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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꺼져가던 생산라인, 희망의 불씨
[르포] 꺼져가던 생산라인, 희망의 불씨
  • 황보연 기자
  • 승인 2002.12.0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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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다.
첫눈이라고 한다.
공장굴뚝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연기에 고사리처럼 여린 눈발이 앙증맞게 춤을 춘다.
한겨울, 얼어붙은 몸을 데울 만한 사우나탕을 찾은 양 마음이 푸근해진다.
공장에 들어서니 해고자들의 현장진입을 막기 위해 세워놓았던 대형 컨테이너가 보이지 않는다.
꺼져 있던 품질관리 현황판에 매일 불이 들어오는 것도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컨베이어 벨트도 신이 난 듯 휘파람을 분다.
불안감에 휩싸여 애꿎은 담배만 찾던 노동자들도 작업화 끈를 바짝 조이고 있다.


부평 대우인천자동차에 다니는 생산직 사원 조립1부 조돈화(43)씨도 출근시간이 빨라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업무가 시작되는 오전 8시나 돼야 ‘땡출근’을 했다.
요즘은 오전 7시쯤이면 작업을 준비한다.
‘주5일근무’도 반갑기만 하다.
다른 사업장 노동자들처럼 너무 긴 노동시간을 줄이자는 차원이 아니다.
부도사태 이후 툭하면 가동중단을 겪으며 주3일 근무를 하는 게 부지기수였다.
때문에 조씨에게 주5일근무는 ‘공장정상화’로 가는 첫걸음이나 다름없다.


지난해 사상 초유의 1750명 정리해고 통보로 연일 노사간 충돌로 얼룩졌던 옛 대우자동차 부평공장에 희망이 피어오르는 것일까. 확실히 지난 10월17일 GM-대우 오토앤테크놀러지(GM대우차)가 공식 출범하면서 달라지긴 달라졌다.
신설법인 출범에 맞춰 닉 라일리 사장은 “새 회사를 경쟁력있는 기업으로 성장시키기 위한 사업에 착수하게 될 것”이라며 자신감을 내보였다.
공격적 경영으로 2~3년 이내에는 흑자를 내고 시장점유율 20% 이상을 확보하겠다는 목표도 내세웠다.
1999년 8월26일 대우차에 대한 워크아웃 결정 이후 꼭 3년여 만의 일이다.


돌이켜보면 지우고 싶은 고통의 시간뿐이었다.
옛 대우 경영진이 빚어낸 방만한 경영의 책임은 직원들에게 고스란히 넘어왔다.
생산직 사원만 7천여명에서 3천여명으로 줄었다.
30만평에 달하는 부평공장은 폐차장처럼 을씨년스럽게 바뀌었다.
공장 곳곳에 내걸린 ‘새출범 새각오’라는 현수막은 고통의 세월이 얼마나 길고도 깊었는지를 역설적으로 말해준다.



GM, 인수조건으로 내건 네가지 난제


하지만 부평공장에서 만난 생산부서 직원들은 GM대우차의 출범이 마냥 기쁜 일만은 아니라고 귀띔한다.
생산시설의 경우 군산과 창원 공장만이 인수됐기 때문이다.
부평공장내 3524명의 생산부서 직원들은 얼마 전 대우인천자동차라는 별도법인으로 분리됐다.
대우인천차는 앞으로 최소 6년 동안 차량, 엔진, 트랜스미션과 부품 등을 GM대우차에 공급해야 한다.
다시 말해 위탁경영체제에 들어선 셈이다.


이처럼 GM 본사 또는 ‘주류’에서 배제된 대우인천차의 미래는 여전히 불안하기만 하다.
GM은 6년 동안 네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대우인천자를 인수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 조건이란 게 여간 까다롭지가 않다.
인수 전 6개월 연속 주야 2교대, 매년 생산성 4% 향상, 인수 전 6개월간 전세계 GM 평균 품질수준 달성, 인수 전 3년간 전세계 GM공장의 평균 작업 손실시간 미만 등이 그것이다.
GM대우차가 어떻게 마음먹느냐에 따라, 다시 말해 인수를 거부할 마음을 가지면 대우인천차의 미래는 또다시 풍전등화처럼 불안에 빠질 수 있는 것이다.


실제 GM은 네가지 조건을 제시하고 이를 충족시키라고 요구하고 있지만 공은 GM에 가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GM이 앞으로 부평공장에 대한 투자를 어느 만큼 할 것이냐에 따라 생산성도 판가름나고 아울러 인수 여부도 결정나기 때문이다.
대우차노조 이보운 위원장은 “GM이 부평공장에 투자할 의지가 없다면 결국 희망을 잃은 채 절망 공장으로 전락해 문을 닫을지도 모른다”고 지적한다.
올해 출시된 칼로스를 생산하는 승용1공장의 경우 한달 전부터 주5일 공장이 가동되고 있지만, 매그너스를 만드는 승용2공장은 주3일 정도만 공장이 돌아간다.
한달 중 근무일수가 총 10일이 안 되는 경우도 있을 만큼 불안하기 짝이 없다.
억지로 희망을 갖자고 다짐해도 가슴 한구석이 여전히 휑한 것은 그 때문이다.


