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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저당잡힌 노후, 스러진 희망
[영국] 저당잡힌 노후, 스러진 희망
  • 최우성 기자
  • 승인 2002.07.1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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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기업연금 파산이 속출하면서 영국 사회가 들먹거리고 있다.
그 파장은 단순히 정치적 공방의 차원을 넘어 기업연금 제도의 본질에 대한 문제제기로 이어질 태세다.
영국 언론들은 1980년대 말에 강제적 성격의 국민연금 제도가 사라지고 기업연금이 도입된 이래 가장 뜨거운 공방이 벌어질 것이라고 벌써부터 분위기를 달구고 있는 중이다.


기업연금 제도를 둘러싼 공방의 한가운데에는 주식시장의 침체가 자리잡고 있다.
기업연금 제도가 도입되면서 고용자와 피고용자의 납부액으로 이루어진 연금기금이 자유롭게 주식시장으로 흘러들었지만, 주식시장의 침체로 그 돈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노후보장 수단이던 연금이 허공으로 사라지면서 빈곤노인층 문제가 가장 커다란 사회문제로 등장하게 된 건 물론이다.


평균적으로 통상임금의 10%를 연금기금에 적립해온 영국 기업들의 피해사례는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JP모건에 따르면 10만명의 피고용자로부터 250억파운드를 적립해 최대 규모를 자랑했던 통신업체 브리티시텔레콤(BT)은 주식시장 몰락으로 42억파운드의 부채를 지게 됐다.
에너지 기업인 BP는 30억파운드를 허공에 날렸다.
롤스로이스 역시 3억9200만파운드의 피해를 입었다.


설령 파산을 모면했다 하더라도 기업들이 입은 손실은 경영에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
기업연금 피해로 영국 기업의 44%가 신규 인력채용 과정에 지장을 겪고 있다는 한 조사결과도 나왔다.


하지만 피고용자가 입은 피해는 한층 더하다.
약삭빠른 기업들은 오래 전에 이미 통상임금의 몇퍼센트를 기업연금에 적립할지를 피고용자 스스로 결정하도록 규정을 바꿔버렸다.
겉으로 보기에 그럴듯해 보이는 이 규정에 숨겨진 맹점은, 모든 위험을 피고용자가 떠안는다는 사실에 있다.
심지어 연금을 타게 될 나이도 주식시장의 상황에 따라 유동적일 수 있도록 했다.
노후의 인생이 전적으로 현재의 주식시장 상황에 좌우되게 된 셈이다.


빈곤 노인층 문제가 대두된 건 바로 이런 사정을 배경으로 한다.
이미 영국에서 빈곤상태에 처해 있는 노인인구는 급속하게 늘어난 상태다.
1100만 연금생활자 가운데 대략 200만명은 국가가 정한 최저연금 수준에 만족해야 하는 실정이다.
그나마 최근 영국 정부가 최저연금 수준을 주당 75.50파운드에서 98파운드로 올린 게 다행이다.
이는 매월 600유로(약 60만원)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이 정도의 생활비로는 영국 대도시에서 도저히 살아갈 수 없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런 사정을 배경으로 기업연금 제도의 본질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점차 거세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주식투자로부터 얻을 수익은 애초 예상수익률로 상정했던 10%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는 게 판명됐다.
게다가 사람들의 평균수명이 늘어나면서 연금 지급기간이 훨씬 길어진다는 사실을 영국의 기업연금 제도는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다는 목소리도 높다.


기업연금 제도가 도전을 받게 됨에 따라 영국 정부 당국은 기업이 연금기금 운용을 통해 얻은 실적을 기업회계에 반영해야 한다는 규정을 마련했지만, 사태는 정반대 방향으로 흘러갔다.
기업연금 운용실적이 나쁜 기업들의 주가가 더욱 떨어지면서 기업연금 피해액은 덩달아 늘어났기 때문이다.


정부로부터 연구용역을 받은 연구기관은 7월초 강제적 성격의 공적연금 제도를 다시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기도 했다.
그럼에도 개인의 노후보장을 전적으로 개인 책임으로 떠넘기는 영국 연금제도의 근간이 뒤바뀔 가능성은 전혀 없는 게 사실이다.
때문에 연금 지급연령을 더욱 높여야 한다는 따위의 미봉책만이 논의되고 있는 중이다.


이제 영국 국민들에게 단 하나의 대안밖에 남지 않았다는 자조 섞인 목소리도 끊이지 않는다.
지금보다도 더욱 허리띠를 졸라매고 저축을 늘려야 한다는 게 그것이다.
영국 연금기금협회의 분석에 따르면, 영국 국민들이 현재와 같은 생활수준을 노후에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실질급여액의 15~20%를 저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언론의 지적처럼 현재의 상황이 지속되는 한 영국 국민들은 “더 많이 저축하거나, 늙어서 가난하게 살거나”의 두가지 길 사이에서 선택을 내릴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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