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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탐구] 박용성 / 대한상의 회장
[인물탐구] 박용성 / 대한상의 회장
  • 백우진 기자
  • 승인 2002.10.0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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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말을 하기는 쉽다.
남에게 설득력이 있는 말을 하기는 쉽지 않다.
많은 변수가 얽혀 있는 사안에 대해 맞는 말을 하기란 더 어렵다.
박용성(62)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하고 싶은 얘기는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그는 하고자 하는 말을 비유를 들어가며 조리있게 말한다.
또 현안이 발생할 때마다 대개 그 맥을 정확히 짚어낸다.
기자간담회, 인터뷰, 기고 등을 통해 언론매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그가 회장을 맡으면서부터 재계의 중심이 대한상의로 옮겨온 데는 이런 요인이 깔려 있다.


물론 그가 모든 이슈에서 모두를 만족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주5일 근무제 같은 사안에서는 당연히 사용자 편에 선다.
하지만 그는 재벌가의 일원이면서도 재벌식 기업지배구조와 경영행태를 비판하는 균형감각을 갖고 있다.
재계를 대변하되, 재벌을 포함해 우리 경제 전반에 대해 거침없이 ‘옳은 소리’를 쏘아댄다.
그래서 툭 던지는 듯한 그의 말에는 무게가 실린다.


-본문-
엔론의 분식회계 불똥이 월드컴 등으로 번진 6월말 이후 국내 언론과 연구기관 사이에서는 미국식 자본주의도 대안은 아니라는 지적이 나돌았다.
‘미국식 경영의 취약점이 분식회계 사태로 한꺼번에 노출됐다’는 식이었다.
그러나 이는 제도와 운용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한 잘못된 진단이다.
분식회계는 기존 제도를 어긴 것이었다.
미국식 자본주의 제도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다.


박용성 회장은 최근 이같은 점을 적시한 글을 일간지에 기고했다.
그는 분식회계 사태는 관련 제도 자체를 뒤엎기보다는 제도의 투명성만 높이면 고칠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미국식 경영의 폐단은 그간의 높은 성과에 비해 ‘옥에 티’ 정도”라며 “아직도 미국 기업은 전세계에서 가장 투명한 경영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다른 대안을 찾을 게 아니라 ‘제대로 된 미국식 경영’을 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이는 틀린 얘기를 참지 못하는 성격을 잘 드러내는 사례다.
옥스퍼드대학 역사학과 교수인 니알 퍼거슨도 비판을 모면하지 못했다.
칼럼에서 그는 퍼거슨이 “미국 경제의 침체를 대공황과 비견하고 엔론사태를 자본주의 위기의 징후로 파악했다”며 ‘마르크스의 논리를 다시 부활시키려는 호들갑’을 힐난했다.



들쥐론 지네론 등 비유법 즐겨 써


“신문이 깊이 있는 기사를 써야 하는데, 우리 신문들은 칼럼을 뺀 나머지 기사들은 다 비슷하다.
” 민감한 주제나 상대라고 해서 피해가지 않는다.
노조와 정부, 그리고 재벌까지 정면으로 깬다.
하지만 큰 파문을 일으키거나 적을 만든 적은 없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 잘 나가던 재벌 총수들과 달리 설화도 겪지 않았다.
그는 “옳은 말만 하니까, 듣는 사람도 그런 소리를 들어도 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라고 풀이한다.


그의 어법에는 설명이 더 필요하다.
그의 말에는 ‘가시’가 없다.
말싸움을 걸 때에도 사람좋은 웃음을 짓는다.
유연하고 여유가 있다.
칭찬할 것은 칭찬한다.
과거 스타 총수들처럼 외곬로 빠지지 않는다.
그는 ‘들쥐론’, ‘지네론’ 등 비유를 들어가며, 논리가 손에 잡히게끔 한다.


논리는 평소에 많이 읽고 대화를 나누면서 정리한다.
신문은 집에서 7가지를 읽고, 사무실에서는 7가지를 본다.
경제 및 시사 주간지와 월간지, 외국잡지도 빼놓지 않고 훑어본다.
책은 가끔씩 교보문고에서 한보따리씩 사다가 “대충대충 읽고 던진다”고 한다.


정부 정책에 대해 그처럼 신랄할 수도 없다.
동북아 비즈니스센터로 도약을 위한 경제특구 지정에 대해 “정부가 외국인에게 집과 교육 문제는 해결해주지 않은 채 땅만 내주면 되는 줄 안다”고 말한다.
“벤처가 원래 노름판인데, 어떻게 나라의 운명을 그런 도박에 의존하느냐?”며 정부의 벤처 육성정책을 질타한다.


그러나 그는 기본적으로는 경제단체의 역할은 정부와 협조함으로써 극대화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대한상의가 정부에 맞서 야당 투사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는 주문에 대해 그는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왕사쿠라’라는 욕을 먹더라도 협조 자세를 유지할 것”이라고 답한다.
또 정부 정책의 거시경제적 성과는 높이 평가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다른 나라들의 성장이 지체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나라가 상대적으로 높은 성장률을 보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김대중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해 거시경제적 측면에서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


공적자금에 대해서는 과거에 더 큰 책임이 있다는 견해를 밝힌다.
공적자금을 부실하게 운용했다는 논란과 관련해 박 회장은 “대우 문제에서 드러났듯이 공적자금 문제는 아주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며 “현 정부만 탓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말한다.


