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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케이스스터디] ‘당근과 채찍’의 협상 테크닉
[경영케이스스터디] ‘당근과 채찍’의 협상 테크닉
  • 양우성/ 공공정책 및 경영전
  • 승인 2002.11.2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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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검찰 조사과정에서 피의자가 사망한 사건이 일어났다.
민주정부로 바뀐 지 얼마 되지도 않는데 물고문 시비가 일어난 것은 참으로 수치스러운 일이다.
검찰조차도 피의자를 다룰 때 인권을 쉽게 도외시한다는 사실이 이번에 드러났다.
이 사건이 공론화됐다는 것만으로도 그나마 위안을 삼아야 할 판이다.


우리가 즐겨 보는 형사추리물 영화를 보면 형사들이 피의자를 심문하는 장면에서 한결같이 공통적인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험상궂거나 인정사정없어 보이는 형사가 피의자를 압박하고, 때로는 고문까지 한다.
피의자가 심리적 압박감을 못이겨 또는 공포심 때문에 빠른 시간 안에 범죄사실을 시인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도 피의자가 완강하게 저항하거나 심리적 압박 효과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마음씨 좋아 보이고, 인상도 좋고 신사다워 보이는 착한 형사가 등장해 피의자를 달래거나 협상을 시도한다.
피의자가 수사에 협조하는 만큼 그에 합당한 보상을 제공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심신이 지쳐 있는 피의자는 이럴 경우 착한 형사를 자기편으로 받아들이거나 최소한 나쁜 형사보다는 유익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정책적 메커니즘 충분히 감안해야


이렇게 나쁜 형사와 착한 형사가 역할을 분담해 번갈아 심문하면, 범죄사실을 좀더 효과적이고 신속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수사관행에서 비롯돼 나온 개념이 바로 ‘착한 경찰-나쁜 경찰’ 모델이다.
모름지기 모든 협상에선 바로 착한 경찰-나쁜 경찰 모델을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착한 경찰의 역할은 협상 상대방에게 당근을 제공하는 것이고, 나쁜 경찰의 역할은 채찍을 가하는 것이다.
착한 경찰의 역할은 상대방에게 자신들의 입장과 이해관계를 이해한다고 믿게끔 만들어 상대방의 협조를 적극적으로 유도하는 것이다.
나쁜 경찰의 역할은 경찰의 이익과 주장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데 있다.
일본 경찰이 피의자를 심문할 때 반드시 두명이 진행하도록 하는 규정을 두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바로 ‘좋은 형사-나쁜 형사’ 모델의 논리와 맞아떨어지는 셈이다.


흔히 많은 전문가와 언론들이 한국 정부는 해외 통상협상에서 협상기술이 부족하다느니, 통상협상 전문가가 없다느니 하는 지적을 한다.
일정 부분 일리가 있다.
하지만 이런 주장들은 굉장히 애매모호하거나 설득력이 약하다.
예를 들어보자. 지난번 칠레와 자유무역협정 체결을 위한 협상을 두고 언론과 전문가들은 많은 비판을 퍼부었다.
사전준비 소홀, 담당자의 전문성 결여, 정보 부족, 협상 테크닉 부족 등이 단골로 지적됐다.
하지만 칠레 협상의 본질적 문제는 자유무역협정의 체결 이후에 경쟁관계에 놓이게 될 국내의 포도와 배 재배농가의 산업적 손실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칠레와 자유무역협정으로 패자(losers)가 되는 농가들의 정치적 저항을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따라 자유무역협정의 정치과정이 영향을 받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관련 농민집단의 이해관계를 정부 관련부처와 국회가 충분히 정책의제로 다루고, 정책대안을 마련해야만 칠레와 자유무역협정 체결을 위한 협상이 제대로 마무리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정책 메커니즘을 간과한 채 협상기술이 부족하다느니 하는 비판은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다.



이익집단의 정치적 영향력 이용하기도


칠레와 자유무역협정에서 한국 농민들의 반발은 한국 정부로 하여금 칠레에 포도와 배의 무역자유화를 유보하도록 하는 지렛대가 됐다.
이 경우 농민단체가 칠레 정부와 자유무역협정 협상과정에서 나쁜 형사 노릇을 한 것이다.
협상전술 차원에서 보면 농민단체의 반발이 나쁜 형사 역할을 해 한국 정부가 칠레 정부의 요구를 물리치는 구실이 될 수 있다.


