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6 17:03 (금)
관려기사1. 워크아웃 ‘살생부’ 악몽을 딛고
관려기사1. 워크아웃 ‘살생부’ 악몽을 딛고
  • 김호준 기자
  • 승인 2002.05.23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비대한 몸집 줄이고 수익성 개선에 총력… 108곳 가운데 86개 업체가 탈출 성공 워크아웃은 IMF가 기업들에 던져준 ‘쓴 약’이었다.
외환위기 이전 기업들은 수익성보다는 매출을, 내실보다는 외형을 중시하는 사업 풍토에 젖어 있었다.
무리한 사업확장으로 매출은 늘릴 수 있었지만 수익성이 떨어져 기업 체질이 허약해졌다.
또한 수익성이 뒷받침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업확장을 하려면 차입경영이 불가피했다.
부채비율이 높아졌고, 이런 기업들에 외환위기는 견디기 힘든 시련이었다.
수많은 기업이 유동성 위기에 빠졌고, 급기야 1998년 6월, 5개 부실은행과 55개 부실기업 퇴출이 발표됐다.
워크아웃은 채권단 합의로 유동성 위기에 빠진 기업을 대상으로 벌이는 기업개선작업. 기업에는 군살을 도려내는 쓰라린 수술이었다.
지금까지 워크아웃을 경험한 기업은 모두 108곳. 86개 업체는 졸업장을 받았거나 자율추진기업으로 떨어져나갔고, 22개 업체가 남았다.
채권단은 워크아웃을 신청한 기업과 경영개선을 위한 양해각서를 채결하고 채무유예, 이자탕감, 출자전환 등을 통해 현금흐름에 숨통을 터주었다.
이에 대한 대가로 기업은 자산매각, 기업분할, 조직 축소, 정리해고 등 뼈를 깎는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워크아웃 기간 중 기업들은 비대한 몸집을 줄이고 수익성을 개선하는 데 역량을 집중했다.
벽산 “살기 위해 알짜 사업 팔았다” 건축자재 전문업체 벽산은 98년 건설업체 부도에 따른 영업실적 부진과 과다한 차입금 부담으로 워크아웃을 신청했다.
98년 1월 김재우 사장은 추락하는 벽산을 살리기 위한 ‘구원투수’ 역할을 맡았다.
그는 주력인 석고보드 사업부문 매각이라는 극약처방을 내렸다.
당시 석고보드는 매출의 25%, 수익의 50%를 차지하는 ‘알짜’ 사업이었다.
김재우 사장은 “당시는 현금흐름을 개선하기 위해 무엇이든 팔아야 했다”며 “모든 것을 내놓았는데 해외업체들의 입맛에 맞는 석고보드가 팔린 것”이라고 설명한다.
석고보드 사업을 판다는 것은 채권은행마저 생각지 못한 사건이었다.
벽산은 석고보드의 대명사였기 때문이다.
회사 내부에서도 매각을 만류하는 분위기가 있었지만, 김재우 사장은 확고했다.
김 사장은 세계 굴지의 건축자재 업체에 e메일을 발송했고, 아시아 진출을 모색하던 프랑스 업체 라파즈에서 회답이 왔다.
라파즈는 유럽 최대 건축자재 회사로 세계 20여개 국가에서 72개 공장을 운영하는 글로벌 기업이다.
벽산은 4개월간의 밀고당기는 협상 끝에 내부적으로 설정한 예상가격인 400억원을 매각대금으로 받았다.
또한 석고보드 제품에 대해 10년간 독점 판매권을 갖게 됐다.
제품 브랜드는 벽산을 유지하기로 했다.
김재우 사장은 “석고보드 매각과 라파즈와의 전략적 제휴는 벽산이 생산업체이면서 동시에 유통업체로 발전하기 위한 전략적 포석이었다”고 설명한다.
그는 “벽산의 브랜드 가치는 3천억원으로 평가받았는데 이는 총 자산가치와 맞먹는 액수였다”며 “벽산은 브랜드력을 바탕으로 우량 거래처와 전국 지점망을 활용해 유통부문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고 덧붙인다.
실제 라파즈가 판권을 넘겨준 것은 벽산의 브랜드력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라파즈에 이어 벽산의 브랜드 가치를 활용하고자 하는 기업과의 전략적 제휴가 이어졌다.
미국 USG는 천장재를, 인도네시아 오메가는 나무 바닥재를 벽산 이름으로 공급하기로 계약을 체결했다.
또한 벽산은 현재 미국계 글로벌 기업과 건축자재 공급 계약을 추진 중이다.
유통회사로 위상을 재정립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김 사장은 우선 ‘특판’을 중지했다.
특판은 대형 건설업체와 직거래하는 것으로 매출을 늘리는 데 효과적이었지만, 외환위기 이후 건설업체가 부도위기에 빠지면서 부실 매출채권이 쌓이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또한 4천여개에 달하는 거래처를 400여개로 줄이는 작업이 이어졌다.
김재우 사장은 “방만한 거래처를 10% 수준으로 줄이자 매출이 급격히 감소했다”며 “하지만 매출위주에서 수익위주 경영으로 체질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조치였다”고 회고한다.
