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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프로] 박정우 / 시나리오작가
[나는프로] 박정우 / 시나리오작가
  • 이승철 기자
  • 승인 2003.01.0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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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완의 4연타석 홈런, 박정태의 31게임 연속안타. 우리 프로야구의 대표적 진기록들이다.
숱한 대기록 중에서도 이런 기록이 그 빛을 발하는 이유는 ‘꾸준함’ 때문일 것이다.
한두 타석, 한두 게임을 잘하기는 어렵지 않지만, 매번 끊임없이 성과물을 쏟아내기가 어디 쉬운가. 그래서 미국 메이저리그에도 조 디마지오의 56게임 연속안타 기록은 전설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국내 영화계에도 이런 대기록 메이커가 탄생할 조짐이 보인다.
그 주인공은 최고의 흥행 시나리오작가 박정우(33)씨. 코미디의 새 조류를 제시했다는 평을 듣는 '주유소습격사건'부터 '산책', '선물'을 거쳐 최고 히트작 '신라의 달밤', 최근 개봉된 '광복절특사'까지. 그의 작품목록을 보면 여덟 작품 중 한번도 범타로 물러난 적이 없다.
최소한 단타부터 만루홈런까지. 그의 신기록행진은 계속된다.


박정우 작가는 대학 2학년 때인 1990년 충무로 연출부 생활을 시작하며 영화계에 뛰어들었다.
그는 영화감독 지망생이었다.
초창기에는 누가 작가라고 부르면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명함에도 ‘박정우 감독’이라고 찍혀 있다.
꿈은 지금도 변함없어 2003년 새해 드디어 감독으로 데뷔한다.
이런 자의식 때문일까. 그는 한국시나리오작가협회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가입비 35만원을 내라는 게 기분나쁘기도 했고(웃음), 나는 작가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딱 한번 협회에 가입하지 않은 걸 후회한 적이 있다.
교통사고로 두달 동안 입원했을 때, 보험회사에서 자신을 작가로 인정하지 않고 일용직 노동자로 분류하는 바람에 최저보상을 받았을 때다.


“감독이 되는 방법을 생각해보니, 유학을 가거나 단편영화부터 만들거나 아니면 시나리오를 쓰는 방법이 있더군요. 저는 시나리오작가를 택했죠.” 그 유명한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조감독 시절의 습작이 주변사람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고, 제1회 삼성영상사업단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당선됐다.
딱 세편만 쓰고 감독하자고 맘먹었는데, 97년 '마지막방위'를 첫작품으로, 2002년 '라이터를켜라'와 '광복절특사'까지 여덟편에 이르렀으니 계획이 ‘빗나간’ 셈이다.


박 작가는 코미디 장르에서 재미를 봤다.
“멜로도 잘할 것 같은데, 워낙 코미디가 평이 좋으니…”라고 말끝을 흐린다.
어릴적 글쓰기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유달리 편지를 즐겨 썼단다.
“말은 논리적으로 잘 못하지만, 편지로 상대방을 감동시키는 게 잘 먹힌다는 것을 발견했어요. 여자친구에게 이런 대사를 쓰면 ‘뻑가겠지’ 하고 기대하면서 많이 써먹었죠.” 그의 놀라운 ‘대사발’이 싹을 트는 시절이었다.



주유소습격사건서 광복절특사까지 숱한 화제


작가 초기 시절에는 감독과 숱하게 싸웠다.
감독이 지나치게 작가적 고집을 내세우거나 대사를 맘대로 바꾸는 데 반발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지금의 명콤비인 김상진 감독을 만난 것이 큰 전환점이 됐다고 그는 말한다.
“시나리오작가는 어설픈 메시지를 전달하려 하거나 괜히 대사에 힘을 주는 경향이 있는데, 김 감독과 일하면서 어깨 힘을 빼게 됐어요. 이제 내가 모르는 이야기는 절대 안 씁니다.
” 박정우 작가는 처음에는 김 감독을 ‘쌈마이’라고 부르며 ‘경시’하기까지 했단다.
“명색이 영화감독인데 돈 몇푼 벌려고 저러고 있나 했죠. 하지만 ‘우리는 쌈마이다’라고 인정하는 것이 영화로 사기치는 것보다 솔직한 미덕이라고 생각을 바꿨어요.” 김 감독 이야기를 할 때 그의 표현은 이렇게 거침없다.
워낙 가까운 파트너이기 때문에.

