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6 17:03 (금)
[미국] 에너지 기업 ‘최대 격동기’
[미국] 에너지 기업 ‘최대 격동기’
  • 최우성 기자
  • 승인 2002.06.14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대대적 부실회계 조사 일파만파… 비즈니스 모델 사업성마저 의문 제기 지난해 가을 파산한 공룡기업 엔론의 뒤를 이어, 미국의 에너지 기업들이 잇달아 커다란 시련을 겪고 있다.
회계장부 조작 등의 혐의가 밝혀지면서 사법당국의 강도 높은 수사에 시달리고 있다는 점은 엔론의 경우와 마찬가지지만, 그 여파는 훨씬 더할 전망이다.
에너지 기업들을 지탱해온 비즈니스 모델 자체에 대한 의구심이 날로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시장에서는 엔론 사태에 버금가는 또 다른 대형사건이 터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점차 확산되는 분위기다.
지난 5월말에는 미국의 주요 에너지 기업들의 최고경영자들이 하루의 시차를 두고 잇달아 사퇴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엘파소, 윌리엄스, CMS에너지, 디너지 등의 에너지 기업들을 이끌던 최고경영자들이 하루아침에 비즈니스 무대에서 사라졌다.
장부상 매출규모를 부풀리는 이른바 ‘라운드 트립 거래’에 대한 사법당국의 조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직후에 벌어진 일이다.
지난 6월2일에는 엘파소의 재무당담 임원인 찰스 다나 라이스가 휴스턴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권총으로 자살한 채 발견돼 충격을 더해주었다.
건강문제로 비관 자살한 것일 거라는 엘파소쪽 공식 발표와는 달리, 시장의 반응은 놀라울 만큼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그의 죽음이 알려진 후 불과 몇분이 지나지 않아 엘파소 주가는 25% 이상이나 곤두박질쳤다.
엘파소가 온갖 부패로 얼룩진 ‘제2의 엔론’이 될 것이라는 예상이 순식간에 널리 퍼졌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그의 죽음에서 즉각적으로 지난 1월 권총 자살한 엔론의 부회장 클리포드 복스터의 전례를 떠올렸다.
암울한 이야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을 전망이다.
윌리엄스에서 해고된 존스 머피라는 옛 직원이 6월1일 <뉴욕타임스>에 회사의 내부 부정행위에 대해 결정적 제보를 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분위기는 더욱 달아올랐다.
2년 전 캘리포니아지역을 강타했던 에너지 위기 때 이 회사가 의도적으로 가격을 조작해 막대한 부정이익을 챙긴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존스 머피가 밝힌 행위의 내용이 대부분의 에너지 기업들에서 관행처럼 굳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파장은 더욱 컸다.
현재 진행중인 수사와 맞물리면서, 경우에 따라서는 미국 에너지 산업 전체가 강력한 회오리바람에 휩싸일 것이라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사태의 본질은 단순히 몇몇 기업들의 부정행위에 있는 게 아니라, 에너지 기업의 비즈니스 모델 자체에 대한 문제 제기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1990년대 들어 에너지 시장의 민영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면서 전기, 가스 등을 사고파는 ‘에너지 거래’는 새로운 사업 모델로 큰 인기를 누렸다.
99년 1430억달러였던 연간 에너지 거래액은 2000년에는 2170억달러로 늘어난 데 이어, 지난해에는 4460억달러로 급성장한 바 있다.
새로운 투자처를 찾던 주식시장이 새로운 사업분야에 군침을 흘린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와 함께 이들 에너지 기업들의 주가는 하늘로 치솟았고, 투자자들의 발걸음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 에너지 기업 내부를 들여다보면 사정이 전혀 딴판이라는 데 문제가 있었다.
대부분의 업체들이 전혀 수익은 내지 못하면서도 매출액만을 부풀려 주가차익 열매를 따먹어왔기 때문이다.
지난해 가을 파산한 엔론의 사례는 에너지 산업의 거품이 빠지기 시작한 서막을 알린 것이었다.
신용평가 회사들이 에너지 기업들의 신용등급을 잇달아 떨어뜨리고 나선 것도 시장이 느끼는 위기감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무디스가 에너지 중개기업 미란트의 신용등급을 ‘정크본드’ 수준으로 떨어뜨린 데 이어 조만간 디너지, 윌리엄스 등이 줄줄이 이와 비슷한 냉혹한 평가를 받으리라는 예상이 널리 퍼져 있다.
개별 기업의 문제를 떠나, 에너지를 사고파는 데 주력해온 에너지 거래 사업 모델을 바라보는 시장의 눈길이 싸늘하게 식었기 때문이다.
에너지 기업들 대부분의 주가가 예전보다 20%가량 떨어진 것도 이런 시각과 무관하지 않다.
물론, 월가의 싸늘한 분위기와는 달리 에너지 산업 자체가 한순간에 붕괴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과연 지금의 위기가 90년대 이후 한때를 풍미했던 사업 모델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기나긴 조정국면인지, 사법당국의 수사가 마무되는 시점쯤이면 윤곽이 뚜렷이 드러날 전망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