칼럼] 일본 불황이 시사하는 점
[리드칼럼] 일본 불황이 시사하는 점
  • 유혁근/ 한국신용평가 사장
  • 승인 2002.05.1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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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년 전 미국에서 공부할 때 들은 얘기다.
한국인 유학생이 1년 전에 선배가 이미 수강한 과목을 공부하게 됐다.
이 학생은 선배의 강의노트와 시험 답안지 등을 빌려 열심히 공부한 다음 학기말 시험에 임했다.
다행히 시험문제가 1년 전에 출제됐던 것과 똑같았고, 이 학생은 자신있게 답안을 작성했다.
선배가 받았던 A학점을 기대하면서.

그러나 돌려받은 답안지에는 붉은 글씨로 B+라고 적혀 있는 것이 아닌가. 학생은 곧 교수를 찾아가 항의했다.
똑같은 문제에 똑같은 답안을 제출했는데 왜 1년 전 선배에겐 A를 주고 자기에게는 B+밖에 주지 않았는지 따졌다.
교수는 웃으면서 말했다.
“1년 전에는 내 공부가 부족해서 그 답안을 완벽한 정답이라고 생각했네. 하지만 1년 더 공부하고 보니 그 답안은 완벽하지가 않아. 그런데 자네 답안은 1년 전 답안에서 한치도 진전하지 못했더군.”그렇다.
정답은 변한다.
외견상 같아 보이는 문제라도 시대와 환경이 달라지면 문제의 성격이 변하고, 따라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가지 못하고 과거의 정답, 과거의 성공 경험에 집착하고 안주한다면 어제의 우등생도 오늘의 열등생이 될 수밖에 없다.
십수년 전까지만 해도 ‘일본을 배우자’는 슬로건이 암시했던 것처럼, 미국은 일본의 경영방식을 배우는 데 앞장섰고 일본의 경제성장 패턴과 경제운용방식을 수입해 적용하려는 후발 개도국들의 열망 또한 대단했다.
하지만 선·후진국을 막론하고 전세계의 선망과 시샘을 한 몸에 받고 있던 경제우등국 일본이 이제는 아무리 가르쳐줘도 말을 못 알아듣는 지진아 취급을 받고 있다.
10여년간 경제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신용평가회사인 S&P는 이미 일본의 국가신용등급을 AA-로 하향조정했고, Moody’s는 이보다 더 낮은 A1이나 A2로 낮추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에 반해 한국은 Moody’s의 국가신용등급이 Baa2(BBB에 해당)에서 A3(A-에 해당)로 상향됐고, 앞으로 수년 내에 더 높은 등급으로 상향조정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이러한 결과는 IMF위기 이후 지난 3~4년간 각 분야의 구조조정을 위해 우리가 치렀던 각종 비용에 대한 보상으로 얻어진 것이다.
우리는 과거의 산업구조조정 방식에서 탈피해 좀더 시장친화적으로 시장원리에 따른 가혹한 구조조정 방식을 택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기업이 쓰러지고 실업자가 늘어났다.
새로운 회계기준을 국제기준에 맞추어 정립하고 경영의 투명성 제고와 기업지배 구조의 개선을 위해 새로운 규정과 제도를 도입하기도 했다.
아직도 제도의 도입 정신에 비추어볼 때 운용이 제대로 되고 있느냐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고 국제기준에 좀더 다가가야 할 부분이 남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은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했던 크나큰 변화를 시도하였다.
이에 비하면 일본은 과거의 패러다임을 쉽게 바꾸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문을 닫아야 할 기업을 계속 연명시켜주고 은행은 이들에 대한 부실채권을 정리하지 못하고 대출을 연장해주느라고 신규기업에 나갈 대출자원을 소진하고 있다.
부실기업과 부실금융기관의 정리를 포함한 경제의 구조조정이 가져올 정치적 부담 때문에 선뜻 이를 시행하려는 지도자가 없는 것 같다.
정부의 재정적자가 GDP의 160%에 이르고 수년 내에 200%를 초과할 것이라는 경고도 나오고 있지만, 해외순자산이 1조달러를 넘기 때문인지 아직 일본인들 사이에 위기의식이 일깨워지지 않고 있다.
앞으로 빠르면 1년, 늦어도 수년 안에 한국과 일본의 국가신용등급이 뒤바뀔 것이라는 외신의 보도가 실현될 것인지는 두고볼 일이지만, 아무튼 현재까지는 한국의 대응방식이 정답에 좀더 접근하고 있는 것 같다.
외부압력에 굴복하는 듯한 인상과, 유난히 강한 민족적 자부심 때문에 마음 상한 사람이 수없이 많았겠지만 우리는 세계화(globalization)라는 시대조류에 잘 적응하고 있다.
각종 경제지표의 발빠른 회복과 이에 따른 국가신용등급 및 주요 은행들의 신용등급 상향조정이 이를 증명해준다.
그러나 정답은 변한다.
오늘의 정답이 내일도 정답으로 남아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새로운 정답의 발견을 위해 힘쓰지 않는다면 다시 한번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다.
우리들의 삶은 결코 안전한 것이 아니며 오직 모험과 기회로 충만해 있을 뿐이라는 마크 트웨인의 말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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