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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 경제특구, 졸속인가 실속인가
[진단] 경제특구, 졸속인가 실속인가
  • 이경숙 기자
  • 승인 2002.11.0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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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잘살자고 만든 건데도, 기업도 노동자도 심지어 관련된 다른 정부부처도 불만스러워하는 법안이 있다.
국내 경제판도를 뒤바꿀 만큼 영향력이 큰데도, 그다지 사회 이슈로 떠오르지 못하고 있는 법안이 있다.
경제특별구역의 지정 및 운영에 관한 법률안이다.


국회 재정경제위원회 소위에서 논의하고 있는 이 법안은 애초 정부가 올해 7월 발표한 ‘동북아 비즈니스 중심국가 실현방안’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재정경제부가 지난 8월 입법예고한 것이다.
경제특구 안에 입주할 외국기업에 조세감면부터 교육 등 생활환경까지 여러가지 편의를 제공해 외국 기업을 한국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목표다.
우리나라를 동북아 비즈니스 중심국가로 만들기 위한 기반으로 경제특구를 획기적 ‘규제배제지역’으로 설정하겠다는 것이다.
법안이 통과되면 송도와 영종도, 김포매립지 등 신도시와 부산, 광양지역에 각각 경제특구가 세워질 전망이다.



수도권 과밀화 해소 정책에 배치돼


이 법의 제정에 적극적인 관계자는 재경부와 산자부, 부산시 등 관련 지자체뿐으로, 이들은 연내 처리를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그외엔 노동·사회단체와 경제단체, 심지어 국회 전문위원까지도 이런저런 불만을 드러낸다.


가장 많이 들리는 비난은 경제특구가 지역적 불균형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경제특구법이 통과되면 정부는 송도와 영종도, 김포매립지 등 수도권 서부지역을 국제적 기업·금융거점으로 집중 개발할 계획이다.
그동안 정부가 수도권집중억제를 위해 지역균형발전 정책을 썼던 것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안이다.
국토연구원 이원섭 연구위원은 “수도권 집중과 과밀로 지역간 불균형이 심화되면 사회적 비용이 더 늘어날 것”이라고 지적한다.
과거 산업화 과정에서도 도태된 지역경제는 이전보다 더 위축되곤 했다.


민주노총 오건호 정책부장은 국내 기업이라 해도 외국인 지분율이 10%만 넘어도 외국인 투자기업으로 인정된다는 부분을 문제로 지적한다.
“지분율 요건만 갖추면 국내 기업들도 특구 안에서 이런저런 특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다른 지역의 국내 기업까지 특구로 쏠리게 되죠. 노동자의 권리 침해는 물론 나라 경제가 지역적 불균형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대한상공회의소는 일부 지역만 특구화하는 것은 실효가 없다고 주장한다.
한국 전체의 환경 개선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대한상공회의소 박용성 회장은 “외국인들은 특구를 실시해도 불편을 느낄 것”이라며 “특구 방식은 동북아 허브란 목표를 달성하는 데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그는 우리가 아무리 특구에 지원을 쏟아부어도 중국의 저임 노동력과 시장잠재력을 앞지를 수 없다고 강조한다.
또 특구만 생활여건이 좋아져선 외국인의 만족스러운 반응을 얻긴 어렵다고 말한다.
본국에서도 상류층인 외국인 기업가들은 한국 전체의 삶의 질, 기업환경이 좋아지길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경제특구 자체의 실효성에도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낸다.
생리휴가를 없앴다고 우리한테 투자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란다.
외국인이 보는 건 시장성, 수익성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생산하는 게 중국이나 홍콩에서 생산하는 것보다 돈이 더 든다고 해도 한국에서 만드는 게 낫다고 생각하면 외국인은 한국으로 옵니다.
이런 간단한 진리도 따지지 못하고 이것저것 다 준다고 하니 경제특구는 노예특구라는 말이 생겨났죠.”


사회적 합의는 변화의 필수 요소


그러나 경제특구 제정을 주장하는 쪽의 목소리는 다급하다.
다국적 기업들이 아시아 비즈니스 거점을 홍콩, 싱가포르 등 아시아 아래쪽에서 상하이 등 위쪽으로 옮겨오고 있는 만큼 한시라도 빨리 준비를 해야 중국에 더 많은 역할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재정경제부 경제정책국의 한 관계자는 “경제특구를 해보지도 않고 실효성을 운운하는 것은 배부른 소리”라고 말한다.
영국, 아일랜드처럼 높은 실업률로 고통을 받은 이후에 시장 변화에 대응하는 것은 고통의 강도만 높인다는 것이다.


