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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프로]1세대 디자이너 권명광 / 홍익대 교수
[나는 프로]1세대 디자이너 권명광 / 홍익대 교수
  • 이희욱 기자
  • 승인 2002.12.0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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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직업.’ 디자이너를 말할 때 이런 수식어가 어김없이 따라붙는다.
이 직업이 가진 창조와 생산의 마력은 ‘튀는’ 것을 좋아하는 요즘 젊은이들을 매혹시키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디자인은 젊은이들의 몫’이라고 단정짓는다면 성급한 생각이다.
특히, 실력과 경험을 모두 겸비한 ‘베테랑’을 만나면 이런 고정관념은 금방 꼬리를 내리게 된다.


국내 미술의 메카인 홍익대학교 앞에서 만난 권명광 교수는 깊게 팬 주름만큼이나 녹록지 않은 연륜을 풍기는 1세대 국내파 디자이너다.
권 교수가 이 바닥에 처음 발을 디딘 때는 제3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산업화의 바람이 불어닥치기 시작한 1960년대 초반이었다.
“당시만 해도 국내엔 변변한 디자인 관련 학과조차 없을 정도로 제도권 교육기반이 약했어요. 국내에서 디자이너로 활동하는 사람들도 대부분 일본 유학파들이었죠.”

권 교수는 ‘순수 국내파’로 불모지나 다름없는 국내 디자인 업계에 맨손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니 모든 일을 스스로 개척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60년대 들어 정부 차원에서 디자인을 수출상품으로 인식하면서 디자인센터를 건립하고 상공미술전람회를 개최하는 등 적극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다.
디자이너의 숨통이 조금씩 트인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인식은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전문직으로 인정하는 게 아니었어요. ‘환장이’라는 비아냥거림에 시달리기 일쑤였죠.”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명작 수두룩


이런 사회적 천대 속에서도 권명광 교수의 디자인 감각은 조금씩 빛을 내기 시작했다.
대학을 졸업한 지 3년 만인 68년 산업자원부 주최 ‘대한민국 산업디자인전람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며 권 교수의 이름은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78년 프랑스 조형예술협회 주최 ‘어린이해 디자인공모전’에서 은상을 수상하며 해외에서도 실력을 인정받았다.
다음해인 79년에는 전국대학미전을 주최한 공로로 교육부장관 표창을 받았다.
86 아시안게임의 환경디자인 자문역과 88 올림픽 개·폐회식 디자인 전문위원을 거쳐 한국디자인법인단체 총연합회 회장에 이르기까지 40여년 동안 권 교수의 이력서는 각종 수상경력과 작품활동으로 빼곡히 채워졌다.
5번의 개인전과 각종 협회 전시회 출품은 물론, 주요 디자인 관련 대회 때마다 심사위원장엔 그의 이름이 박혀 있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작품들도 무수하다.
MBC, 한국전력, 칠성사이다와 코오롱그룹 등 50여개 기업의 로고를 포함한 이미지통합(CI) 작업이 그의 손을 거쳐 이뤄졌다.
우리 생활 곳곳에서도 그의 손때 묻은 작품을 발견할 수 있다.
서울 시민의 발인 택시와 버스의 승차대, 여의도와 명동 지하철 역사에 그려진 벽화가 그의 ‘자식’이다.


화려한 이력과 명성에 맞게 후학을 양성하며 상아탑에만 머물러 있을만 하건만, 권 교수는 아직도 현장을 지휘하느라 바쁘다.
제자들이 운영하는 디자인 사무실을 수시로 드나들며 작업을 지휘하고 있는 것이다.
“순수한 연구를 위한 작품과 실용디자인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73년 이후 홍익대에서 30년 동안 교편을 잡으면서 각종 저술활동을 병행한 것이 순수 연구 차원이었다면, 기업 CI 작업과 주요 국가행사 등에서 발휘한 솜씨는 실무 감각을 날카롭게 유지해준 ‘숫돌’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40년이 지났다.
어느덧 환갑을 맞은 것이다.
세월의 흐름을 잊고 디자인에 파묻혀 지내면서 그의 머리에도 새하얀 눈이 내렸다.
지난해 12월 권 교수는 국내 디자인 업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황조근정훈장’을 가슴에 안았다.
그리고 올해 11월23일, 국내 최초의 디자인대학인 상명대학에서 제1호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받으면서 국내 디자인 역사의 중심에 섰다.


하지만 그에게 진정 뜻깊은 일은 이런 외부의 인정이 아니다.
“이번에 책을 한권 냈습니다.
‘권명광’이란 개인의 책이지만, 그 속에는 국내 디자인의 역사와 변화의 흔적들을 한눈에 볼 수 있어요. 시대별로 어떤 디자인이 사회를 변화시켰으며, 관련 정책은 또 어떻게 바뀌었는지 정리하고 싶었습니다.
” 국내 근대 디자인사를 써내려온 백발 노교수에겐 어떤 영예보다 후학을 위한 한권의 책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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