매출이 줄자 회사가 곧 망할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는 당시를 ‘고통의 시기’라고 표현한다.
결과적으로 ‘고통스런 길’을 택한 것은 옳았다.
부실을 털어내고 우량 거래처 위주로 사업을 재편하면서 98년 300억원 순손실에서 2000년 31억, 2001년에는 51억원의 순이익을 기록했다.
차입금도 97년 1816억에서 지난해에는 598억원으로 줄었다.
벽산은 채권단의 출자전환 없이 채무유예와 국내 지급보증 면제만으로 이러한 성과를 이뤄냈다.
수익성이 개선되면서 매출액도 서서히 증가해 98년 1177억원에서 지난해에는 1589억원으로 늘었다.
대한투자신탁 고연정 연구원은 내년이면 매출이 97년 수준인 1800억원대로 회복될 것으로 전망한다.
벽산은 2000년 이미 ‘워크아웃 자율추진기업’으로 전환됐다.
김재우 사장은 올해 안에 워크아웃에서 완전히 졸업할 것이라고 밝힌다.
여성의류 업체인 대현은 워크아웃 신청 2년 만인 지난해 12월에 ‘조기졸업장’을 받았다.
대현은 IMF 이후 내수가 급감해 유동성 부족을 겪고 있었다.
그러던 중 99년 8월 대우사태가 발생해 회사채 상환이 불가능해짐에 따라 그해 10월 워크아웃을 신청하기에 이른다.
대현 신현균 사장은 워크아웃에 들어가자마자 본사 사옥을 매각해 유동부채를 860억원에서 532억원으로 낮췄다.
주채권은행인 신한은행은 지난해 12월14일 “자구노력으로 차입금이 감소하는 등 향후 독자경영이 가능할 것이라는 판단에 따라 워크아웃 조기졸업 결정을 내렸다”고 밝혔다.
대현은 워크아웃 중임에도 할인판매가 아닌 정상가 판매를 택했다.
매출보다는 수익률을 확대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신현근 사장은 “그동안 매출목표 달성이라는 한가지 목표에만 급급한 ‘밀어붙이기식 영업’으로 수익성 악화, 브랜드력 저하를 가져왔다”고 말한다.
정상판매를 통해도 대현은 2001년 상반기 매출 목표를 100억원 이상 초과 달성했다.
영업손익 99년 211억원 적자에서 지난해 276억원 흑자로 전환됐다.
이러한 성과는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룩한 것이다.
대현은 워크아웃 과정에서 브랜드 수를 8개에서 5개로 줄였다.
의류업계에서 브랜드 확장은 매출을 늘리는 수단이었지만, 대현은 부실 브랜드를 과감히 정리하고 ‘페페’ ‘씨씨클럽’ 등 경쟁력 있는 브랜드에 집중했다.
또 부실의 결정타였던 ‘엔비’를 3개점에서 1개점으로 축소했고, 직영점도 100% 정리해 관리 비용을 줄였다.
한국능률협회 송옥현 이사는 “대현은 워크아웃이 ‘필요없는 체중을 줄이는 과정’이라는 것을 잘 이해하고 실행에 옮겼다”고 평가한다.
CEO 합리적 경영, 기업회생 결정타 벽산과 대현은 지난 4월26일 한국능률협회가 선정한 ‘2002년 경영개선 우수기업’에 들었다.
능률협회는 외환위기 이후 기업개선작업에 들어간 기업 중 경영정상화를 이뤄낸 기업 16곳을 경영개선 우수기업으로 선정했다.
여기에는 대우조선해양, 경남기업 등 대우 계열사이던 기업도 포함돼 있다.
대우조선해양은 99년 대우그룹 11개 계열사와 함께 워크아웃에 들어갔다가 만2년 만인 2001년 8월 졸업장을 받았다.
매출액이 3조원 대에 이르는 대기업 중에는 최초였다.
이 회사는 고부가가치 상품인 LNG선을 집중 공략한 것인 성공요인이다.
같은 대우 계열사인 경남기업은 대우그룹에서 가장 빨리 워크아웃에 들어가 2001년 9월 워크아웃 자율추진 대상으로 전환됐다.
건설업체인 경남기업은 첫해인 2000년 적자를 볼 것이라는 채권단의 예상을 깨고 72억원 흑자를 냈다.
이 회사는 채권단의 추가 지원없이 부동산, 유가증권 매각 등을 통해 독자적으로 경영정상화를 이뤘다.
외형을 키우기 위한 적자 수주는 철저히 배제하고 건설 전문가들로 구성된 상임위원회의 검증을 거친 ‘이익이 남는’ 공사 수주에 집중하는 영업전략이 주효했다.
능률협회 송 이사는 “워크아웃에서 성공적으로 빠져나온 기업들은 대부분 자기 분야에서 전문성을 인정받고 있던 기업”이라며 “하지만 기업회생의 가장 큰 힘은 전문경영인의 합리적 경영관리였다”고 밝혔다.
송 이사는 “이번에 경영개선 우수기업으로 선정된 기업들은 기업개선작업이 보약이 돼 성공적으로 ‘돈 버는 기업’으로 변신했다”고 말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