또한 한국 정부는 연례적으로 미국 연방정부와 통상마찰을 겪어왔다.
미국의 무역대표부(USTR)는 자국산 수출품의 자유로운 교역을 방해하는 외국 정부의 각종 규제와 시장관행을 고쳐 미국의 수출을 진흥하는 것이 기관의 고유 임무다.
따라서 협상대상국이 보호주의적 무역정책이나 제도를 운영하는 경우 미국 무역대표부는 협상상대를 적극적으로 공격하고, 요구사항을 관철시키려 한다.
때로는 외교적으로 내정간섭 시비를 야기할 정도다.


많은 한국의 대미 비판여론이 바로 미국 무역대표부의 대한 통상압력이 높아지는 시점에 맞춰 비등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때 미국 무역대표부는 협상대상국 정부에 나쁜 형사 역할을 하게 된다.
반대로 미국이 통상문제에서 상대국으로부터 통상압력을 받는 경우도 있다.
이때는 미국 무역대표부는 상대국 통상협상 대표에게, 흔히 미국내 정치 역학관계를 이유로 대면서 “최선을 다하겠지만 시간과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면서 통상압력에 대응한다.


예컨대 지난 11월15일 호주의 존 하워드 총리는 미국 무역대표부의 로버트 조엘릭 대표와 만났다.
두사람은 18개월 안에 종합적 자유무역협정을 두 국가가 맺자는 데 합의하고 공표했다.
두 협상가는 서로에게 요구하는 사항들을 강하게 주장하는 동시에, 반대로 상대방의 공격을 방어해야 할 때는 각각 자국의 내부정치 과정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아주 전형적으로 ‘나쁜 형사-좋은 형사’ 협상모델을 구사한 것이다.


호주는 자유무역협정이 발효되면 호주산 농산물의 미국 수출이 추가적으로 20억달러 이상 늘어날 것으로 본다.
때문에 자국 농산물의 미국 시장 수출을 방해하는 쿼터제도 같은 시장 기능의 효율성을 저해하는 보호주의적 정책들의 문제점을 제기했다.
이것은 전형적 나쁜 형사 모델이다.


그러나 미국으로서는 호주산 농산물과 자국 시장에서 경쟁관계에 있는 미국 농민들의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기에 협상이 어려운 것이다.
특히 이익집단의 정치적 영향력이 강하고, 연방 상하원 의회가 작동되고 있어 아무리 미국 대통령이라고 해도 의회내의 복잡한 정치과정을 통제하거나 장악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이런 정치체제가 미국의 통상 협상자에게 “나는 당신 요구대로 미국 시장을 개방하고 싶지만 국내 정치 시스템 때문에 많은 어려움이 있다”며 상대방의 이해와 협조를 구하게 만든다.
이때 미국 국내 정치의 특징이 착한 형사 역할을 하게 만든다.


같은 농산물 교역을 쟁점으로 삼아도 호주 정부와 미국 정부가 서로에게 요구하는 내용들이 다르다.
미국은 호주의 지나치게 엄격한 농산물 검역제도가 미국 농산물의 호주 시장 진입을 어렵게 만들고 있으니 검역제도를 완화해달라고 요구했다.
호주 정부는 소비자의 안전을 위해 존재하는 검역제도는 협상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완강한 입장을 보였다.
물론 호주 정부의 엄격한 검역 시스템은 안전과 위생, 환경문제 등에 대한 관심이 높은 사회적 분위기와 이익단체, 의회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런 요소들이 호주 정부가 미국의 공격적 협상을 방어하는 여지를 주는 것이다.


‘착한 형사-나쁜 형사’ 협상기술은 기업간 협상에서도 충분히 적용될 여지가 많다.
얼핏 보면 한 기업 안에서 일관된 입장이 없는 것 같은 인상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자세히 내용을 들여다보면 협상 상대 기업으로 하여금 자신들이 기대하던 최선의 대안을 고집하기보다는 절충안이나 중간 수준의 만족스러운 대안을 선택하게끔 만든다.
통일된 협상안을 들고나온 상대방쪽에선 이런 의도된 연출을 간파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따지고 보면 한국 정부와 기업의 협상능력 한계는 바로 이런 ‘착한 형사-나쁜 형사’ 협상기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서도 비롯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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