그래서 도달한 결론이 “시나리오작가는 감독이 원하는 바를 무조건 맞춰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일하기에도 편하고 결과도 좋더라는 걸 깨달았다.
김상진 감독이 대본을 손질해서 결과가 더 나아진 사례를 물었더니, '신라의 달밤'에서 차승원이 이단옆차기를 하다 허공을 가르고 나자빠지는 ‘만화 같은’ 장면과, '주유소습격사건'에서 도망치는 박영규를 이성재가 오토바이로 쫒는 장면을 꼽았다.
“나는 대충 썼는데 감독이 아주 재미있게 만들었어요. 그래도 김 감독한테 인정은 안 했어요. 칭찬해주면 ‘그 인간’이 또 잘난체하니까.”

그는 무조건 빨리 쓰는 것을 철칙으로 삼는다.
초고 쓰는 데 절대 2주일을 안 넘긴다.
한달 만에 '키스할까요'와 '산책' 두편을 쓰기도 했다.
“처음에는 미친 듯이 써댔어요. 내가 천재라고 생각하면서 말이죠. 돈도 좀 벌고 결혼까지 한 지금은 예전의 ‘헝그리 정신’이 많이 퇴색하고 매너리즘에 빠져 머리가 팍팍 안 돌아가네요.” 대본이 꽉 막히면 어떻게 하는지가 가장 궁금했다.
돌파구를 찾는 비법을 알려달라고 몇번이나 물었건만, 그의 대답은 단 하나. “막히면 풀릴 때까지 놀아요. 실컷 딴짓하다가 새 기분으로 다시 시작하는 거죠.”

상식을 찌르는 엇박자 대사가 박정우 작가의 주무기다.
숱하게 화제를 뿌린 대사 중 가장 맘에 드는 대사를 묻자, '신라의 달밤'에서 깡패 보스역 이원종의 대사를 꼽는다.
동사무소 직원이 예비군통지서를 들고 찾아오니까 “망할놈의 조국이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다구”라고 내뱉는 식이다.
그는 웃음의 비결로 ‘정치적’ 요소를 애용한다.
“극적으로 뒤집히는 반전의 쾌감과 관객이 자기도 모르게 움찔하는 요소를 만드는 데는 정치사회적 묘사가 가장 잘 먹혀요. 웃음을 증폭시키면서 충격요법이라는 플러스알파까지 얻는 거죠. 너무 자주 써먹으니까 욕을 먹기도 하지만요.”(웃음)

충무로 최고 히트작가인 그는 '광복절특사'로 3천만원을 받았다.
“그 정도면 모자라지도 풍족하지도 않은 수준이죠. 지난해까지는 제가 제일 많이 받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6천만~7천만원 받는 작가도 있더라구요. 저는 대신에 지분으로 승부합니다.
” 그는 '선물' 때부터 원고료와 별도로 옵션계약을 맺는다.
지분율은 10~15%로 꽤 높은 편이다.
그 덕분에 '신라의 달밤' 한편으로 4억원 가까이 벌기도 했다.
“궁핍한 작가생활을 소재로 한 기사가 자주 등장하는데, 작가도 해볼 만한 직업이라는 선례를 남기고 싶었어요. 그 목표는 달성한 셈이죠. 옵션계약을 하는 작가가 10여명이 되고 이사급 대우를 받는 작가도 있어요. 지금 충무로 시나리오작가는 바야흐로 꽃피는 시절을 맞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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