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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기사2. 채무자들 재기기회 ‘희소식’
관련기사2. 채무자들 재기기회 ‘희소식’
  • 이승철 기자
  • 승인 2002.11.0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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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카드를 함부로 사용하다가 5천만원의 빚더미에 오른 20대 회사원이 있다.
경마에 빠져 도박빚이 2억원이나 되는 40대 자영업자도 생각해보자. 둘 다 당장 부채를 모두 갚을 능력이 전혀 없으니 개인파산선고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이때 법원이 카드연체자에게는 1년 동안 500만원만 갚으라고 한다.
또 상습도박자에게는 2억원 중 4천만원만 변제하라는 결정을 내린다.
두사람은 갖은 수단을 동원해서 그 결정을 따랐으며, 1년 후에는 남은 빚을 면책받을 수 있었다.
꿈 같은 이야기인가.

이웃 일본에서는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진다.
이른바 ‘개인회생제도’다.
일본은 1980년대 말~90년대 초에 무분별한 소비풍조가 만연하면서 개인파산자가 100만명에 이르렀다.
개인의 책임과 도덕성만 따지기에는 너무 심각한 상황이었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과감한 파산면책절차를 도입했다.
예를 들어 낭비로 인해 파산직전에 처한 경우, 카드연체자는 1년간 부채의 10~20%를, 도박자는 부채의 20~30%를 각각 변제하고 나면 나머지 부채를 면책받는 방식이다.


이는 더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니게 됐다.
내년 하반기부터 우리나라에도 이런 개인회생제도가 도입될 예정이다.
정부는 ‘통합도산법’ 제정안을 10월말 완성하고 관계부처 협의를 거쳐 법안이 통과되면 2003년 7월부터 시행하기로 했다.
통합도산법은 현재 회사정리법, 화의법, 파산법 등 세가지로 흩어져 있는 도산 3법을 하나로 합친 것이다.


제정안에서는 부실기업의 도피처로 이용된다는 비판을 받아온 화의제도를 폐지하고 회사정리절차를 일원화했다.
회사정리를 신속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법정관리에 들어가는 기업의 경영을 원칙적으로 기존 경영인이 계속 맡도록 했다.
또 채무자 회생절차와 청산절차를 구분했으며, 처음으로 개인회생과 국제도산을 별도로 규정했다.


이 법안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이 개인회생제도다.
신청대상은 개인파산에 직면한 채무자 중 급여소득자, 영업소득자 등 정기적 수입이 있는 자에 한한다.
법원은 당장 파산선고를 내리는 것보다 장래 수입으로 빚을 갚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판단하면 개인회생 개시 결정을 내린다.
채무자는 5년 이내의 기간 동안 갚을 수 있는 변제계획을 14일 이내에 법원에 제출해야 한다.
채무자가 변제계획에 따라 최선을 다해 변제를 완료하면 책임을 완전히 벗게 된다.


개인회생기간 중에는 채무자의 재산을 대상으로 한 소송 및 가압류, 가처분, 담보권 설정, 채권변제 등이 모두 중단된다.
제정안은 부부가 함께 개인회생을 신청하는 것도 허용했다.
단 신청일부터 10년 이내에 개인회생을 신청했거나 면책받은 적이 있으면 더이상 개인회생이 허용되지 않는다.


주목할 점은 채무면책 불허가사유 중에서 낭비 등 항목이 삭제된 것이다.
현행 파산법 346조에는 ‘낭비 또는 도박 기타 사행행위를 하여 현저히 재산을 감소시키거나 과대한 채무를 부담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면책 불허가의 결정을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지금까지 면책을 불허받은 대상자들은 대부분 이 조항에 걸렸기 때문이다.
최근 급증추세인 신용불량자가 260만명까지 늘었으며 연말에는 300만명에 이를 것으로 예측된다.
이중 많은 수가 지난 9월부터 금융기관의 전산망이 통합되면서 신용카드 돌려막기가 어려워진 경우다.
이들은 현행 법조항에 따르면 낭비 등 사유에 해당하므로 면책허가를 받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이와 함께 제정안은 지금까지 배제됐던 ‘일부면책’을 허용하기로 했다.
현행법에서는 ‘도 아니면 모’ 식으로 전부면책 또는 면책불허가 중 하나를 선택할 뿐 일부면책을 허용하지 않았다.
김남근 변호사는 “우리 법원이 2년 전부터 유연한 태도를 보이며 낭비 등 사유에 대해서도 일부면책 판결을 내리기 시작했으나 근거가 없는 상황이었는데, 제정안이 이를 법적으로 뒷받침하게 됐다”고 말했다.