국적을 불문하고 진출하는 다국적 기업들은 한 나라의 기업환경에 따라 확실하게 ‘차별 대우’를 한다.
우리나라의 GDP 대비 외국인직접투자액(FDI) 비율은 2000년 기준으로 2%를 약간 넘어서는 데 반해 싱가포르는 6.9%, 말레이시아는 4.2%에 이른다.
심지어 태국도 2.8%로 한국보다 높다.
97년 이후 4년 동안 국내로 들어온 외국인직접투자 규모는 315억달러. 이 역시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는 중국(2120억달러), 일본(321억달러)에 이어 여섯번째 규모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건 한국의 투자여건이 경쟁지보다 좋지 않은 탓이 크다.
주한미국상공회의소가 올해 발표한 ‘기업환경 조사보고서’를 보면 서울의 기업환경은 도쿄, 상하이, 홍콩, 싱가포르 등 5개 도시 중 꼴찌를 차지했다.
글로벌 비즈니스 환경은 서울만 유일하게 열악하다는 응답이 나왔다.


하지만 잘 따져보자. 과연 외국인 투자를 많이 받는 것만이 우리 경제를 살리는 길일까? 세계경제 침체의 와중에 한국 경제는 지금 외국인 비즈니스 환경이 좋다는 홍콩, 싱가포르보다 잘 버티고 있고, 한국 사람들의 평균 개인소득은 외국인 투자비중이 높다는 말레이시아, 태국 사람들에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변화의 필요성을 절감하지 못한다.
경제특구같이 큰 변화를 도모하려면 확실한 사회적 동인이 필요하다.
경제특구를 경제회생의 디딤돌로 잘 활용한 나라로 꼽히는 영국은 실업률이 15.5%에 이르는 혹독한 시련이 있었기에 큰 모험을 감행할 만한 사회적 동력을 얻었다.
아일랜드 역시 기업과 사람들이 부를 찾아 줄줄이 해외이민을 떠나는 상황을 겪고서야 중대한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
사회적 합의는 큰 변화에 필수적 성공요소다.



개발 방식에서 국민 법익 제한할 수도


경제특구라고 다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기반 여건을 고려하지 않으면 정부의 투자에도 불구하고 실패할 수 있다.
파키스탄의 경제특구에는 외국인 투자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지역균형개발을 하겠다면서 농촌 저개발지역에 특구를 설치한 것이 주요 패인이었다.


설사 경제특구가 각종 특혜로 외국인 투자를 크게 이끌어낸다고 해도 정부의 의도대로 경제특구내 외국 기업들이 기술 이전, 개발을 통해 한국 산업을 업그레이드해줄지 미지수다.
지난해 LG경제연구원이 외환위기 이후 외국계 기업으로 바뀐 25개 기업의 경영실태를 분석한 결과, 외국인의 투자가 설비투자나 기술개발면에서 별다른 효과를 가져오지 못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실제로 외환위기 이후 국내에 들어온 외국인직접투자는 서비스업에 집중돼 있다.
때에 따라서는 외국인직접투자가 국내 내수시장을 외국 기업 손에 거저 넘겨주는 요술방망이로 쓰일 수도 있다.


경제특구법안이 결국 한국에서 사는 사람들이 잘살자고 만들어진 법안이라지만 법안을 꼼꼼히 들여다본 분석가들은 머리를 갸웃거린다.
국회 재정경제위원회 김문희 수석전문위원은 법 검토보고서에서 “이 법안이 경제특구지역을 미래의 동북아 허브로 발전시키기 위한 기본 청사진으로 제시하고 있지만 경제특구 개발방식을 보면 내국인의 삶의 질 향상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또 “토지 수용 등 국민의 권리 의무와 관련한 법 규정이 많이 포함되어 있고 법안에 다른 법령을 배제해 그동안 국민이 누렸던 법익을 제한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경제특구법안을 실천하려면 막대한 예산 투여와 세수 손실을 감내해야 한다.
큰 변화를 준비하는 발걸음은 아무리 신중해도 지나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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