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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아메리카] 국제자본, 중남미 쥐락펴락
[라틴아메리카] 국제자본, 중남미 쥐락펴락
  • 박종생/ <한겨레> 국제부
  • 승인 2002.07.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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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와 브라질발 경제위기가 중남미 각국에 확산되고 있다.
1997~98년 동아시아 외환위기의 전염속도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지난달부터 우루과이·파라과이·멕시코·칠레 등 주변국들로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4년간의 경제침체 끝에 지난해 12월24일 대외채무 지불유예(모라토리엄)를 선언했지만, 반년이 지나도록 위기 탈출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고 오히려 상황이 악화하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90년대 초반 국제통화기금(IMF)이 권고하는 신자유주의 경제모델의 모범생으로 꼽혔다.
하지만 이 나라는 이제 이 모델이 잘못 적용됐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며, 과연 위기가 어떻게 해결될 것인지를 가늠해볼 수 있는 시험대로 바뀌었다.


오는 10월 대선을 앞두고 있는 브라질에서는 노동자당 후보인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애칭은 룰라) 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높아지자 국제 금융자본들의 신규투자 중지와 자금회수로 금융시장이 요동을 치고 있다.


멕시코의 페소화 가치는 지난달 말 달러당 9.99페소를 기록해 2년 만의 최저수준으로 떨어졌으며, 칠레 페소화도 지난달 말 미국 달러화에 대해 3.8% 하락해 8개월 만의 최저수준을 기록했다.
베네수엘라의 볼리바르화도 정정불안으로 올해 2월에 자유변동 환율제를 채택한 이후 미국 달러에 비해 39%나 폭락한 상태다.
브라질·아르헨티나와 함께 남미공동시장(메르코수르) 회원국인 우루과이와 파라과이도 경제위기에 휩싸여 있다.



브라질 대선 경쟁에 ‘입김’


이번 중남미 외환위기에도 환투기 세력의 준동, 국제통화기금의 부적절한 정책 대응, 미국 월가의 금융 메이저 플레이어들의 역할 등의 문제점들이 등장해 주목을 끌고 있다.


국제 헤지펀드 업계의 대부 조지 소로스는 최근 브라질 일간지 <폴라>와 가진 인터뷰에서 오는 10월의 브라질 대선과 관련해 의미심장한 발언을 했다.
“로마시대에는 로마인들만이 투표를 했다.
현대의 세계 자본주의에서는 브라질인들이 아닌 미국의 금융기관들만이 투표를 한다.
” 소로스는 보수 집권당 후보인 주제 세하 후보를 지지한다고 노골적으로 밝히면서 “노동자당의 룰라 후보가 당선되면 브라질은 국가파산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이런 발언 뒤에 브라질 통화인 헤알화는 급락했다.


소로스의 발언이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처럼 지난 5월 이후 국제자본들이 브라질을 ‘공격’하고 있다.
5월엔 모건스탠리 등 미국의 주요 투자은행들이, 6월엔 S&P 등 신용평가 회사들이 노동자당의 룰라 후보가 당선될 경우 기존 경제정책의 변화와 외채상환 재협상 가능성을 거론하며 브라질의 투자·신용등급을 일제히 하향조정했다.
‘시장은 룰라 후보를 원하지 않는다’는 명백한 신호를 보낸 것이다.


월가 금융기관들의 움직임은 브라질의 정치·경제부문에 커다란 파장을 몰고오고 있다.
우선 국제자본들이 브라질에 대한 신규투자를 중단하거나 자금회수에 나서고 있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6월 한달 동안 브라질 증시에 대한 투자를 3억5400만달러나 줄였다.
이같은 투자회수 규모는 98년 브라질 경제위기 이후 최대치다.
미국의 금융기관들은 수억에서 수십억달러의 채권회수에 나서고 있다.
브라질에 있는 기업이나 개인들도 달러 사재기에 나서는 등 달러 가수요가 붙고 있다.
이에 따라 브라질 통화인 헤알화는 최근 석달새 19%나 가치가 급락해 16일 현재 달러당 2.87헤알에 거래되고 있다.
헤알화 급락에는 브라질의 2대 수출국인 아르헨티나가 경제위기에 휩싸이고 미국 경제의 불투명성이 커진 점도 작용했다.


헤알화 급락은 현재 18.5% 수준인 금리를 인하해 경기를 진작시키려는 브라질 당국의 발목을 붙잡고 있으며, 외채를 불리는 결과를 낳고 있다.
외채 중 상당부분을 달러로 결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중앙은행은 환 방어를 위해 수십억달러의 외환보유고를 소진하고 있다.


이런 경제 불안정은 대선 주자들의 지지도에도 곧바로 영향을 미쳤다.
5월초 40% 수준이던 룰라 후보의 지지도는 6월말께 4%포인트가량 떨어져 36%를 기록한 반면, 세하 후보의 지지도는 16% 수준에서 4%포인트가량 상승했다.
최근에는 지난 97년 한국에서 벌어진 것처럼, 대선 후보들이 미리 국제통화기금과의 협약 이행을 서약해야 한다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


국제자본들이 룰라 후보를 꺼리는 이유는 국내총생산의 55%에 이르는 외채를 상환하기 위해서는 재정긴축을 해야 하는데 룰라 후보가 당선될 경우 그렇게 하기가 어려울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89년 이후 네번째 대권에 도전하는 룰라는 과거 선거운동에서 외채상환 중지, 사회보장지출 확대 등을 주장해왔다.
하지만 이번 선거운동에서 룰라는 “나는 많이 변했다”며 “국제사회와의 의무를 이행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아르헨티나, IMF 정책에 불만


브라질 최대 비즈니스 도시인 상파울루 현지에서 만난 브라질 금융계 인사들은 국제자본들의 움직임에 대해 상당히 격앙돼 있었다.
브라질은행협회의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호베르투 루이스 트로스타는 “모든 대선 후보들이 재정흑자 유지 등의 기존 정책을 지지하고 있으며 브라질은 제도적으로 성숙돼 있다”며 “한 국가의 미래를 개인 후보와 연관시켜 예측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했다.
브라질 주요 금융그룹인 술아메리카의 로베르토 다 코스타 부회장은 “경제 펀더멘털은 크게 변한 게 없는데 통화가치가 급락한 것은 환투기 세력들 때문”이라며 “브라질 외환·주식시장은 규모가 워낙 작기 때문에 환투기 세력이 하루에 5천만달러만 넣다 뺐다 하면 요동을 친다”고 말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신규 구제금융 공여를 중단하고 재정적자 축소 등 긴축정책을 요구하고 있는 국제통화기금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높다.
아르헨티나의 국립 부에노스아이레스대학의 알도 페레르 교수(경제학)는 “지금 아르헨티나에 필요한 것은 소비를 늘려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것”이라며 “국제통화기금은 오히려 숨을 막히게 하는 처방책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아르헨티나가 지나치게 부담스러운 외채에서 탈피하기 위해서는 채권자들과 재협상을 통해 이를 경감시켜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아르헨티나중앙은행의 리카르도 브란다 부총재는 “아르헨티나가 방만한 재정운용을 하는 등 내부 문제가 많은 게 사실이지만 지금까지 위기를 극복한 국가들 가운데 홀로 선 경우는 없다”며 국제통화기금에 하루 빨리 지원을 해줄 것을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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