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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 회계법인 ‘밥그릇’ 전쟁
[비즈니스] 회계법인 ‘밥그릇’ 전쟁
  • 류현기 기자
  • 승인 2002.11.2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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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구조조정과 부도, 강제합병이라는 시련을 겪었던 IMF시절에 일할 사람이 부족해 사람을 더 뽑아야 한다고 ‘수습회계사’를 싹쓸이하던 회사가 있었다.
외국계 대형 회계법인과 제휴관계에 있는 ‘빅5’라는 국내 대형 회계법인이 그러했다.
5년이 지난 현재, 이번에는 빅5가 회계시장을 싹쓸이하려고 한다.
중소 회계법인들은 여기에 맞서 시장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빅5로 불리는 삼일, 삼정, 안진, 안건, 영화 등의 대형 회계법인들은 화의와 법정관리, 코스닥시장 활황 등으로 IMF 사태 이후 황금기를 누렸다.
‘구조조정’과 ‘M&A’라는 단어가 낯설게 느껴지던 5~6년 전에 IMF 사태로 부도난 회사들은 일반인들에게는 눈물이었다.
하지만 구조조정의 노하우를 쌓은 대형 회계법인에는 돈벌이 대상이었다.


그런데 최근 1~2년 전부터 컨설팅 수요가 줄고 기업합병 매물이 정리되면서 수익구조에 문제가 발생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IT 업계의 세계적 경기침체로 컨설팅 투자비용을 아낌없이 쓰던 고객사들이 몸을 움츠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엔론사태에서 비롯한 미국의 회계부정 사건은 외국 회계사와 제휴관계에 있는 국내 빅5의 입지와 수익성에 더욱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사실 과거에는 중소 회계법인을 지칭하는 로컬과 빅5의 영역에 암묵적 선이 그어져 있었다.
예컨대 자산규모 70억원 이상은 빅5가, 나머지는 로컬이 맡는 식이었다.
하지만 경기침체에 따른 기업감사와 컨설팅 서비스 수요가 줄면서 빅5는 이 선을 조금씩 넘어오고 있다.



빅5와 로컬, 무너지는 사업 영역


국내 10위권의 로컬 회계법인 대표로 있는 김아무개 회계사는 자신의 고객 사무실을 나오며 솟구치는 울분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한 무역회사가 해외에 진출하는 데 김 회계사는 몇년 동안 자문업무를 해왔다.
이 회사가 막 해외에 진출할 수 있게 된 순간에 그는 힘이 빠지는 소식을 접했다.
고객사 사장이 빅5에 속하는 한 대형 회계법인의 로비를 받아 감사업무를 넘겨준 것이다.
대형 회계법인이 내세운 조건은 컨설팅 용역을 맡겨주면 감사를 무료로 해준다는 것이었다.
결국 고객사는 빅5의 브랜드 가치와 감사를 거저 해준다는 유혹에 넘어가, 몇년 동안 성장을 도와준 로컬과 결별했다.
이러한 일은 이제 빅5에서 실무를 담당하는 회계사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 되고 있다.


빅5들이 규모와 상관없이 ‘덤핑 감사’를 하는 이유는 대형 회계법인의 수익에서 감사와 비감사 부문이 차지하는 비율을 보면 알 수 있다.
국내 최대인 삼일회계법인은 2001년에 2100억원의 매출을 올렸고 이 가운데 비감사부문의 비율이 70%에 이른다.
안건을 제외한 다른 3개의 대형 회계법인들도 비감사 서비스가 차지하는 비중이 대부분 50%를 넘는다.
빅5 입장에서는 감사 수수료보다 컨설팅용역 수수료가 상대적으로 높기 때문에 비록 당장 수익이 없는 ‘덤핑 감사’라 하더라도 조건만 맞으면 수주한다.
높은 컨설팅 수수료로 감사 수수료에서 발생하는 적자를 메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로컬이 빅5와 단순경쟁을 해서 이기기는 힘들다.
빅5는 외국 회계법인과 국제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인적·물적 자원이 풍부하기 때문에 복합적 시스템이 필요한 컨설팅 업무에는 유리하다.
게다가 국내 상장사들이나 신규 사업을 진행하는 IT업종은 외국과 연계한 빅5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지난 2001년 빅5의 매출은 4500억을 넘고 이 금액은 전체 회계법인 매출의 70%에 이른다.
국내 기업의 빅5에 대한 선호를 단적으로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에 비해 외국의 대형 회계법인과 제휴관계가 없는 로컬은 파트너의 수임능력과 개인역량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감사와 컨설팅 수주가 어렵다.



