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6 17:03 (금)
[기자수첩] 한은 총재의 황당한 ‘사석 정책’
[기자수첩] 한은 총재의 황당한 ‘사석 정책’
  • 이승철 기자
  • 승인 2002.10.11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며칠 전 급히 400만원이 필요해 은행에 들렀다.
창구에서 인출하면 발행수수료를 물어야 하니, 현금자동지급기(ATM)로 수표 40장을 인출했다.
평소에 수표를 이용한 적이 드문 탓에 빳빳한 수표 40장을 손에 쥐어 보니, 수표를 이만큼 만드는 데 비용이 얼마나 들지 궁금해졌다.
알아본 결과 용지 한장 값이 24원이라니 1천원 가까운 비용이다.
물론 지폐를 만드는 것보다는 싸지만, 수표는 한번 쓰면 그만 아닌가. 관리비용도 만만찮아 은행에서 발행부터 폐기까지 자기앞수표를 관리하는 데 드는 원가가 장당 1100~3200원 정도라고 한다.
고액권 지폐가 필요하다는 요구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미 10만원권이 최고액권 역할을 수행한 지 오래다.
그런데도 5만원권, 10만원권이 발행되면 생기는 부작용(주로 심리적 요인)에 대한 우려도 그에 못지않은 탓에 10만원권 도입이 지금까지 미뤄지고 있다.
얼마 전 박승 한국은행 총재가 미국에서 열린 국제통화기금(IMF) 연차총회 참석 중 화폐단위를 낮추는 방안(디노미네이션)을 검토중이라고 발언했다.
10원이나 100원을 1원으로 조정하는 방식이다.
박 총재는 개인적으로 고액권 발행보다는 디노미네이션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므로, 임기 중 핵심과제로 추진하겠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디노미네이션은 국가경제 전체에 미치는 파장이 크고 절차가 복잡하니 장기적으로 검토할 만한 사안이며, 당장은 고액권 발행 여부를 논의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반응이 다수인 듯하다.
아쉬운 점은 박 총재의 문제제기 방식이다.
이는 전국민의 오랜 관심사이니, 완전히 공론화해서 각계각층의 여론을 수렴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그런데 박 총재가 이런 중차대한 사안을 사석에서, 사견을 전제로 언급한 것은 유감스럽다.
박 총재는 몇달 전에도 한 언론을 통해 처음으로 디노미네이션을 검토중이라고 역시 사석에서 언급한 바 있다.
당시 한국은행의 실무자들도 박 총재의 갑작스러운 발언에 적잖이 당황했다고 한다.
총재가 앞에서 문제를 던지면 한은 실무진에서 허겁지겁 뒤늦게 수습하는 식의 일처리가 바람직한지 의문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