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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 디지털로 빚어낸 '글꼴 미학'
[비즈니스] 디지털로 빚어낸 '글꼴 미학'
  • 이희욱 기자
  • 승인 2002.05.2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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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 알타미라동굴 벽에 들소를 그리던 인류 조상의 손끝에는 동물의 영혼을 지배함으로써 사냥의 안전과 풍요를 기원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동시에 그는 억누를 수 없는 예술혼을 동굴 벽화를 통해 표출하고 싶었을 게다.
비록 시대는 다르지만 오늘날에도 이러한 표현 욕구는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되고 있다.
디지털 시대를 맞아 누군가는 ‘가상공간의 또다른 나’인 아바타에 자신의 본성을 투영하는가 하면, 다른 누군가는 홈페이지에 올린 한장의 사진으로 낯선 이에게 심경을 드러내기도 한다.
하지만 아직까지 인류 최고의 표현수단은 ‘문자’다.
삐뚤삐뚤 써내려간 편지를 보면서 글쓴이의 향기를 음미하는 사람이라면 오늘날 컴퓨터 속으로 들어와버린 반듯한 글꼴에 슬그머니 불만을 느낄 만도 하다.
글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려는 욕구 못지않게 글꼴에 대한 애착과 관심이 많은 ‘21세기 표현주의자’. 그들을 위해 다양한 표현양식을 생산해내는 타이포그라피스트가 바로 현대의 서체업체들이다.
한 신문에 연재됐던 만화 <광수일기>가 인기 상종가를 달릴 무렵, 작가 박광수 특유의 삐뚤어진 글씨체를 PC에서 사용할 수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광수체’란 이름으로 출시된 이 서체는 시중에 나오자마자 디자이너와 일반 PC 사용자들 사이에 큰 인기를 끌었다.
광수체를 제작한 업체는 국내 정상을 달리고 있는 서체개발 전문업체인 산돌커뮤니케이션 www.sandoll.co.kr으로, 이 회사의 서체들 가운데 광수체는 3년 연속 인기 1위를 차지하며 대표상품이 됐다.
‘스타 서체’는 광수체뿐만이 아니다.
지난해 코스닥시장에 안착하며 대표 서체업체로 자리잡은 윤디자인연구소 www.yoonfont.co.kr의 ‘윤체’는 출시 초기부터 지금까지 10년 가까이 마니아층을 중심으로 꾸준히 인기를 끌고 있는 베스트셀러 상품이다.
반면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에 내장돼 일반인들이 PC에서 자연스럽게 쓰고 있는 굴림, 바탕, 돋움, 궁서체 등은 한양정보통신 www.fontnara.co.kr의 작품으로, 범용성을 확보한 사례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런 개인 사용자용 서체는 개발업체에 큰 돈을 벌어주지는 못한다.
업체마다 다르겠지만 상위 3~4개 전문 서체업체의 경우 전체 매출에서 개인 사용자용 서체가 차지하는 비중은 5% 안팎이다.
매출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부분은 출판편집을 위한 출력소용 서체다.
소비자의 기호와 개성을 살리면서도 가독성을 높일 수 있는 책을 만들기 위해 다양한 서체가 출판 과정에서 사용된다.
이들 출력소용 서체는 각 서체업체 매출의 50%에서, 많게는 80%까지 차지할 만큼 주요 수익원으로 꼽힌다.
따라서 서체업체들은 되도록 많은 개인 사용자와 디자이너가 자사의 서체를 사용하게 해야 한다.
이들에게 인기를 얻어야 출력소에서도 그 서체에 눈을 돌리기 때문이다.
“새로 출시된 서체를 널리 알리기 위해 디자이너에게 무료로 서체를 제공하거나 웹사이트를 통한 불법 다운로드를 방관하는 사례도 있다.
” 한 서체업체 관계자의 말은 출력소 시장이 업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서체업체들이 눈독을 들이는 또 다른 세계는 ‘미디어용 서체’ 시장이다.
방송용 자막과 신문 서체, 영화 자막용 서체 등이 대표적이다.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신문이나 방송자막 등도 서체 개발업체들이 만들어 신문사나 방송사에 공급한 것들이다.
똑같아 보이지만 신문마다 서체는 모두 다르다는 얘기다.
<조선일보> <중앙일보> 등 일간지에 전용 서체를 공급하고 있는 산돌커뮤니케이션 석금호 사장은 “신문용 서체는 타이포그라피의 꽃”이라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보고 접하는 미디어인 만큼, 여기에 들어가는 서체 또한 최고의 품질과 가독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신문뿐 아니라 TV 방송화면 하단에 들어가는 자막 또한 서체 업체들이 OEM(주문자상표부착 생산) 방식으로 주문 제작해 공급하는 것들이다.
이밖에 국내의 대표적 문서작성 소프트웨어인 ‘한글’을 비롯해 모든 소프트웨어에 들어가는 서체들도 OEM 방식으로 제작된 것들이다.
또한 휴대전화나 개인정보단말기(PDA)를 비롯해 프린터와 카메라, 전기밥솥이나 에어컨 등의 LCD 액정화면에 들어가는 글씨도 이런 OEM 방식으로 제작되는 ‘상품’이다.
번쩍거리는 옥외 광고판의 글씨와 현수막도 예외는 아니다.
