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6 17:03 (금)
[비즈니스] '빗장' 잠근 대기업 '곳간'
[비즈니스] '빗장' 잠근 대기업 '곳간'
  • 김호준 기자
  • 승인 2002.07.18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삼성전자, LG전자, 현대자동차 등 주요 대기업들이 보유하고 있는 현금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사상 최대치를 기록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올해 6월말 현재 5조6천억원의 현금을 갖고 있으며, 연말에는 현금이 7조~8조원에 이를 전망이다.
LG전자 역시 사상 최대인 2조원의 현금을 보유하고 있다.
현대자동차도 연말에는 보유현금이 6조5천억원에 달할 전망이다.


현금 보유액이 늘어나는 것은 일부 계열사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삼성은 그룹 전체적으로 7조원 이상의 현금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LG는 4조원, SK도 3조원에 이른다.
롯데, KT, 포스코 등도 상당한 양의 현금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문가들은 국내 10대 기업이 보유하고 있는 전체 현금성 자산이 20조원 이상일 것으로 추정한다.
증권거래소에 따르면 12월 결산 상장법인 393사 전체의 1분기 말 현재 보유 잉여금이 175조1668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1분기 설비투자 미미한 수준


기업들의 현금자산이 늘고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영업이익이 크게 증가했기 때문이다.
올해 1분기에 주요 대기업들은 분기 기준으로 사상 최고의 실적을 거뒀다.
2분기에도 1분기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거의 근접한 수준으로 영업이익을 냈다.
삼성전자는 상반기에만 4조원가량의 영업이익을 냈고, SK텔레콤은 1조3천억원, 현대자동차는 1조1천억원 이상의 영업이익을 실현했다.
LG전자의 상반기 영업이익도 반기 실적으로는 사상 최대인 7963억원에 이르렀다.


금융비용이 줄어든 것도 현금보유액 증가에 한몫했다.
외환위기 이후 대기업의 재무구조는 크게 개선됐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말 자산규모 기준 상위 12대 기업집단의 비금융업부문 평균 부채비율은 196%로 지난해의 226%보다 낮아졌다.
이자율도 외환위기 이전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메리츠증권 최석포 애널리스트는 “IMF 외환위기 이후 차입경영에 기초한 외형 위주의 성장에서 수익 중시 경영으로 기업운영 형태가 달라진 것이 현금보유액 증가에 결정적 원인이 됐다”고 진단한다.


IMF 이전에는 대기업들이 지금처럼 많은 현금을 보유하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덩치가 크면 살아남는다는 논리가 지배하는 상황에서 기업들은 자금만 구할 수 있다면 중복투자, 과잉투자를 서슴지 않고 감행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IMF 외환위기라는 쓰라린 경험을 하면서 기업들은 투자에 신중해졌다.
한국은행 기업경영분석 담당 안형순 차장은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 과정을 거치면서 대기업의 설비투자가 전반적으로 부진했다”며 “경기가 호전되는 상황에서도 본격적 설비투자는 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올해 1분기 설비투자 규모는 15조7천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3.2% 늘었다.
하지만 지난해 설비투자 규모가 전년에 비해 9.8% 감소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미미한 회복세다.
굿모닝증권 김성권 연구위원(국내경제 담당)은 “과거 경기가 풀리고 자금사정이 좋아지면 경쟁적으로 사업확장에 나섰던 대기업들의 투자 패턴이 달라졌기 때문”이라며 “과잉투자로 피해를 본 경험이 있는 기업들이 수익성과 안정성을 중요시하게 되면서 투자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대기업들이 설비투자를 미루면서 성장 잠재력이 위축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 윤종언 기술산업실장은 “적정한 수준의 현금을 보유하는 것은 기업들이 급변하는 경영환경에 대응할 수 있는 여력을 갖추는 데 필수적이지만, 지금처럼 기업별로 수조원대의 과도한 현금을 보유하는 것은 한국 경제의 성장 잠재력을 위협하는 사태를 불러올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또 “개별 기업 입장에서도 과도한 현금 보유는 기회비용 상실로 이어진다”며 “거액의 현금을 쥐고 있다가 투자시기를 놓치면 미래 성장동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국내 대기업들은 미국의 경제불안 등 세계경기 회복의 불확실성 때문에 하반기 투자 계획을 보수적으로 잡고 있다.
삼성전자는 올해 1분기에 설비투자 계획을 3조500억원에서 4조5500억원으로 확대한 이후 별다른 투자계획이 내놓지 않고 있다.
최석포 애널리스트는 “세계 정보기술 산업 경기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섣불리 2조~3조원대 추가적인 설비투자를 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라고 설명한다.



경기 회복 감지되면 쏟아질 듯


LG는 7월초 1조4천억원을 투입해 TFT-LCD 생산설비를 증설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는 애초 투자계획에 포함됐던 내용이고, 추가적인 대규모 설비투자 계획은 없는 상태다.
LG구조조정본부 관계자는 “달러에 대한 원화 환율 하락 때문에 하반기에는 이익률 감소가 예상된다”며 “양호한 캐시플로를 기반으로 하는 수익 위주의 경영이 강조될 것”이라고 밝혔다.


SK 관계자는 “기업들이 새로운 사업을 많이 벌이고 싶어도 경기가 어디로 튈지 몰라 여기저기 발을 걸쳐놓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한다.
그나마 SK는 1조9400억원을 들여 KT 지분을 인수하고, 두루넷과 라이코스를 사들이는 등 공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는 편이다.
현대자동차도 단일 업종의 장점을 살려 미국 공장 기공, 중국 베이징자동차와의 합작공장 계약 등 적극적으로 해외진출을 시도하고 있다.


상당수 대기업들은 어느 시점에서 투자를 늘릴 것인가를 저울질하고 있는 상태다.
특히 미국 경기가 언제 회복 국면에 들어설 것인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굿모닝증권 이성권 연구위원은 “기업 입장에서도 투자의 필요성은 강하게 느끼고 있다”며 “미국 경기가 회복단계에 들어서는 것이 감지되면 투자가 급격히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삼성경제연구소 윤종언 실장은 기업들이 신기술, 신사업을 발굴해 의욕적으로 투자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삼성과 LG가 반도체, TFT-LCD 등 몇몇 분야에서 일본을 추월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 업체가 주춤하고 있을 때 과감하게 투자를 했기 때문”이라며 “미국 경제와 일본 경제가 주춤하고 있는 지금이 선진 업체들과 격차를 줄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말한다.
그는 “자금여력이 있을 때 미래의 성장을 담보할 새로운 사업을 발굴해 적극 투자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