참여연대와 한국소비자보호원을 비롯한 많은 시민운동단체와 소비자단체는 개인회생제도 도입에 대해 일제히 환영의사를 표시했다.
참여연대의 한 관계자는 “과도한 가계부채와 신용카드 돌려막기 등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른 만큼, 일정을 앞당겨서 하루빨리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빚은 갚아도 그만 안 갚아도 그만’이라는 식의 도덕적 해이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다.
이와 관련 파산(도산)법원을 설립하는 등 법원의 역할과 전문성을 획기적으로 높여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전국경제인연합회 관계자는 “앞으로는 파산이 일상적인 일이 될 텐데 우리나라는 4개 지방법원에만 파산부가 별도로 있을 뿐이고 그나마 순환보직 등으로 전문성을 확보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다음으로 논란의 여지가 많은 대목은 관리인제도다.
제정안에서는 원칙적으로 기존 경영자를 법정관리인으로 임명하되, 예외적으로 기존 경영자에게 중대한 부실책임이나 재산은닉 등 잘못이 있을 때만 제3자를 법정관리인으로 임명하도록 했다.
현행법에서는 부실기업이 화의와 법정관리 중 택일할 수 있다.
화의제도는 기존 경영자가 계속 경영권을 확보하기 때문에 기업이 상대적으로 선호하지만, 부실기업의 책임자가 계속 경영권을 유지하는 방편으로 활용된다는 비판이 높았다.
이에 따라 제정안에서는 제도 자체가 폐지됐다.
법정관리제도는 기존 경영자의 경영권이 박탈되므로 도덕적 해이를 견제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 경영자가 경영권을 보전하기 위해 신청을 기피하고 시일을 질질 끌게 되는 단점이 있다.


제정안은 양자의 장점만을 취하기 위해 예외적 경우를 제외하고는 회사 사정을 잘 아는 기존 경영자가 계속 회사를 이끌고 가도록 했다.
이는 전국경제인연합회 등 재계에서 줄곧 요청해온 사항이다.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 조유현 차장은 “기업 입장이 많이 반영되어 환영한다”며 “부실기업주의 악용소지를 인정하지만 견제장치를 법이 아니라 하위규범에서 융통성있게 다뤄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반면 부실기업의 채권단을 구성하는 은행연합회쪽은 이에 대해 반대입장이었지만, “선진법령에서 시행중인 사안인만큼 대세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반응이다.
참여연대 한 관계자도 “부실경영주의 경영권을 박탈하지 않는 것은 개혁의 후퇴가 아닌가”라고 의문을 제기하면서도, “우리가 주장해온 개인회생절차가 수용됐으니 서둘러 시행하는 것이 중요하며, 미비점은 차차 보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이밖에 제정안은 재계를 중심으로 논의되던 자동중지제도와 사전조정제도를 도입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판단하고 제외했다.
자동중지제도는 채무자가 신청하기만 하면 법원의 결정이 없어도 채권자들의 모든 권리행사가 자동 중지되는 것이다.
사전조정제도는 채무자와 채권자가 사전에 합의한 뒤 법정관리절차를 신청하면 법원이 즉시 인가해야 하는 제도다.
재계는 또한 도산기업이 신규로 조달하는 자금에 대해서는 실질적 우선변제권을 인정할 것과, 1999년 도입된 필요적 파산선고 제도를 없앨 것 등을 요구하고 있지만 큰 무게를 싣지는 않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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