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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공정공시제도, 기업들 입조심
[초점] 공정공시제도, 기업들 입조심
  • 김윤지 기자
  • 승인 2002.10.2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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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권가에선 오래 전부터 주가조작을 성공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팀 구성을 제대로 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기업의 고급 정보를 빼낼 수 있는 내부자, 어느 정도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애널리스트, 막판에 주가를 끌어올릴 실탄을 가진 펀드매니저만 한팀을 이루면 ‘작전’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심지어 이런 작전의 움직임을 잘 포착해 그 주식을 먼저 샀다 팔면 고수익을 거둘 수 있다는 매매기법이 나돌 정도다.


작전까지는 아니어도 기업의 내부정보를 이용해 한탕 크게 벌어들이는 일은 고급정보를 독점하는 ‘그들만의 시장’에선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그들만의 시장’은 불가능해진다.
11월1일부터 시행되는 공정공시제도가 기업에서 주요 경영정보를 특정인에게만 전달하는 것을 금지하기 때문이다.
기업에서 내부자들의 입단속을 잘못했다가는 순식간에 불성실 공시법인으로 낙인찍힐 수도 있다.


이미 우리나라에선 투자자들에게 투자 판단자료를 공평하게 제공할 수 있도록 공시제도를 도입해왔다.
기업 스스로 재무상황이나 경영상황 등 중요 기업내용을 일정한 기간 안에 공시하도록 의무화한 것이다.


하지만 제도엔 언제나 허점이 있기 마련이다.
지금까지 공시제도에는 공시의무 대상이 너무 제한적이라는 문제가 있었다.
의무대상이 아니더라도 투자에 중요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정보가 제법 많았기 때문이다.
공시의무 대상인 정보라 하더라도 공시시한 전에 특정인에게 알릴 수 있다는 문제점도 있었다.
주가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중요한 기업정보라도 ‘그날 중 혹은 다음날’까지만 공시를 하면 됐다.



11월부터 기업정보 일반투자자들도 동시 제공


공정공시제도는 이런 일반공시제도의 허술한 구멍을 메우기 위해 도입하는 제도다.
우선 공정공시란 기업정보를 특정인에게 먼저 제공하는 ‘선별공시’와 반대되는 말이다.
이제까지 기업들이 주가관리를 위해 애널리스트 등 특정인에게 미리 주요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이런 관행을 이용해 기업과 애널리스트가 담합해서 그 기업에 우호적 보고서를 작성하는 경우도 많았다.
내부정보를 이용한 불공정 거래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은 것도 사실이었다.


공정공시는 이런 불공정 거래의 가능성을 아예 봉쇄한다는 의의를 가지고 있다.
거래가 이뤄지기 전, 내부정보를 주는 행위 자체를 막고 있기 때문이다.
공정공시에서는 특정인에게 어떤 정보를 주었다면 이를 반드시 공시해야만 한다.


이를 위해 공시대상의 폭도 넓혔다.
기업의 실적뿐 아니라 장래 사업이나 경영계획, 전망이나 예측 등 주가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모든 정보가 공정공시 대상 정보에 포함된다.
이런 정보를 특정인에게 선별적으로 제공하려면 거래소나 협회에 10분 먼저 공시해야 한다.
실수나 착오로 정보를 선별 제공했더라도 그날 바로 공시를 해야 한다.
공시 운영시간인 오전 7시30분에서 오후 8시 사이에 선별 제공을 했다면 ‘곧바로’, 그 이후에 이뤄졌을 때는 다음날 오전 7시30분까지 공시해야 할 정도로 엄격한 기준을 들이댄다.


예컨대 어느 기업에서 유상증자를 한다고 치자. 예전에는 이사회에서 유상증자 결정이 이뤄진 뒤 그 다음날까지 결정된 사항에 대해서만 공시하면 됐다.
하지만 유상증자를 할 계획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중요한 정보가 될 때도 있다.
공정공시제도에서는 유상증자를 할 계획이 있다는 이야기를 특정인에게 했다면 바로 공시를 해야 한다.
이후에 유상증자를 한다면 얼마나 할지, 시기는 언제쯤이 될지 등 정보가 변하는 과정에서도 특정인에게만 그 사실을 알렸다면 모두 공시대상이 된다.