요즘 부평공장 직원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부평공업사’라는 말에도 이같은 심정이 그대로 묻어나 있다.
GM의 하청공장으로 전락하는 것 아니냐는 자조 섞인 푸념이다.
엔진공장에서 만난 엔진조립부 방종한(39)씨도 다음주부터 기다리던 주5일근무를 시작한다.
하지만 그는 볼멘 목소리를 냈다.
“이전에는 공장에 자재가 들어올 때 곧바로 들어왔는데 지금은 GM을 통해야만 들어올 수 있어요. 모든 물품의 조달, 구매를 GM이 관장하고 있으니 당연히 하청공장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겠어요? GM대우차 소속은 아니면서도 100% 간섭은 다 받아야 하니.” 그는 예전에 대우차의 하청 노동자들이 이런 심정이었을 거라고 미안해한다.



자칫 하청공장으로 전락 우려


더 심각한 것은 똑같이 부평공장 안에서 일하면서도 ‘A사’ 소속이냐 ‘B사’ 소속이냐에 따라 분위기가 딴판이라는 것이다.
본계약 체결 이후 공장내에선 GM대우차는 A사로, 인천대우차는 B사로 불린다.
생산직의 경우 대다수가 B사 소속이지만 기술연구소, 공기공장 등에서 일하는 일부 직원들은 A사로 갔다.
같은 노동조합 대의원으로 방씨와 안면이 있는 부품품질관리부 김한중(41)씨도 ‘A사’ 소속이다.
그래서인지 확실히 표정이 훨씬 밝고 자신에 차 있다.


그는 며칠 전 대강당에서 열린 행사에 참여한 이야기를 꺼냈다.
“대강당에서 A사 직원들을 대상으로 앞으로 생산계획을 설명하는 자리가 있었어요. 내년 3월부터 신차 프로젝트에 들어갈 것이라는 등 이야기를 들으니 훨씬 의욕이 생기더라구요.” 최근 들어 일이 더 재밌어진 김씨는 주3일근무하는 공장과 자꾸 마찰이 생긴다고까지 말한다.
띄엄띄엄 일을 하는 곳은 숙련도가 떨어져 품질이 이전같지 않다는 불만이다.


이쯤되자 방씨의 시선이 고울 리가 없다.
한 공장 안에서 같은 작업복을 입고 비슷한 일을 하는데도, 시간이 지날수록 차별은 더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당장에 직계가족들의 자동차 구입시 할인율도 18%와 16%로 차이가 난다.
막강한 외국계 기업을 주인으로 받아들인 사람들과 그 기업의 인수대상에 그친 사람들간의 처지는 이렇게 확연하게 달라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부평공장 사람들의 불길한 예감은 GM코리아와 합작했다가 결별했던 92년 무렵의 기억에 똬리를 틀고 있다.
부평공장 사람들에게 GM은 투자하기보다는 이익만 챙겨가는 기업으로 박혀 있다.
B사 소속의 장기 근속자인 시설부 김윤복(41)씨도 그런 불안감에 뒤척이고 있다.
“부평공장을 제외한 것은 노조문제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경기전망이나 시장성 등을 철저히 분석해본 뒤 최종적으로 판단하겠다는 의도도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 부평 사람들이 우선협상 대상자로 선정됐던 포드사를 GM보다 선호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회사 관리자들은 섣불리 낙담해선 안 된다고 손사래를 친다.
대우인천차 김영철 경영개선 담당이사는 “내년 6월부터 북미 수출이 시작되면 8월쯤부터는 승용1공장은 주야 2교대가, 2공장도 주간 풀로 가동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게다가 그는 2004년 말쯤 되면 부도 이전 수준인 40만대 생산이 가능하다고 전망한다.
원래 대우차가 50% 이상이 수출물량이기 때문에 GM의 네트워크를 잘 활용하면 해외 진출의 길도 훨씬 넓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부평공장은 최적의 생산 인프라를 갖추고 있습니다.
생산성과 품질수준에서 결코 뒤떨어지지 않죠. 그러면 GM도 조기인수를 바랄 것입니다.


그렇다면 또하나의 인수조건인 전세계 GM공장의 평균 파업손실일수는 얼마나 될까. 실제 부평공장을 일괄인수하지 않은 것은 화염병을 던지는 강성 노조를 부담스러워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많다.
지난 98년 미국 프린츠의 두개 부품공장에서 파업이 일어나면서 50여일 동안 GM의 완성차 생산에 차질이 빚어진 적이 있다.
그러나 대체로 GM의 파업손실일수는 많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 이사는 제로 수준이라고까지 말한다.


