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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외국인 산업 연수제의 현 주소
[기획] 외국인 산업 연수제의 현 주소
  • 장승규 기자
  • 승인 2002.08.2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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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일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가 한순간에 전부 사라진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공장은 어제처럼 돌아가고, 식당에선 밥이 제대로 나올 수 있을까? 이런 황당한 실험이 공상에서가 아닌 현실 속에서 실제로 진행되고 있다.
이 실험은 정부가 하고 있다.
정부는 국내에서 일하고 있다고 자진신고한 26만5848명의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를 2003년 3월까지 예외없이 내보내기로 했다.
국내 외국인 노동자의 80%가 불법체류자인 현실에서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를 내보낸다는 것은 외국인 노동자 대부분을 강제추방한다는 것과 같다.
물론 단순한 호기심에서 시작한 것은 아니다.
‘합법체류자’보다 ‘불법체류자’가 휠씬 많은 뒤틀린 현실에, 더 늦기 전에 메스를 대야 한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그러나 중소기업의 반응은 냉소적이다.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3D업종에서 먼저 불만이 터져나왔다.
한마디로 현실을 무시한 발상이라는 것이다.
반월공단 입주 업체들이 회원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안산상공회의소에서 ‘3D업종 불법체류 외국인 고용 완화 건의’라는 대정부 건의문을 채택했다.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를 강제출국시키면 당장 공장 문을 닫을 수밖에 없는 실정이라는 호소였다.
비록 불법체류자이긴 하지만 이들 외국인 노동자들은 대부분 언어소통도 가능하고, 관련 작업지식도 잘 갖추고 있는 만큼 무조건 추방할 것이 아니라 합법적 신분으로 전환해 활용하자는 제안도 덧붙였다.



잠적할 경우 강제출국도 쉽지않아


이성균 안산상공회의소 기획팀장은 “여러 차례 비슷한 내용의 대정부 건의를 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며 “외국인 노동자들이 떠나면 그 자리에 대신 들어가려는 내국인은 거의 없을 것이다.
작업조건이 열악한 피혁, 도금, 열처리 업체는 당장 공장 가동이 어렵다”고 말했다.
정부에서는 중소제조업 산업연수생의 정원을 4만명가량 늘리겠다는 복안을 갖고 있지만, 기업의 요구에는 턱없이 부족한 규모다.
이마저 불법체류자의 출국 상황에 맞춰 추가 도입이 결정될 예정이어서 큰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정부의 강력한 의지 표명에도 불구하고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 강제출국 방침이 실제로 실행될 것으로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중소기업의 현실을 무시할 수 없는데다 26만명이 넘는 인원을 한꺼번에 출국시킨다는 구상 자체가 현실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우선 필요한 만큼 배편과 항공편을 마련하는 것부터가 난제다.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가 출국하지 않고 숨어버리면 그를 찾아내기도 쉽지 않다.


정부는 지난 2월25일부터 5월25일까지 두달간 대대적으로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의 자진신고를 받았다.
자진신고자에게는 2003년 3월31일까지 출국하는 것을 전제로 합법체류 자격을 부여한다는 조건이었다.
자진신고율은 93%를 기록했다.
한시적이지만 합법적 신분을 보장받을 수 있는데다, 조만간 사면조처를 통해 한국에서 계속 일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작용한 결과였다.
자진신고자들이 정부의 의도에 맞게 실제로 출국할 가능성은 낮다.
외국인 노동자는 대부분 한국에 들어오기까지 브로커비 등 상당한 투자를 한다.
이런 비용을 미처 뽑지 못한 외국인 노동자들은 어느 정도 위험이 있더라도 ‘불법잔류’를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불법체류의 악순환이 계속될 유인이 상존하는 것이다.
유길상 한국노동연구원 부원장은 “충격요법은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 수 있다.
먼저 법을 지킬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줘야 한다”며 “현실에 맞게 일정한 기준을 정해 순차적으로 충분한 시간을 갖고 내보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산업연수제 끊임없이 논란거리


정부는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 강제출국이라는 ‘충격요법’과 함께 불법체류자 문제의 근본 해결을 위해 현행 산업연수제를 확대 보완하고, 서비스부문에 취업관리제를 도입하는 것을 골자로 한 ‘외국인력제도 개선방안’을 내놓았다.
산업연수제 폐지를 기대하던 외국인 노동자 관련단체들은 정부의 개선안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외국인 노동자대책협의회 등 관련단체들은 7월25일 ‘산업연수제도철폐 투쟁본부’를 구성하고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8월18일 국가인권위원회도 “인권침해를 유발해 국제사회에서 비난의 대상이 돼온 산업연수제를 확대 적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며 “고용허가제 등 외국인력을 정당하게 고용하고 보호하는 근본 대책을 마련하고 산업연수생제는 단계적으로 폐지해야 한다”고 지적하는 등 국무총리에게 개선안의 전면적인 재검토를 권고했다.


산업연수제는 1993년에 도입된 이래 끊임없이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외국인 노동자들을 데려와 중소기업 인력난 해소에 활용하면서도, 그들을 ‘노동자’가 아닌 ‘연수생’ 신분으로 묶었기 때문이다.
연수생은 노동자가 아니기 때문에 근로기준법의 적용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
반면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는 내국인과 동등하게 근로기준법의 적용을 받고 임금도 연수생보다 높다.
마음대로 직장을 옮길 수도 있다.
이런 이점 때문에 산업연수생들은 입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처음 배정받은 공장을 이탈해 불법체류자가 된다.
산업연수생 정원(중소제조업)은 그동안 모두 8만명이었지만, 남아 있는 연수생은 1만8200명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무단이탈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전체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 중 무단이탈 산업연수생이 차지하는 비중은 20%에 불과하다.
대부분은 단기사증 소지자(70%)들이다.