그의 ‘들쥐론’은 대기업과 벤처를 함께 비판한다.
3월 포스코 초청 특강에서 그는 “많은 한국 기업들은 첨단기술만 좋아하는 첨단병을 앓고 있다”고 말했다.
“어느 사업이 좋다는 소리가 들리면 무조건 따라가 들쥐떼처럼 뛰어들어 망하는 관행을 고쳐야 한다.
” 그는 벤처 열풍도 ‘들쥐 현상’이었다고 본다.
그는 이제 정보기술(IT) 분야가 시들해지자 바이오기술(BT)쪽으로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BT는 생명을 다루기 때문에 지루할 정도로 긴 시간과 막대한 투자를 요구한다는 설명이다.


“어쩌다가 한번 큰 황금알을 낳는 거위보다는 메추리알만한 황금알이라도 매일 낳는 것이 낫다.
” 그는 2000년을 전후한 닷컴 물결에 휩쓸리지 않았다.
굴뚝이 없으면 첨단도 없다는 논리를 지켰다.
“인류가 있는 한 누군가 그릇이며 신발, 자동차, 선박을 만들어야 한다.
첨단 신기술과 디자인은 전통산업에 접목해 제품을 얇고 가볍고 튼튼하게 하는 데 써야 한다.
첨단 자체만으로 무엇을 해결하려는 데서 문제가 생긴다.
첨단만 앞세우고 전통사업은 서둘러 문닫는 우를 범하지 말자는 얘기다.


대구 밀라노 프로젝트나 부산의 신발산업 육성은 차 떠난 뒤 손 흔드는 격이라고 안타까워했다.
“멀쩡하게 얼마든지 해먹을 수 있는데도 사양산업이라고 죽여 떠나게 했는데, 이제 와서 다시 살리겠다고 돈을 퍼붓고 있다.
한번 죽은 자식이 다시 살아날 수 있겠나.”


재벌가의 일원이면서 재벌에게도 고언


자유무역협정(FTA)과 FTA의 발목을 잡고 있는 농업 문제도 거론한다.
“우리나라는 중국을 제외한 세계무역기구(WTO) 가입국 가운데 FTA를 맺지 못한 유일한 나라다.
농민은 전국민의 8.6%뿐이지만, 정서적으로는 86%다.
수출을 해야 먹고 사는 우리나라가 언제까지 농민을 생각해 FTA 체결을 미룰 수 있겠는가.”

노동운동에 대한 어조는 강경하다.
그는 노조 간부들에게 “당신들의 아들딸이 취직되지 않는 것은 당신들의 권리가 너무 강해 기업이 사람 채용을 기피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정규직은 노조 때문에 골치가 아프니 비정규직과 외국인 노동자를 데려다 쓴다는 설명이다.
주5일 근무제에 대해서는 “주 40시간으로 가려면 국제수준에 맞춰 공휴일도 줄이고 월차휴가와 생리휴가도 없애야 한다”는 입장이다.


가장 돋보이는 부분은 재벌에 대한 고언이다.
“오너 일가가 경영을 독식하는 한국식 ‘패밀리 비즈니스’로는 한국 경제의 미래가 없다.
우리 대기업들은 패밀리 비즈니스 대신 볼보와 에릭슨 등을 경영하는 월렌버그 가족처럼 ‘비즈니스 패밀리’가 돼야 한다.
비즈니스 패밀리는 능력 있는 집안 구성원이 있으면 직접 경영을 하고, 더 유능한 전문경영인이 있으면 그에게 경영을 맡긴다.
” 재벌 2세들에게는 “30대 그룹 중 왜 16개의 주인이 바뀌었는지 아느냐”며 “식견이 부족한 오너가 경영권을 잡고 있으면 회사가 망한다”고 충고한다.


구체적 사례로 들어가면 아무래도 오너쪽으로 기운다.
“아무리 오너의 아들이라고 해도 시장의 평가에서 떨어지면 퇴출될 수밖에 없다.
지난해 최고경영자(CEO)에 오른 포드의 증손자도 GM과 크라이슬러와 싸움을 벌여야 한다.
‘오너 집안 출신이니까 사장은 하지 말라’고 하는 건 말이 안 된다.
삼성의 이재용씨도 실제로 경영에 들어가서 하는 결과를 갖고서 평가해야 한다.
” 오너 집안 출신인지 아닌지는 CEO 선임에서 조건이 될 수 없다.
CEO의 조건은 능력이다.
맞는 얘기다.
하지만 포드 4세의 능력이 검증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경영은 하지 마라”고 말려야 한다.
윌리엄 C. 포드의 CEO 선임에 대해 '파이낸셜타임스'(FT)는 “포드는 능력이 입증된 경영자를 필요로 한다”며 “포드가 성 이외에 CEO로서 조건을 갖추고 있는지는 의문”이라고 썼다.
FT와 같은 시각에서는 이재용씨의 경영참여를 탐탁지 않게 볼 수 있다.


경영자 박용성의 판단력은 두산그룹의 구조조정 때 진가를 발휘했다.
그는 “나한테 걸레면 남한테도 걸레”라며 “기업이 구조조정을 하려면 부실기업이 아닌 알짜기업을 내놓아야 성공한다”고 역설했다.
두산은 걸레론에 따라 알짜기업을 팔아치웠다.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96년 말 부채비율이 700%를 넘었던 두산은 경제위기의 파고를 넘지 못했을 것이다.
다른 장점도 많다.
일을 즐기고 부지런하며, 소탈한 성품과 화술로 상대방을 편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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