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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케이스 스터디] 봉제업 해외 진출 ‘바늘구멍 뚫기’
[경영케이스 스터디] 봉제업 해외 진출 ‘바늘구멍 뚫기’
  • 양우성/ 공공정책 및 경영전
  • 승인 2002.12.2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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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브라질에서 봉제·의류사업을 하고 있는 가까운 지인이 현지 경기가 나빠져 고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한국에서 중앙 일간지 기자로 15년 넘게 성실하게 근무하다가 사업을 해보겠다는 의욕에 넘쳐 브라질로 가서 비교적 일찍 성공적으로 정착했다.
그렇지만 최근에는 사업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올 것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브라질에서 의류·봉제업을 하는 다른 한국인 사업체들도 경기가 나빠 고전하고 있다고 한다.


며칠 전 멕시코에서 의류·봉제업을 하는 한인 교포들이 멕시코 당국에 체포·구속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한국 교민 사업가 35명이 지난 12월6일 새벽(현지시각) 멕시코 정부의 위조상표 합동수사본부에 검거돼 이 가운데 33명이 이틀 뒤인 8일 오전 구속됐다.
미국의 유명 의류상표 등을 도용해 의류를 만들거나 원단 등을 밀수입해 판매한 혐의라고 한다.


구속된 한국인 사업가들은 멕시코시티 중심가에 있는, 한국의 동대문시장 같은 대형시장인 센트로에서 봉제·의류업을 하고 있다.
이곳 센트로지역에는 현재 한국인들이 옷가게 등 점포 300여곳을 운영하면서 나름대로 한인상권을 형성한 곳이다.
구속된 교민 중에는 부부도 3쌍이나 있다.
졸지에 한 가정이 풍비박산난 것이다.


구속된 교민들은 “NFL과 올 3월까지 정식 계약하고 의류를 판매했으며, 압수품은 계약 만료 이후의 재고일 뿐 판매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한다.
교민들 주장대로라면 억울한 사정이 적지 않을 것이다.
현지 교민들은 멕시코 정부가 한국계 이민사회를 대상으로 표적수사를 벌이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유태인 등 기존 상권 기득권자들과 경쟁 과정에서 비롯한 마찰이라는 설명도 설득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브랜드 파워없이 하청생산에만 주력


그러나 문제의 본질은 중남미 대다수 한국인 사업가들이 의류·봉제처럼 비교적 쉽게 사업을 벌일 수 있는 업종에 집중했다는 데 있다.
한국 교민들은 멕시코시티에서만 2000년 1400여명에서 현재 1만5천여명으로 늘어났다.
그런데 이들 대부분이 의류·봉제업 등에 종사하고 있는 것으로 주한 멕시코 대사관은 추정한다.


중남미지역만이 아니다.
한국인 중소규모 사업가들은 해외, 특히 저개발국가로 진출하는 경우 대부분 섬유, 의류·봉제, 완구, 신발 같은 노동집약적 업종들을 선택한다.
요즈음 베트남이 한국의 주요 해외투자지역으로 급부상하고 있는데, 여기도 예외가 아니다.
대한무역진흥공사(KOTRA) 호치민시 무역관에 따르면 미-베트남 사이에 최혜국대우를 부여하는 무역협정이 체결된 이후 베트남 투자를 위해 무역관을 방문하는 한국 기업이 주당 평균 4∼5개사로 이전보다 두배 이상 늘었다고 한다.
그런데 투자 문의업체들 대부분이 섬유·봉제, 직물, 가방제조 등 노동집약 업종이라는 것이다.


최근 인도네시아에 진출해 사업하는 한국인 사업가들의 사정도 멕시코나 브라질, 베트남과 비슷하다.
자카르타 한국무역관(KOTRA)에 따르면 현지 한국계 기업은 2001년 말 기준으로 약 400여개며 20여만명의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다.
이들 한인 기업의 주업종은 섬유·봉제, 완구, 신발 등 노동집약적 산업들로 이들이 만든 제품들이 각각 인도네시아 전체 수출액(업종별)의 15~33%를 차지할 정도다.


이런 흐름은 북한과 남북 경제교류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신의주경제특구와 개성공단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노동집약적 업종, 이미 국내에서 사양업종으로 여겨지는 업종들이 관심을 보인다.
봉제업의 경우 신의주특구에 바로 들어갈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메리야스조합 등을 중심으로 구체적 시행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섬유업계에서는 남한의 기술력과 북한의 노동력을 결합해 중국에 밀리던 경쟁력을 회복하길 희망한다.


