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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 왼손잡이 시장 "열려라"
[비즈니스] 왼손잡이 시장 "열려라"
  • 박형영 기자
  • 승인 2002.09.0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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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봐, 내 작은 모습을. 너는 언제든지 웃을 수 있니? 너라도 날 보고 한번쯤 그냥 모른 척해줄 순 없겠니. 하지만 때론 세상이 뒤집어진다고, 나 같은 아이 한둘이 어지럽힌다고, 모두가 똑같은 손을 들어야 한다고. 그런 눈으로 욕하지 마. 난 아무것도 망치지 않아. 난 왼손잡이야.(패닉의 '왼손잡이' 중에서)

왼손잡이가 일상생활에서 겪는 어려움은 단순히 주위의 따가운 시선에 그치지 않는다.
오른손잡이용으로 제조된 물건을 울며 겨자먹기로 사용하지만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대표적인 물건이 가위다.
가위는 손가락을 이용해 양날을 밀착해야 하지만 오른손잡이용을 왼손으로 움직이려면 제대로 되지 않는다.
골프를 배우는 왼손잡이들은 왼손잡이용 골프채를 구하는 게 힘들고, 연습장 또한 외손잡이용 타석이 없어서 처음부터 오른손으로 골프를 배운다.
소총이나 산업용공구, 의료기구 등은 불편한 정도를 넘어 안전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이밖에도 일체형 책걸상, 마우스, 키보드, 뒤집개, 야구글러브, 볼링공, 기타, 캠코더 등 왼손잡이에게 불편하기 짝이 없는 물건은 생각보다 많다.
세계적으로 판매되는 왼손잡이 용품은 모두 2천여종이나 된다.



국내 가위 제조업체 몇곳만 생산, 대부분 수출

왼손잡이들에게 희소식이 들린다.
국회에서 왼손잡이들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법을 고치겠다고 나선 것이다.
정몽준 의원(무소속)은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증진보장에 관한 법률’과 ‘방위산업에 관한 특별조치법’ 개정을 추진중이다.
개정안에는 “왼손잡이용 편의시설 설치에 따른 부담을 경감하고 설치를 촉진하기 위해 금융지원과 기술지원 등 필요한 조치를 강구하도록 한다”는 내용이 추가됐다.
나아가 일정 규모 이상의 공공시설에는 아예 왼손잡이용 시설 설치를 의무화했다.
또 왼손잡이 용품 생산을 촉진하기 위해 조세를 감면할 수 있도록 했고, 군에서는 소총 등 장병에게 지급되는 각종 군수품에 왼손잡이용을 일정 비율 포함하도록 했다.


그동안 우리나라에는 왼손잡이용 야구글러브가 생산·판매된 것말고는 왼손잡이 용품이 전무하다시피 했다.
한광산업 등 국내 가위 제조업체 몇곳은 왼손잡이용을 생산하고 있지만 거의 전량을 외국으로 수출한다.
유일한 왼손잡이 용품 전문 사이트인 왼손나라 www.leftland.com는 3년여 만에 사업성이 없어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해 있다.


왼손나라는 가위, 칼, 골프채, 낫 등 세계 각국의 왼손잡이 용품 200여종을 수입해 팔아왔다.
이 회사는 한때 자체 브랜드를 개발하고 문구용 가위를 생산해서 오프라인 매장에 공급하기도 하며 의욕적으로 사업을 펼쳤지만 지금은 사이트만 운영하면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왼손나라 김대곤 대표는 “왼손나라가 어려움을 겪는 가장 큰 이유는 가격이 비싸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대부분이 수입품인 이 제품들은 국내산 오른손잡이용 제품에 비해 2~4배나 비싸다.
자체 개발해 판매하는 가위도 제작수량이 많지 않아 외국산보다는 싸다고 하지만 국내산 오른손잡이용보다는 비쌀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에 왼손잡이가 얼마나 있는지는 아직까지 정확한 통계조차 없는 형편이다.
1994년의 한 학술조사에서는 우리나라 유치원생의 8.2%가 왼손잡이라고 집계됐지만 같은해 다른 연구자는 초등학생의 17.3%가 왼손잡이라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광주보건대학 강미희 교수는 “일본이나 대만 등 동양권은 전체 인구의 2~3%에 불과한 반면 미국이나 캐나다 등 왼손잡이에 관대한 나라에서는 15% 이상을 차지한다는 조사결과가 있다”며 “우리나라는 200만~400만명이 왼손잡이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수요층이 200만~400만명이라면 사실 어느 제품이든 사업성이 충분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다.
김대곤 대표는 “왼손잡이가 5~10%라고 하지만 어른들은 거의 구입을 안 한다”며 “3년 동안 영업을 하면서 어른들이 사용하기 위해 사간 경우는 10번도 안 되고 대부분 아이들을 위해서 사갔다”고 말했다.
문구회사 바른손에서는 왼손잡이 용품에 대한 시장조사를 해본 결과 수요가 없어서 판매계획을 접은 적이 있다.
이 회사 관계자는 “학부모가 직접 전화해 찾는 경우는 몇번 있었지만 소매상과 도매상에 물어본 결과 왼손잡이용 물품이 필요하다는 곳은 한곳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구매하기가 쉽지 않고 가격도 비싼 물건을 사느니 어느 정도 불편을 감수하겠다는 것이 소비자들의 생각인 것 같다”고 덧붙였다.



시장 활성화, 사회적 인식 개선이 시급


제조회사에서 왼손잡이 용품을 별도로 만들 경우는 제작비가 올라갈 수밖에 없다.
한광산업 나한수 차장은 “왼손잡이용 가위를 제작할 때 연마는 반대로 하면 되니까 문제가 안 되지만 금형제작비가 추가로 드는 것이 문제”라며 “5만~10만개를 제작해야 이 비용이 나오는데 국내 수요만 가지고는 타산을 맞추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과연 관련법을 개정해 세제지원 등 필요한 지원을 할 경우 왼손잡이 용품은 활성화될 것인가. 김대곤 대표는 “사회적 인식이 바뀌는 것이 문제”라며 “수요가 워낙 적어, 세제지원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고 말했다.
그는 “해외 유명회사들이 왼손잡이 용품을 생산·판매하는 것은 수익보다는 회사 이미지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반면 가능성이 있다는 전망도 제기된다.
나한수 차장은 “전시회 등에서 왼손잡이용 가위에 소비자들의 관심이 상당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국내 수요도 적지는 않을 것”이라며 “소비자들이 왼손용품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안 찾는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더구나 공공시설에 왼손잡이용 시설을 일정비율 설치하도록 한다면 그만큼의 수요는 보장된다.
관련업계에서 법 개정의 향방을 주시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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