문제는 산업연수제로는 중소기업의 단순기능인력 수요를 모두 충족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심우일 중소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연수생의 정원을 충분히 늘리지 못한 이유는 산업연수제에 대한 자신감이 없었기 때문”이라며 “워낙 논란이 많다 보니 정원을 늘리는 데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공급부족은 불법취업자 시장이 들어설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준다.


산업연수제도 그동안 상당한 변화를 거쳤다.
2000년 4월 산업연수제의 대안으로 제시된 고용허가제의 성격을 일부 받아들여 ‘연수취업제’를 도입했다.
2년간의 연수기간을 거친 후 일정한 시험을 통과하면 내국인과 동일한 노동자 신분으로 1년간 취업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다.
‘연수 2년+취업 1년’ 시스템은 2002년 4월부터 ‘연수 1년+취업 2년’ 시스템으로 확대됐다.
외형상 산업연수제이지만 고용허가제의 성격이 강화된 것이다.


산업연수제가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중기협)와 같은 운영기관이 일괄적으로 인력을 들여와 각 업체에 배정해주는 방식이라면, 고용허가제는 인력이 필요한 사업주가 관련 정보를 보고 구직자와 직접 계약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외국인 노동자를 쓰는 사업주의 선택권이 강화된다.
취업계약 후 입국한 외국인 노동자는 노동자 신분을 갖게 되며, 내국인과 동일한 대우를 받는다.
다만 사업장을 옮기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유길상 한국노동연구원 부원장은 “단순기능인력에게 사업장 이동의 자유를 주는 나라는 없다”며 “추가 코스트를 발생시킬 요인이 많기 때문에 대부분 엄격하게 관리한다”고 말했다.


노동부는 95년부터 산업연수제의 대안으로 고용허가제 도입을 추진했지만 중기협 등의 반대로 번번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중기협의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중소기업들은 고용허가제를 반대하는 이유로 비제조업 분야로의 인력유출로 인력난 심화(46.4%), 인건비 부담 증가(24.6%) 등을 들고 있다.
노사불안정을 반대이유로 답한 경우는 상대적으로 적었다(3.6%). 비제조업 분야로 인력이 빠져나가 중소제조업체의 인력난이 심해질 것이라는 생각은, 고용허가제가 일하는 사업장을 옮길 수 있는 자유를 허용하는 제도로 오해한 결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고용허가제가 도입되면, 이 제도로 들어오는 외국인 노동자의 인건비는 현재의 연수취업자 수준이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중소업체가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하는 가장 큰 이유가 취업을 원하는 내국인이 없기 때문이라는 현실에 비춰볼 때, 임금부담은 외국인 노동자 고용에 큰 걸림돌이 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민노총, 노동허가제 입법청원 추진


해외동포를 대상으로, 서비스 분야에 한해 새로 도입된 취업관리제는 내용상 고용허가제와 동일하다.
11월부터 국내취업을 희망하는 외국국적 동포는 방문동거(F1) 사증을 발급받은 후 노동부 고용안정센터에 구직등록을 하면 된다.
고용주는 고용안정센터에 구인등록을 해 조건에 맞는 신청자를 선발하게 된다.
정부는 이처럼 내용상 고용허가제를 상당부분 도입하고 있으면서도 연수생의 정원을 1만8750명으로 늘리고, 농축산업까지 적용 대상에 포함시키는 등 산업연수제를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연수취업을 마친 모범연수생에게는 연수생의 10% 범위 안에서 1년간 특정활동 체류자격(E-7)을 추가로 허용하기로 했다.
외국인 노동자가 국내에 머물 수 있는 기간이 연수 1년, 연수취업 2년, 특정활동 체류 1년 등 최장 4년으로 늘어난 것이다.
고용허가제를 도입하면 이런 땜질식 구분은 사라질 것이다.
외국인 노동자 관련단체들은 정부가 산업연수제를 고수하는 것은 이권이 걸린 특정 단체의 압력이나 정권 말기의 몸 사리기가 작용한 결과라고 지적한다.


외국인력 활용정책에는 내국인 노동자 보호, 산업구조조정의 지연 등 복잡한 문제들이 얽혀 있다.
특히 우리의 경우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의 36%를 차지하는 조선족 동포 문제가 걸려있다.
민주노총은 민변과 함께 올해 가을 정기국회에 상정할 것을 목표로 고용허가제가 아닌 ‘노동허가제’의 입법청원을 추진하고 있다.
손낙구 민주노총 대변인은 “노동허가제는 산업연수제를 반대한다는 점에서는 고용허가제와 동일하지만,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과 노동3권의 완전보장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고용허가제와 차이가 난다”고 말했다.


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는 “자진신고한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를 내년 3월에 모두 출국시킨다는 것은 현실을 모르는 처사”라며 “외국인 노동자 활용이 불가피한 만큼 고용허가제를 포함한 중장기적 정책을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 후보도 “고용허가제에 원칙적으로 찬성한다”며 “다만 중소기업이 받을 충격을 완화할 수 있는 조처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산업연수제 폐지 압력은 더 거세질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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