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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좌파정권 탄생 초읽기
[브라질] 좌파정권 탄생 초읽기
  • 최우성 기자
  • 승인 2002.10.0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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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대선이 막바지 초읽기에 들어갔다.
10월6일 열리는 브라질 대통령 선거(1차 투표)는 좌파 성향이 두드러진 노동자당(PT)의 루이스 이냐시오 다 실바(56·일명 ‘룰라’)의 승리로 끝날 것으로 거의 굳어지는 분위기다.


이로써 남미대륙 최대 경제규모를 자랑하는 브라질의 경제정책은 커다란 방향선회를 코앞에 두게 됐다.
9월22일 발표된 한 유력일간지의 여론조사 결과, 룰라 후보는 44%의 지지율을 기록해 여타 후보들을 크게 따돌린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룰라 후보의 지지율이 48%에 이른다는 비공식 여론조사 결과도 잇달아 공개됐다.
4파전으로 시작된 이번 선거에서 룰라는 나머지 세 후보의 지지율을 모두 합한 것에 거의 맞먹는 수준의 지지를 받고 있다.
자동차 공장 선반공으로 출발해 금속노련의 지도자로 성장하며 브라질의 민주화를 이끈 룰라는 1989년 이후 세차례나 대선에 출마했지만 선거전 초반의 우세를 끝까지 지키지 못하고 고배를 마신 바 있다.


올해 선거에서는 선거전이 시작되면서 꾸준히 선두자리를 지켜오던 룰라의 지지율이 선거전 막바지에 이르러 더욱 올라가는 현상을 보이고 있는 것도 이채롭다.
2위를 달리고 있는 전 보건부장관 호세 세하 후보와의 지지율 격차는 25%포인트로 더욱 벌어졌다.
불과 열흘 전에 두 후보의 지지율 격차가 19%포인트였던 점에 비추어볼 때, 룰라에게 표가 몰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관심은 과연 룰라가 1차 투표에서 과반수 지지를 획득해 결선 투표 없이 곧장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을 것인가로 자연스레 옮겨가고 있다.
룰라가 1차 투표에서 최다득표를 기록한다 하더라도 좌파정권의 탄생을 막으려는 움직임이 본격화할 가능성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94년과 98년의 선거에서 돌풍을 일으킨 룰라는 결선 투표에서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올해 선거에서는 설령 2차 투표까지 간다 하더라도 룰라가 무난히 승리할 것이라는 목소리가 높다.
국제금융자본의 지지를 받았던 현 엔리케 카르도주 정부 집권기간에 브라질 국민들은 오히려 실업과 인플레이션에 시달렸다는 여론이 팽배한 탓이다.


이번 선거에 특히 세계의 이목이 쏠리는 것은 대선 결과가 대외채무 상환에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다.
선거전이 시작된 이래 룰라는 2500억달러에 달하는 대외부채의 일부에 디폴트를 선언할 수도 있다는 메시지를 거듭 내비쳤다.
미국 등 주요 국가의 금융자본으로서는 신경이 거슬리는 대목이다.
지난 8월 미국의 투자가 조지 소로스는 “만일 룰라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서구의 투자자들이 투자자금을 회수할 것”이라며 투자자본의 대규모 ‘엑소더스’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국민들 실업·경제난에 지쳐 변화 요구


