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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 민간과 공공이 낳은 사생아
[경영] 민간과 공공이 낳은 사생아
  • 양우성 공공정책 및 경영전략
  • 승인 2002.05.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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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밸리 사업, 주도권 놓고 갈등… 충분한 사업전략 없이 불협화음 끝 물거품

“미국에 실리콘밸리가 있다면 한국에는 미디어밸리가 있다.
” 1995년 전경련이 표방한 비전이다.
미디어밸리 구축사업은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정부가 아닌 민간부문이 주도적으로 입안한 대규모 지역발전 프로그램이다.
‘미디어밸리’ 사업은 93년 전국경제인연합회를 필두로 경제 5단체가 발족시킨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가 1년여의 연구작업 끝에 95년 12월 제안한 것이다.
국가경쟁력을 강화하려면 정보화 촉진과 정보산업 육성이 중요하다는 명분을 내걸었다.


실리콘밸리 같은 정보통신 산업단지를 한국에 만든다는 비전과, 전경련 등이 제안하고 한국 정보통신 업계의 상징적 존재인 삼보 이용태 회장이 앞장선다는 것 때문에 지자체들이 미디어밸리 유치경쟁을 벌였다.
95년 초대 단체장 선거 직후라서 의욕에 넘친 민선단체장들에게는 매력적인 사업이었다.
12개 광역자치단체의 20개 지역이 미디어밸리 입지 선정을 신청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정보기술(IT) 사업이 미래의 ‘황금알을 낳는 사업’이라는 인식이 대기업, 중소기업 가릴 것 없이 만연된 시절이라, 지자체들은 입지 선정만 되면 기업유치가 쉬울 것이란 안일한 생각을 했다.


초기에 반신반의하던 재계는 지자체의 치열한 유치경쟁을 보고 최종 입지선정이 끝나기 직전 자본출자 등 참여의사를 보인다.
삼성그룹, 현대그룹, 삼보컴퓨터 등이 중심이 되어 자본금을 모아 (주)미디어밸리를 만든다.
96년 12월 미디어밸리 추진위원회는 인천의 송도신도시를 입지로 선정한다.
이제 사업이 본격 추진되려면, 민간측인 미디어밸리 추진위와 지자체인 인천광역시 사이에 효과적인 협력체제, 즉 파트너십이 형성돼야 했다.
그런데 미디어밸리 추진위는 지자체들의 경쟁을 지켜보면서, 이 사업의 주도권과 협상권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믿게 됐다.
이런 인식이 결국 미디어밸리 사업을 교착상태에 빠뜨릴 줄은 아무도 몰랐다.


미디어밸리는 우선 인천광역시에 송도신도시내 대상부지를 무상으로 분양해달라고 요구했다.
이 땅은 이미 매립공사가 진행되던 송도신도시내 2, 4공구 106만평으로 매립원가만 평당 50만원대, 전체 5천억원이 훨씬 넘는 땅이었다.
이것을 무상으로 달라는 미디어밸리에 대해 인천광역시측은 특혜시비라는 정치적 위험과 재정부담 때문에 부정적 반응을 보인다.
더구나 ‘멀티미디어 기금 조성’을 두고 미디어밸리가 인천시에 1천억원을 내라고 주장하는 동시에 기금운영의 참여를 요구하자, 인천시는 기금운영은 시의회 의결사안이며, 돈은 인천시가 내고 운영권을 나눠갖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거부한다.



사전에 상대방 역량과 요구사항 파악해야
양자간의 갈등은 더욱 깊어갔다.
본질은 사업 주도권을 둘러싼 갈등이었다.
미디어밸리가 민간 주도로 사업을 추진하겠다며, 인천시는 기본 계약만 맺고 토지를 제공하고 행정 지원, 세제, 금융 지원을 하는 선에 그치라고 요구했다.
미디어밸리는 단지 조성, 분양, 입주기업 선정, 단지 관리 등 개발과정과 이후 운영과정 전반을 독자적으로 진행하길 원했다.
사업구상 초기에 민간과 지자체가 공동으로 출자, 운영하는 제3섹터 민관합작 법인으로 사업을 추진할 것이라고 기대한 인천광역시로서는 미디어밸리의 이런 태도에 의혹을 품게 된다.
인천시는 자신들을 봉으로 여기는 미디어밸리를 더이상 신뢰하지 않게 된다.


미디어밸리도 인천시를 불신하게 된다.
인천시가 막상 입지로 선정된 뒤에 자신들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자, 인천시가 미디어밸리의 협상조건에 응하기 전에는 사업을 추진할 수 없다는 강경한 내부입장을 택한다.
양측의 파트너십 형성은 무산되고 형식적인 투자유치 설명회만 거창하게 두어차례 열지만, 인천시와 미디어밸리의 법률관계도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투자에 나설 어리석은 기업은 없었다.
결국 미디어밸리 사업은 표류하게 된다.


