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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부실 기업인, 경영권 유지논란
[초점] 부실 기업인, 경영권 유지논란
  • 이경숙 기자
  • 승인 2002.07.2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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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해가는 기업을 회생시키려면 지금까지 회사를 이끈 노하우가 있는 기존 경영진을 활용하는 것이 좋을까, 구조조정을 이끌 만한 새로운 경영진을 들여오는 것이 좋을까?

이 문제를 둘러싸고 통합 도산법안 논의가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는 가운데 상징적 ‘사건’ 두가지가 일어났다.
7월18일 대한종합금융 파산관재인들이 전 대주주인 성원건설 전윤수 회장 등 경영진 9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받았다.
서울지법은 “피고들이 대출한도를 이미 초과한 성원건설과 계열사에 대출규정을 어기고 수백억원을 불법 대출해줘 대부분을 변제받지 못한 사실이 인정된다”며 전 회장이 30억원, 이사와 감사 4명이 26억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7월17일엔 (주)고합이 장치혁 전 회장 등 전 경영진 23명에 대해 무더기로 50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1998년 고합이 워크아웃에 들어가기 전까지 전 경영진이 재무가 불량한 계열사에 지급보증을 서면서 무리하게 회사를 이끌어 2천여억원의 손해를 입혔다는 게 그 이유다.


고합의 장치혁 전 회장이나 성원건설의 전윤수 회장은 각자 자신의 분야에서 내로라 하는 노하우를 쌓아온 노장들이다.
66년 고려합섬을 창립한 장 전 회장은 70년대 합성 이불솜 ‘해피론’을 내놓아 선풍을 일으키며 고합을 한때 30대 기업에 진입시키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87년 취임한 전 회장은 IMF 구제금융 이전까지만 해도 성원건설을 크게 성장시켜, 회사가 2년 연속 성장률 1위 기업(한국능률협회), 3년 연속 건설업종 최우수 기업(대신경제연구소)으로 선정될 정도였다.


그러나 IMF 구제금융기에 이들의 운명은 달라졌다.
워크아웃에 들어간 고합은 두차례에 걸쳐 2조3천억원의 빚을 출자전환 받고도 회생에 성공하지 못해, 결국 핵심사업인 유화부문을 KP케미칼로 떼어내고 3차 출자전환을 받고서야 정상화의 길에 들어섰다.
김대중 대통령의 차남 홍업씨와 측근한테 14억여억원을 건네고 이형택 당시 예금보험공사 전무를 통해 빚 3300억원을 탕감받았던 성원건설은 최근 경영상태가 좋아져 잘하면 올해 안에 화의를 벗어날 수 있게 됐다.


채권단이 접수한 고합 장 전 회장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반면 화의 인가를 받은 성원건설 전 회장은 직접 구조조정을 이끌었다.
고합에서 장 전 회장의 지분은 1.47%으로 줄었다.
성원건설에서 전 회장의 지분은 꾸준히 늘어 25.97%가 됐다.


엇갈린 두 사주의 운명만큼 주변의 평가도 엇갈린다.
전국경제인연합회 등은 “고합이 장 전 회장의 경영 노하우를 살리지 못해 기업회생이 더뎌졌다”며 안타까워한다.
고합 채권단 대주주가 된 KP케미칼쪽은 이에 고개를 저으며 ‘노코멘트’라고 말한다.


성원건설 직원들은 “그래도 전 회장이 기업을 잘 살려내지 않았냐”며 전 회장한테 강력한 지지를 나타낸다.
금융권 사람들은 “계열사인 대한종금에서 한도 이상의 돈을 끌어오고 권력층에 돈을 바쳐 화의상태를 연장한 비도덕적 경영인이 어떻게 회사를 계속 이끌 수 있느냐”며 비난한다.


최근 정부는 부실기업 경영인이라 하더라도 부실에 직접적 책임이 없을 경우엔 경영권을 계속 유지하도록 한 법안의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바로 통합 도산법안이다.
다만, 단서를 달았다.
기업 부실을 숨기거나 채권자 보호에 소극적인 경영인의 경우엔 경영권을 박탈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일정 기간 다른 회사 이사로도 취업할 수 없다.
또 기업퇴출 회피수단으로 악용됐던 화의법을 폐지하고 회사정리법과 파산법을 합해 기업회생 또는 정리 여부의 결정 절차를 줄이기로 했다.


도산제도의 간소화엔 아무도 이견을 달지 않는다.
그러나 부실기업 경영자의 경영권 인정에 대해선 제각각 견해 차가 크다.
채권자의 대표기구격인 은행연합회는 “기존 경영진이 자신의 경영권과 지분 유지에 중점을 둬 무리한 투자를 도모하거나 자신을 위한 의사결정을 내릴 우려가 있다”면서 반대한다.


전경련은 “기존 경영진의 전횡을 막으려면 소유권은 뺏되 지분을 다시 살 수 있는 권리를 주는 등 보안책을 마련하면 된다”며 새 법안을 지지하고 나선다.
전경련 김석중 상무는 “완벽한 경영판단만 내리라고 하면 누가 기업을 이끌 수 있겠느냐”며 “불법, 비리 등의 모럴 헤저드와 경영판단 행위는 분리해서 봐야 한다”고 말한다.


법무부는 통합 도산법안을 올 가을 국회에 상정할 계획이다.
이어지는 논란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판단기준은 아직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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