감사 외에 용역서비스 비중 늘어


빅5와 경쟁하기 위해 로컬 회계법인들이 선택한 무기는 전문화와 차별화 전략이다.
예컨대 등록회계사가 20명 미만이지만 업계 20위권에 속하는 가립회계법인은 재경부, 기획예산처, 해양수산부 등 공공부문의 경영진단과 전략계획수립 등 컨설팅에 특화된 서비스를 제공한다.
가립회계법인 성만석 회계사는 “대형 상장법인의 감사는 빅5가 주도하고 있지만 중소기업이나 공공 부문 등에서는 로컬이 오히려 규모와 업종에 적합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또 다른 로컬인 화인회계법인은 회계감사에 치중하는 다른 법인과 달리 벤처기업 중심의 기업합병 등 전문 서비스 영역에 집중하는 차별화 전략을 선택했다.
화인은 1999년 재무전략컨설팅 전문 회계법인을 표방하고 빅5에서 10년 이상 경력을 쌓은 베테랑들이 모였다.
이러한 전략과 인적 인프라를 통해 3년 만에 화인은 40여명에 이르는 조직으로 성장했다.
전체 매출에서도 10위권, 특히 컨설팅 수입부문에서는 8위권에 진입했다.


물론 기업합병의 경우 대개 규모가 크고 인력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빅5가 유리하다.
하지만 소규모 기업합병은 오히려 로컬이 유리한 면이 있다.
최근에 화인은 엔터테인먼트와 스포츠 회사인 가오닉스의 압구정동 창아스포츠센터 인수와 관련한 매도 대리를 했다.
인수가 성공적으로 성사된 뒤 매수자인 가오닉스 임원진이 성과를 높이 평가해 컨설팅을 요청하기도 했다.
화인의 M&A 전문 회계사인 백승철 회계사는 로컬이 유리한 점을 이렇게 설명한다.
“빅5는 의사결정을 할 때 많은 단계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의사결정이 지연되는 단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로컬은 대부분 숙련된 회계사들로 구성돼 있어 의사결정이 빠르고 고객사에 유연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장점이 있죠.”

백 회계사는 로컬의 장점으로 거래처에 제공하는 ‘밀착 서비스’를 든다.
빅5의 회계사들은 기업감사를 할 때 1명의 등록회계사와 2명의 수습회계사가 한팀을 이뤄 움직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경우 수습회계사가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업무가 지체될 수 있다.
이에 비해 로컬은 파트너와 숙달된 회계사들로 팀을 구성해 일 처리가 빠르다.
게다가 감사와 컨설팅 업무를 분리하기 힘든 중소기업에 폭넓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빅5는 아니지만 합병을 통해 로컬 중에서 대형에 속하는 대주회계법인은 현재 100명 이상의 대형 법인으로 성장했다.
대주는 국제본부와 세무업무 등에 특화된 서비스를 제공한다.
특히 국제본부 안에 중국사업부를 운영해 다른 법인과 차별화를 꾀하고 있다.


빅5의 저인망식 싹쓸이에 로컬은 어려운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로컬법인 수가 늘어나 그나마 작은 시장을 나눠먹어야 한다는 부담도 만만치 않다.
또한 정부의 ‘비감사 서비스 제한’은 빅5나 로컬에나 껄끄럽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급변하는 회계환경에서 로컬은 틈새시장을 적극 공략하는 전략으로 시장 변화에 빠르게 대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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