우리가 미디어밸리 사업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 핵심 교훈은 민간부문과 공공부문이 동상이몽을 꾸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첫째, 자신과 상대방의 요구사항과 역량을 사전에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상대 역할에 대해 인정하고 역량을 신뢰하지 않고서는 파트너십이 형성되기 어렵다.
민간부문과 공공부문이 파트너십을 맺을 경우, 공공부문은 민간부문의 사업계획 능력, 마케팅 능력과 자본조달 능력, 효율적인 사업추진 체계와 금전적(지방세수 증가)·비금전적(고용창출, 지역발전) 성과의 공유 등을 기대한다.
반면에 민간부문은 공공부문에 각종 행정지원과 규제 완화, 사업추진의 공신력, 세제·금융 지원, 배타적 혹은 안정적 수익 보장 등을 기대한다.


서로의 기대와 역할을 제대로 충족시킬 수 있는가는 각자의 역량과 작업방식에 달려 있다.
미디어밸리가 원했던 106만평 토지의 무상 분양은 특혜시비와 매립비용 등 재정부담 문제로 인천시가 수용하기 불가능한 대안이었다.
인천시는 토지의 현물출자는 가능하다는 입장이었지만, 그러면 경영권이 인천시로 넘어가니 미디어밸리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미디어밸리는 공짜로 땅을 받아 입주기업에 분양하여 엄청난 개발이익만 남기려 한다는 의혹만 받았다.
미디어밸리가 직접 토지를 구입, 개발할 자체 자금 능력이 없기 때문에 빚어진 일이었다.
물론 미디어밸리가 투자 희망 기업에 부지를 알선하고 입주에 필요한 토털서비스를 제공하는 대가로 수수료를 받을 수 있었지만, 미디어밸리는 지역개발 사업의 경험과 노하우, 투자유치 경험조차 없었다.


둘째, 사업전략을 충분히 마련한 뒤에 추진해야 한다.
인천시가 민간부문에 우선적으로 기대한 것은 사업전략 수립과 입주기업의 투자유치, 마케팅 활동이었다.
미디어밸리는 입지 선정이 될 때까지도 이런 사업전략을 세우지 않았다.
인천을 선정한 기준도 사실상 개발 이후의 땅값 상승 가능성이었다.
국내외 기업의 투자유치를 위한 마케팅 전략도 없었다.
일단 사업을 띄워놓고 전략은 가면서 만든다는 맨땅에 헤딩하는 사업방식의 전형적 폐단을 답습했다

구체적이고 실현가능한 사업전략이 없으니 인천시의 신뢰를 얻을 수 없었다.
이런 문제를 간파한 미디어밸리는 부랴부랴 10억원 가까운 비용을 지불하면서 다국적 컨설팅 회사 아서디리틀의 자문을 받지만, 공공개발 사업에 관한 경험이 없기는 컨설팅 회사도 마찬가지여서 돈만 날리고 만다.
당시 컨설팅 경쟁입찰에 참여했다가 탈락한 세계적 컨설팅 회사 맥킨지도 자사가 유로디즈니랜드 건설에 컨설팅한 경험을 경쟁사들이 보유하지 못한 강점으로 강조했지만, 놀이공원과 정보통신 산업단지는 본질적으로 다른 사안이었다.


실리콘밸리의 성공요인은 관련 핵심인력이 우연히 그곳에 있었고, 그래서 자본과 정보, 기술, 주거나 사업환경이 잘 맞았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인천시가 과연 경쟁력 있는 인적자원을 보유했는지 여부가 정보통신 산업단지의 핵심 성공요인이었다.
이 점에서 본다면 서울의 포이밸리, 역삼동 테헤란밸리나 대덕단지가 인천시보다 여건이 우수하다.
실제로 벤처 붐이 일자 강남에 테헤란밸리가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셋째, 협상지위에 대한 오해를 피해야 한다.
미디어밸리는 지자체들의 과열 유치경쟁을 경험하고, 지자체와의 협상력에서 계속 자신들이 우위에 있다고 착각했다.
인천시가 먼저 가시적 노력을 보여주기 전에는 사업진척을 유보한다는 협상 전략을 구사했다.
결과는 대실패. 오히려 작은 수이지만 투자에 관심 있는 기업체의 의사소통을 가로막는 셈이 되어 인천시와 투자 희망 기업의 불신만 더 키웠다.


입지선정이 끝난 뒤 협상우위는 인천시로 옮겨갔다.
미디어밸리 유치 이전부터 대우그룹은 송도신도시로 본사를 이전할 것이라며 적극적인 역할을 모색했다.
미국 EDS그룹은 다국적 경영컨설팅 회사 에이티커니를 인수한 상태기에 단지개발권 전체를 아웃소싱달라며 관심을 보였다.
인천시에 미디어밸리는 여러 대안 중 하나였다.
이후 미디어밸리는 서울시와 ‘상암지구 디지털 미디어시티’ 사업을 공동추진하기로 하면서 다른 지자체와 얼마든지 사업을 진행할 수 있다는 점을 과시한다.
그러나 서울시에 애초 인천시에 내건 요구조건을 제시하진 못한다.
미디어밸리 사업만 사라졌을 뿐이다.


곧 지방선거가 있다.
새로운 단체장들은 의욕적으로 많은 사업들을 벌일 것이다.
대다수 지자체들이 민자유치 혹은 제3섹터, 민관합작 등 명칭 여하에 불문하고 민간기업과의 협력을 필요로 할 것이다.
이런 단체장들과, 지자체와 공동으로 사업을 추진하려는 기업들이 미디어밸리 사례를 타산지석으로 삼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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