선거전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시장의 반응이 더욱 뚜렷해지고 있는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여론조사가 발표된 이후 브라질 헤알화는 연일 약세행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중이다.
헤알화는 다음날 10%나 떨어진 데 이어 그 다음날에는 또다시 5.6%나 떨어져 달러당 3.780을 기록했다.
이는 94년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특히 룰라가 당선되면 통화정책에 깊숙이 관여하기 위해 현 중앙은행 총재를 교체할 것이라는 소문이 급속히 퍼지면서 헤알화 약세를 부추겼다.
주식시장에서도 이런 분위기는 그대로 드러난다.
상파울루의 증시(Bovespa)는 연일 큰 폭으로 떨어져 브라질 경제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널리 퍼져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룰라가 이끄는 ‘좌파정권’의 등장이 당장 서구 투자자본에 커다란 위협이 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은 편이다.
오히려 룰라 정부의 행동반경이 그다지 넓지 못할 것이라는 평가를 내리는 전문가들이 많다.
9월초 IMF는 브라질에 306억달러에 이르는 긴급 구제금융을 제공하면서 여러가지 단서조항을 제시한 바 있다.
여기에는 내년도 재정적자를 반드시 국내총생산(GDP)의 3.75% 이내로 유지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대외부채가 GDP의 55%에 이르는 현실에서 이런 규정들은 곧 새로 들어설 정부가 극도의 긴축정책을 실시할 수밖에 없을 것임을 뜻한다.
룰라 역시 여타 후보들과 마찬가지로 대통령에 당선되더라도 이 규정을 준수할 것임을 공개적으로 서약하기도 했다.


따라서 오히려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브라질이 남미대륙에서 최대 규모의 경제력을 갖추고 있는데다 남미지역 경제 전체의 향방에 대한 가늠자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다.
이웃나라인 아르헨티나와 마찬가지로 금융위기를 겪었다 하더라도 그 파장은 엄청나게 차이가 날 수 있다는 걸 뜻하기도 한다.
경제개혁 조치를 압박하며 IMF의 구제금융 제공을 마지막까지 꺼렸던 미국이 역사상 최대 규모인 306억달러를 제공하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었던 사실도 브라질 경제의 잠재력을 잘 드러내준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브라질 새 정부 출범 이후 가장 커다란 쟁점은 아메리카 전체 대륙을 아우르는 자유무역지대(FTAA)를 둘러싼 공방이 될 가능성이 더욱 높은 편이다.
미국 정부는 오는 2005년으로 예정된 아메리카자유무역지대 창설을 통해 북미 알래스카에서 남미대륙에 이르는 34개 국가 전체를 단일한 시장으로 묶으려는 계획을 차근차근 진행하고 있는 중이다.
특히 미국은 캐나다 정부를 앞세워 브라질 선거 결과에 따라 FTAA 추진계획이 차질을 빚을 가능성을 염려해 2005년에 예정된 다음번 정상회담을 내년으로 앞당기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가능한 한 서둘러 분위기를 확실하게 다잡을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브라질 국민들의 여론은 상당히 비판적이다.
2005년 이후 농업보조금 제도가 폐지될 경우, 브라질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농업인구가 커다란 피해를 입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 평가다.
이번 선거에 나선 모든 후보들은 가능한 한 FTAA 문제가 돌출되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캐나다 정부의 제안에 거의 한목소리로 반대의사를 밝힌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특히 룰라는 이 계획에 대해 “FTAA는 곧 남미대륙을 병합하는 것”이라며 강력한 반대의사를 굽히지 않고 있다.
노동자당의 근간을 이루는 진보적 카톨릭교회, 노동조합, 무토지노동자운동(MST) 등 사회운동 세력은 9월초 1천만명에 이르는 FTAA 반대세력을 한데 묶기도 했다.
향후 이 문제가 가장 커다란 쟁점으로 등장할 것임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역사적으로 브라질이 이 지역 전체의 향방을 좌우한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선명한 목소리를 내는 좌파정부의 출범이 확정될 경우 그 파장은 만만찮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곧 공공부문 민영화와 외국인투자 확대정책으로 상징되는 남미대륙의 90년대 경제정책이 커다란 상처만을 남긴 채 한차례 방향선회를 경험하게 될 가능성을 높여준다는 걸 뜻한다.
특히 역내 최대 경제규모인 브라질 경제정책의 방향타가 좌파정부의 손에 들어가면 ‘아메리카 단일시장’ 출범에 이르는 길은 고비마다 첨예한 갈등을 거쳐야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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