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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소비자는 ‘봉’ 아닌 ‘왕’
[경영]소비자는 ‘봉’ 아닌 ‘왕’
  • 양우성 / 공공정책 및 경영
  • 승인 2002.07.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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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개각 과정에서 이태복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자신이 장관직에서 물러나게 된 이유가 다국적 제약업계의 로비와 압력 때문이라고 밝혀 파문이 일었다.
장관이 업계의 압력으로 장관직을 내놓게 되었다고 주장한 일은 아마 정부수립 이후 처음일 것이다.
일반 국민들은 이번 파문을 지켜보며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과연 몇몇 제약회사들이 한 나라의 장관까지 바꿀 정도의 영향력이 있을까 하고 의구심을 갖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보건복지부와 제약업계 사이에 의약품 가격책정을 둘러싸고 심한 갈등과 다툼이 존재했다는 점이다.
문제는 의료서비스의 소비자인 동시에 정부정책의 대상인 일반 국민들이 정부와 제약업계가 상호작용을 벌이는 정책과정을 들여다볼 수 없다는 데 있다.
이른바 정책과정의 불투명성이 문제인 셈이다.



고가약품 처방 크게 늘어


의약분업의 성과가 어떠한지 여전히 논란거리로 남아 있기는 하지만, 의약분업 실시 이후 약값 지출이 늘어나고 제약업계가 급성장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지난 한해 동안 건강보험공단과 환자들은 약값으로 약 4조5천억원을 지출했다.
의약분업 이전인 1999년보다 25% 증가한 수치다.
제약업계로서는 커다란 경사가 아닐 수 없다.


정부 역시 이 점을 솔직히 인정하고 있다.
6월17일 보건복지부는 의약분업 실시로 고가약품 처방이 늘어나 재정부담의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고가약품 처방비율이 2000년 5월에는 36.24%였던 데 비해, 2001년 1월에는 53.48%로 크게 높아졌고, 그 이후에도 늘 50%를 넘었다.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2월까지 잠시 동안만 48%로 떨어졌을 뿐이다.


그렇다면 약값 상승과 건강보험 재정부담이라는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없을까? 미국 제약업계의 경험에서 실마리를 찾아보자.

80년대 말 미국의 제약산업과 의료 서비스 시장에는 새로운 형태의 고객이 등장했다.
바로 ‘집단화한 고객’이다.
회원으로 가입하면 질병예방, 병원입원과 치료, 간호 등 폭넓은 의료 서비스를 제공받는 ‘건강관리조직’(HMO: Health Maintenance Organization)이 등장했고, 대량으로 의약품을 구매하는 의약품 우선공급자단체(preferred provider organization), 약품공제조합(PBM: Pharmaceutical Benefits Management) 등이 선보였다.
이들 집단적인 대형 의약품 고객들은 의사들의 처방전 목록을 규정하고 통제하면서 제약업계에 가격인하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HMO는 회원들의 대리인으로서 ‘약효 동등성’이 있는 대체약품을 처방하도록 의사들에게 명령했다.
제약회사가 병원과 의사들을 상대로 벌여온 마케팅 활동을 무력화한 것이다.
HMO는 제약회사가 쉽사리 챙기던 이윤의 상당부분을 자신들의 이윤과 회원들의 가치로 되돌리는 데 성공하기 시작했다.


공격적 가격인상 정책으로 높은 수익을 거두던 제약업계에 대해 미국 언론과 시민단체는 분노를 쏟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제약업계는 언론의 비난이나 시민단체의 분노쯤에는 개의치 않는 분위기였다.
그러던 것이 HMO, PBM과 같은 대형 고객들이 등장해 가격인하 압력을 가하면서 상황이 뒤바뀌기 시작한 셈이다.


제약산업의 시장구도가 새롭게 바뀌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 제약회사 머크는 과감한 전략을 채택하기에 이른다.
우선 머크는 91년에 2700여명의 미국내 영업인력을 감축했다.
병원과 의사를 개별적으로 공략하는 마케팅 방식을 더는 고집하지 않겠다는 전략적 선택이었다.
2년 뒤 머크는 PBM 업체 가운데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메드코컨테인먼트시스템을 60억달러에 매입했다.
메드코컨테인먼트시스템은 당시 3300만명의 미국인들에게 의약품을 제공할 뿐 아니라, 이들 고객의 데이터베이스를 보유하고 있었다.


머크가 대형 PBM 업체를 인수한 이유는 간단했다.
어떤 약품을 환자에게 제공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힘, 처방전 작성에 간섭하는 힘이 바로 제약산업의 시장점유율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병원과 의사들에게 전화와 e메일을 보내 자사의 약품과 동등한 효과를 지닌 다른 제약회사 약품으로 대체하도록 할 수 있는 힘을 머크는 두려워한 것이다.



건강보험공단의 역할 중요


‘집단화한 대형 고객’의 등장으로 제약업계 판도가 바뀐 사례가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은 분명하다.
무엇보다도 의료 서비스 고객의 집단적 구매력을 활용한다면 의약품 가격상승 문제는 지금보다도 훨씬 쉽게 해결될 것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한국에서는 ‘건강보험공단’이 최대 단일고객의 위상을 갖고 있다.
다만 그들이 자신들의 역할, 달리 말해 의료 서비스 고객의 이익을 보호하고 대변한다는 역할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보건복지부가 시장에 직접 개입해서 의약품 가격을 규제하는 것으로는 별다른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
보건복지부는 의료 서비스 소비자, 즉 환자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확고한 사명감이 있지도 않다.
오히려 많은 국민과 언론으로부터 의사와 약사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의혹에 수시로 시달려왔다.
정부가 직접적으로 가격규제를 하면 결국 제약업계의 포로가 되거나, 아니면 의약품 유통정보나 가격정보, 원가정보 등을 제대로 파악하는 데 실패해 오히려 제약업체들을 가격담합으로 이끄는 역효과를 낳을 수도 있다.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건강보험공단에 대한 재정지원을 중단하고 건강보험공단이 직접 경영수지를 정상화하도록 독려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건강보험공단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제약업계와 의사들에게 약효 동등성이 있는 대체약품을 처방하도록 강력하게 요구해야 한다.
건강보험공단의 경영진들은 자신들이 어떤 협상력을 지녔는지, 무엇이 자신들의 강점, 약점인지를 차분히 파악해야 한다.
건강보험 적자를 세금으로 메우기 위해 복지부 관료들에게 손을 벌리기보다는 차라리 제약회사와 병원, 의사들을 대상으로 의약품 가격구조와 처방목록의 재검토와 재협상을 요구하는 것이 더 당당하다.
게다가 ‘갑’으로서의 영향력도 느끼는 재미도 만끽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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