원래 노동집약적 업종의 해외 진출이나 투자는 과거 대기업들이 선도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한국에서 노동집약적 업종들이 경쟁우위를 잃기 시작하자, 당시 종합무역상사들이 국내의 중소 봉제·의류, 섬유, 신발 같은 업체들의 해외 진출을 주도·지원했다.
예를 들면 대우그룹이 인도네시아 현지에 설립한 봉제공장(Rismar Daewoo Apparel, RDA)이 올해 5월30일 인도네시아 재무성에 의해 인도네시아 200대 기업 가운데 77위에 선정됐다.
이 경우에 한국의 노동집약적 사양산업이 해외에 진출해 성공한 사례라고 할 수도 있다.



1~2년 후엔 현지 업체들과 경쟁 불보듯


이제껏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지구촌 곳곳 저개발국가에 진출하는 한국의 중소기업들, 심지어 대기업 종합상사들마저 봉제업처럼 노동집약적 사업에 자본과 기술을 투자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성적표가 그리 나쁜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 고집스럽게 봉제업을 계속하는 것보다는 저개발국가로 진출하는 것이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 이미 익숙하게 해보았던 사업을 들고 나가 해외에서 저렴한 인건비 등 비용우위를 바탕으로 접근하므로 ‘안전한 해외 진출 전략’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멕시코에서 한인 봉제·의류업체들이 위조상표 제품의 본거지처럼 알려진 것은 그만큼 한국인 봉제·의류업체들이 브랜드 파워 없이 한국에서 70년대, 80년대에 하듯이 하청생산에 주력하기 때문이다.
브라질 등 남미의 교포 봉제업체도 마찬가지다.
베트남, 인도네시아, 중국, 앞으로 신의주와 개성공단에 진출하는 봉제·의류업체들도 똑같다.
하나같이 저렴한 인건비나 특혜관세 같은 비용우위만을 쫓고 있다.
하청생산에 익숙하고, 손끝에서 나오는 숙련과 근면함만 있으면 비교적 손쉽게 사업할 수 있다는 과거의 성공공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지 사업가들이 보면 한국인들의 봉제사업은 제일 따라하기 쉬운 사업이다.
몇달, 길어야 1, 2년만 배우면 누구나 독립해서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인들이 진출해 봉제업을 하는 저개발국가들에서 한국인 봉제업체와 현지인 봉제·의류업체가 금세 경쟁관계에 놓이고, 나아가서는 한인 업체들끼리 글로벌 경쟁을 벌이게 된다.
베트남의 한국인 봉제업체가 브라질, 멕시코 봉제업체와 지구 반대편에서 서로 경쟁하는 꼴이다.
하청물량을 발주하는 미국, 유럽의 바이어들로서는 지속적으로 구매력을 바탕으로 협상우위를 지킬 수 있다.


한국의 의류업계가 생존하기 위한 좀더 현명한 전략은 브랜드 파워를 갖추고 마케팅과 유통망, 디자인 등에 주력하는 것이다.
생산과 관련한 기능들은 과감하게 저개발국가의 파트너에게 넘겨야 한다.
봉제기술과 기계설비를 동남아, 중남미의 믿을 만한 현지인 파트너들에게 매각, 전수하고, 그들로부터 안정적으로 좋은 품질의 의류를 저렴하게 공급받아야 한다.
기계설비를 매각해 현금흐름을 개선하고, 오히려 회사 자원을 디자인 개발, 브랜드 육성이나 로열티 관리, 글로벌 유통망 혁신, 글로벌 광고와 판촉 등에 투입해 이윤의 원천을 생산에서 마케팅과 유통으로 옮겨야 한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발리 폭탄 테러 사태로 미국과 유럽의 바이어들이 발길을 끊자 한국인 봉제업체들이 무더기로 도산 위험에 처하고 있다.
한국인 사장이 갑자기 공장문을 폐쇄하고 야반도주해 현지 노동자들을 격분하게 만드는 일이 적지 않게 발생한다.


멕시코시티의 한국인 봉제·의류업자들 구속, 중남미 교포 의류·봉제업자들의 불경기, 인도네시아 한국 봉제업체들의 도산과 야반도주 사태가 우연한 사건들이 아니다.
안전하다고 생각한 잘못된 해외진출 전략의 위험에서 비롯한 예견된 결과다.
나이키는 인도네시아 하청공장이 비용우위를 잃으면, 태국이나 베트남의 신발 하청공장을 새로 물색하면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
브랜드 파워와 디자인 등 마케팅 기능과 유통기능에 핵심 경쟁우위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인 신발 하청공장은 계속 저렴한 비용을 찾아 공장과 설비를 이전하고 새롭게 노동자들을 훈련, 교육해야 한다.
그나마도 금세 현지 업체들과 경쟁해야 한다.
누가 영민하게 사업하는 것일까? 살아남으려면 처음부터 전략을 뒤집어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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