상품성을 지닌 생활 주변의 모든 제품에 포함된 서체들이 서체업체의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동안 ‘글자를 팔아서 먹고사는 사람들’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주요 수익창구 역할을 해온 출력소들이 침체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올해 들어 서체 시장이 활성화할 몇가지 조짐을 보이며 분위기 반전을 꾀하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지금까지 디자이너들이 매킨토시에서 작업할 때 사용해온 ‘쿼ㄱ(Quark) 익스프레스’란 출판용 소프트웨어가 올해 9월께 일반 PC용으로도 나온다는 점이다.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매킨토시에서만 가능했던 편집디자인 작업이 PC로로 가능해진다.
국내에 보급된 컴퓨터 중 매킨토시가 차지하는 비중은 5% 미만으로 추산된다.
이제 PC용 쿼ㄱ 익스프레스의 보급으로 일반 사용자도 PC에서 손쉽게 편집디자인 작업을 할 수 있게 되고, 매킨토시용 쿼ㄱ 익스프레스에서 사용되던 수많은 서체들이 PC용으로 재탄생할 것으로 예상된다.
지금까지 5%를 차지했던 편집디자인 서체 시장이 나머지 95%까지 확대될 것이라는 얘기다.
두번째는 정보기술의 발달과 함께 급속히 보급되고 있는 디지털 기기가 방대한 신규 서체 시장을 형성할 것이라는 점이다.
현재 50% 이상을 차지하는 출판편집 시장이 줄어들고 휴대전화와 PDA 등 디지털 기기쪽 매출이 그 자리를 대체할 수 있을 것이란 얘기다.
이와 함께 디지털 위성방송 시대가 열리면서 깨끗한 화면 못지않게 매끈한 방송자막에 대한 요구가 늘어난 점도 시장확대의 요인으로 꼽힌다.
지금의 방송자막은 디지털 방송에 맞는 미려한 해상도를 구현하는 데는 부족하기 때문에, 더욱 선명한 해상도를 보여주는 자막 제작이 필요하다는 움직임이 업계를 중심으로 활발히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변화는 ‘웹폰트’의 등장이다.
웹폰트는 HTML 형식의 웹사이트에서 사용하는 전용 서체로, 지금까지 출시된 비트맵이나 트루타입 서체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방식의 서체다.
예를 들어 광수체를 사용해 제작된 홈페이지를 방문객이 접속할 때 그동안 방문객의 PC에 광수체가 설치돼 있지 않으면 윈도우 기본글꼴인 굴림체로만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웹폰트를 사용하면 원본 글씨체 그대로 웹페이지를 감상할 수 있는 것이다.
웹폰트를 처음 선보인 곳은 중소 서체업체인 모리스디자인 www.fontpia.co.kr이다.
2000년 초부터 본격적인 개발에 들어가 1년2개월의 노력 끝에 지난해 초 15종의 웹폰트로 구성된 ‘폰트피아 프로’를 발표했다.
지난해 10월께부터 사람들의 관심이 확산되기 시작하더니 올해 들어 유료 다운로드 수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
특히 모리스디자인의 ‘웹정9’는 구매 고객의 90%가 선택할 정도로 효자상품으로 떠올랐다.
웹폰트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면서 윤디자인, 산돌, 한양 등 선두 서체업체들도 앞다퉈 웹폰트를 개발해 출시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한양이 17종의 웹폰트를 선보인 데 이어 올해 4월에는 윤디자인이 일반용 웹폰트 76종을 출시했다.
5월에는 산돌 또한 30여종의 웹폰트를 무기로 시장에 본격 뛰어들 태세를 보이고 있어 업체간 경쟁이 치열해질 전망이다.
특히 윤디자인이나 산돌의 웹폰트는 웹페이지뿐 아니라 e메일이나 메신저 등에도 응용할 수 있는 진보된 웹폰트라는 게 두 업체의 설명이다.
아직까지는 웹페이지 로딩 속도를 고려해 파일 크기를 줄이면서 기술적 완성도를 높여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지만, 올해 안에 웹페이지는 물론 e메일이나 메신저에서 개성이 담긴 서체를 사용할 수 있을 전망이다.
이와 함께 한글 서체의 불법 다운로드 문제를 막고 사용자의 인식을 강화하기 위한 업체의 노력도 지속되고 있다.
윤디자인이 매년 MBC와 공동으로 개최하는 ‘예쁜 손글씨 공모전’이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며, 산돌 또한 전문 서체개발 연구소를 설립해 한글의 아름다움을 발굴해 전파하고 있다.
“서체 개발은 이론적 바탕 위에 기술력을 덧씌운 타이포그라피 미학입니다.
여기에 한글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마음을 보태야 아름다운 글꼴이 탄생할 수 있습니다.
” 산돌 석금호 대표는 이 한마디로 서체 개발자의 노력과 정성을 설명한다.
‘읽기가 편하면 그만이지, 글꼴이 무슨 상관이냐’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다양한 표현과 개성이 중시되는 현대 사회에선 주요 표현수단인 글자에 대한 미학적 관심 또한 중요성을 더해가고 있다.
더불어 일상 생활과 밀접히 연결돼 있는 수많은 기기들이 ‘서체 비즈니스’와 연계돼 있다.
한글에 대한 사랑과 개성 표현, 첨단기기와 미디어 시장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타이포그라피를 디지털 비즈니스로 성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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