공정공시를 지키지 않는 기업에게는 기존의 일반공시를 지키지 않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3진아웃제가 적용된다.
한번 어기면 불성실 공시법인으로 지정되고, 1년 안에 한번 더 어기면 관리종목으로 편입된다.
여기에서 한번 더 어기면 상장 자체가 폐지된다.
하지만 당분간 제도가 정착될 때까지 공정공시 위반 1회는 일반공시 위반의 0.5회로 간주한다.
공정공시를 두번 위반해야 일반공시를 한번 위반한 것과 같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두가지 공시제도 위반은 합산이 되기 때문에 가볍다고 볼 수만은 없다.
공정공시와 일반공시를 각각 한번씩 어긴 상태에서 공정공시를 한번만 더 어기면 일반공시를 두번 어긴 것과 같아 바로 관리종목으로 편입되기 때문이다.



애널리스트 정보의 우월적 지위 사라져


공정공시제도 도입을 앞두고 가장 불만을 나타내는 것은 단연 증권사 애널리스트들이다.
이제까지 애널리스트들은 주로 정보의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서 보고서를 작성해왔다.
오히려 기업에서 특별한 정보를 좀더 먼저, 좀더 많이 얻어내는 애널리스트일수록 시장에서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아온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일반투자자들에게 동시에 공개되는 정보만 제공받게 됐으니, 애널리스트들은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에 대해 금융감독원 공시감독국 최규윤 기업금융총괄팀장은 오히려 긍정적 부분이 더 많다고 이야기한다.
“애널리스트들이 특정한 사실 한두 가지에 의존하는 게 아니라 종합적 시각에서 기업을 분석하는 식으로 분석행태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 이번 공정공시제도의 목적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이제 검의 차이는 없어졌으니, 순수한 실력으로 진검승부를 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됐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애널리스트들은 우려의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자신들의 분석 논리를 완성하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기업의 수치나 실적이 있기 마련인데, 공정공시 대상이라는 이유로 정확한 답을 얻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며 불만을 터뜨린다.
“애널리스트들에게도 기업탐방은 매우 중요한 업무다.
기업 관계자와 같이 여러가지를 토론하면서 분석의 틀과 내용을 완성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다 공시대상이 되면 과연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 대우증권 장충린 애널리스트는 기업에서 일일이 공시하는 것을 귀찮아해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아예 정보의 유통이 사라지는 ‘정보의 냉각화 현상’이 나타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기업들의 걱정도 비슷하다.
임원이나 직원들이 실수로 공시대상 정보를 이야기한 뒤 공시담당 부서에 통보하지 않으면 공정공시 위반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정보가 여러 경로로 유출될 수 있어, 이 경로를 모두 컨트롤하는 게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LG전자 IR담당인 송영섭 부장은 “실질적으로 기업에서 나가는 정보의 양은 줄어들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LG전자의 경우 현재 회사 내부적으로 지침을 마련하고 있는데, 문제점을 최소화하기 위해선 이미 공시된 내용말고는 가급적 입조심을 하자는 식으로 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애널리스트에게도 제품 하나하나에 대한 구체적 수치는 밝히기 어려울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공시에 대한 생각을 바꾸면 기업들의 혼란은 그다지 크지 않을 것이란 게 공정공시제도 도입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증권거래소 상장공시부 이대규 과장은 “기업 스스로 판단해서 중요한 정보로 판단되면 미리 공시해버리면 문제가 없다”고 이야기한다.
‘자진공시’를 이용해 먼저 중요 정보를 공개하고 나면 위험을 충분히 피해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정보를 자꾸 감추려 하면 공정공시제도가 골치 아프겠지만, 모든 정보를 공개한다는 자세를 가지고 있으면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란 이야기다.
기업들이 그런 자세를 갖도록 하는 것이 이번에 공정공시제도를 도입하는 가장 큰 목적이기도 하다는 것이 도입 관계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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