현재는 GM의 요구대로 회사 정상화를 위해 노사가 함께 뛰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3년 내내 노조의 발을 묶어놓는 일을 장담할 수만도 없다.
아직도 노동조합 사무실 주변에는 용역경비들이 드문드문 서 있어 격렬했던 노사간 충돌을 떠올리게끔 한다.
다만 일각에선 투명하지 못한 경영으로 노동자들의 원성을 샀던 옛 경영진보다는 낫지 않겠냐는 관측을 내놓는 정도다.



5년 만에 받아보는 특별상여금


오후 무렵이 되자 공장 곳곳에선 신설법인 출범에 따른 격려금 명목으로 회사가 1인당 120만원씩을 지급할 거라는 소식이 현장에 나돌았다.
5~6년 만에 받는 특별상여금이다.
모두들 오랜만에 나오는 격려금에 반가움을 금치 못한다.
사실 5년 동안 사임금이 동결되다 보니 생활고를 겪는 이들이 허다했다.
공장이 쉬는 날은 인력시장을 찾지 않으면 생계를 꾸리기 힘들 정도였다.
이 때문에 공장 근처의 일용직 단가가 훨씬 낮아졌다고 한다.
그만큼 찾는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다.


프레스공장에서 일하는 이석주(32)씨도 공장이 쉬는 날이면 부인의 부업을 돕는다.
일찍 결혼한 탓에 벌써 둘째 아이까지 유치원에 보내야 하는데 월급은 두 아이의 유치원 입학금 수준밖에 안 된다.
공장이 제대로 가동되지 않아 보통 주3일근무를 하다 보니 매달 70만원을 챙겨가는 정도다.
어쩔 수 없이 부인이 부업을 시작했다.
공장이 쉬는 날은 집에서 그 일을 돕는다.


아예 부인들이 장사를 시작한 경우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공장 근처에 술집이나 노래방 등을 차리는 것이다.
노조간부를 지낸 박재근씨의 부인도 갈산역 부근에서 ‘본전막걸리’를 운영한 지 1년이 됐다.
해가 지자 낯익은 얼굴들이 찾아왔다.
지난해 정리해고된 윤아무개와 고아무개씨다.
윤씨는 내년 초 리콜되는 복직대상자 가운데 한명으로 요즘 회사에서 재입사를 위한 교육을 받고 있다.
소주 한잔을 들이키더니 내일 받을 교육 주제가 뭔지 아냐고 묻는다.
특강주제가 ‘IMF와 기업구조조정’이란다.
“그놈의 구조조정 때문에 해고라는 아픔을 겪은 사람들한테 어울리는 주젠가요? 좀 야속한 마음이 들더라구요.”

하지만 옆자리에 앉아 있던 고씨는 그런 윤씨가 부럽다.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고씨는 윤씨처럼 끝까지 노조가 이끄는 정리해고 반대투쟁에 동참하지 못하고 GM대우차를 파는 영업사원이 됐다.
기본급 50만원에다 한대를 팔 때마다 수당을 얹어 받는다.
회사가 시키는 대로만 일을 해오다 이곳저것 찾아다니며 차를 팔려고 하니 생각만큼 쉽지 않다.
어떤 때는 인간적 모멸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돌아갈 수만 있다면 다시 대우자동차의 직원이 되고 싶다.


복직대상자를 선별하는 작업을 맡았던 전 노조 부위원장 박재근씨는 아직도 그때를 잊지 못한다.
복직되지 못한 정리해고자들이 원망 섞인 목소리로 항의하며 노조사무실의 기물을 부수던 때 말이다.
요즘도 대우차 정문 앞에선 아침마다 정리해고자들의 출근투쟁이 계속되고 있다.
그 역시 해고자지만 부당해고구제신청을 냈던 1250명이 늘 마음 한편에 걸려 있다.
그는 “회사가 정상화되면 될수록 정리해고자들이 회사로 돌아가는 기회가 늘어나지 않겠느냐”며 술잔을 건넨다.
부평공장의 인수와 함께 새 주인이 된 GM이 풀어야 할 숙제가 여기저기 널려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번 대선에 출마한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는 11월27일 후보등록 직후 첫 선거운동지로 대우차를 방문했다.
노동계가 지원하는 후보인 탓도 있지만 이유는 또 다른 데 있다.
대우차가 바로 IMF 이후 대표적 구조조정 사업장으로 꼽히기 때문이다.
민주당의 노무현 후보 역시 다음날 이곳을 들렀다.
이런 상징성을 갖게 된 대우인천차가 앞으로 다국적 기업 GM과의 한지붕 두살림을 어느 만큼 슬기롭게 헤쳐나갈 것인지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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