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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신경제는 결국 환상이었다
[서평] 신경제는 결국 환상이었다
  • 최우성 기자
  • 승인 2003.01.1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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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브레너라는 이름은 그간 세차례 홀연히 ‘출몰’했다.
그의 이름이 처음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 건 1980년대 중반 무렵이다.
70년대 경제사학계에서 벌어진 ‘브레너 논쟁’ 덕택에 이미 나라 밖에서는 그의 이름이 꽤나 알려진 상태였지만, 국내 학계는 이른바 ‘자본주의 이행’이라는 문제가 화두가 된 80년대 중반에 이르러 비로소 마르크스주의 성향의 경제사학자 브레너에 눈길을 주기 시작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체제가 결코 절대적이거나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며, 따라서 ‘역사성’을 지닌다고 굳게 믿던 당시 사람들에게 봉건사회에서 자본주의사회로의 이행과정을 밝혀내는 데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는 브레너의 거침없는 행보는 단연 관심거리였다.
물론 봉건적 ‘계급’과 새로운 ‘계급’과의 투쟁이라는 단 하나의 잣대를 들이밀면서 자본주의 사회의 탄생 비밀을 설명하려는 그의 논지는 그에게 관심을 가졌던 사람들 내부에서도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세월의 흐름을 타고 잠시나마 잊혀졌던 브레너는 98년 또 한차례 무대 한가운데로 등장했다.
사회비판적 성향을 띤 것으로 유명한 정기간행물 '신좌파평론'(New Left Review)에 “불균등 발전과 장기침체 : 호황에서 정체까지의 선진자본주의 경제 1950~1998”란 이름을 내건, 장장 270페이지에 이르는 도전적 논문을 발표했기 때문이다(이 논문은 '혼돈의 기원'이란 이름을 달고 국내에 단행본으로 번역 소개됐다).


70년대 이후 계속된 과잉투자


디지털 혁명이나 신경제 따위의 단어들이 모든 이들의 머릿속을 꿰차고 앉은 시절, 자본주의 경기순환의 특정국면에서 나타나는 변화에 매달리기보다는 70년대 이후 세계자본주의 내부에서 진행되고 있는 근원적 흐름을 놓치지 말라는 그의 따끔한 충고는 전세계 독자들의 눈길을 끌어당기기에 충분했다.
때마침 “단군 이래 최대 국난”이라 불리던 IMF 체제의 충격에서 허우적대던 국내에서는 그 반향이 훨씬 컸다.
위기의 원인과 파장을 가늠하느라 분주하던 사람들에게 그는 동아시아 전체에 엄습한 ‘위기’라는 이름의 유령이 단지 금융시장의 일시적 교란을 영양분삼아 자라난 것이 아니라는 분명한 메시지를 전했기 때문이다.
위기를 싹트게 한 비밀은 바로 70년대 이후 지속된 과잉생산과 과잉설비 경쟁에 따라 기업들의 이윤율이 급속하게 떨어진 데 있다는 게 브레너의 생각이다.
위기란 곧 그 극적인 표현이자 일종의 출구였던 셈이다.


늘 시류를 거스르는 목소리를 내질러온 그의 세번째 출몰을 지켜보는 감회는 새롭다.
2002년의 끝자락에 브레너라는 이름을 다시금 떠올리게 만든 '붐 앤 버블'은 여러모로 '혼돈의 기원'과 짝을 이루는 또 하나의 역작이다.
전작인 '혼돈의 기원'이 70년대 이후 세계 자본주의 경제를 바라보는 올곧은 잣대를 던져주는 데 치중했다면, 무엇보다도 '붐 앤 버블'의 매력은 방금 우리가 숨가쁘게 터널을 뚫고나온 ‘90년대’와 정면으로 맞선다는 데 있다.
‘90년대’ 동안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진지하게 캐묻는 일은 곧 지금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는 현실을 이해하는 첫 걸음이다.
더블딥(이중침체), 거품 붕괴, 주가 폭락 등 오늘도 어김없이 뉴스를 장식하는 단어들에서 아예 눈감을 생각이 없는 독자라면 말이다.
그만큼 책장을 넘길수록 호흡은 더욱 가빠진다.
90년대라?! 이 말 속에는 신경제라는 이름 아래 호황을 구가하던 미국 경제와, 바로 그 호황 속에서 터져나온 경제위기가 한데 포개져 있다.
70년대 이후 여전히 지속되는 세계경제의 위기 메커니즘은 어떤 모습으로 왜곡되고 가려진 채, 호황을 구가한 ‘90년대의 미국’ 뒤편에서 폭발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를 이만큼 생생하게 그려낸 책은 드문 편이다.


이쯤에서 시간을 잠시 거슬러 올라보자. 2000년 말에서 2002년 중반까지 매우 짧은 기간 동안 미국에서는 60여개 통신회사가 파산했고, 해고된 노동자만 50만명에 달했다.
미국 경제가 한창 태평성가를 부르던 96년에서 2000년 사이에 통신산업이 고용한 노동자보다 50%나 많은 숫자다.
자동차산업에서 지난 20년 동안 해고된 노동자 수가 73만명이었던 사실과 한번 견주어보라. 통신산업으로 대표되는 신경제가 얼마만큼 격렬하게 ‘롤러코스터 타기’를 즐겼는지를 짐작케 해주는 대목이다.



거품이 꺼진 후 남은 추악한 잔해들


'붐 앤 버블' 전체를 관통하는 논지는 어찌 보면 한가지 물음에 대한 답변이다.
90년대 중반 이후 주식시장은 전례 없는 속도로 급팽창했지만, 바로 그 기간 동안 기업들의 이윤율은 오히려 급속도로 떨어졌다는 사실을 우리는 과연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 ‘모순’에 담긴 의미는 무엇일까? 브레너의 날카로운 눈길이 머무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신경제 기술에 의해 창출될 수 있는 이윤에 대한 기대 때문에 주식시장이 투자자금을 기술, 미디어, 통신, 즉 이른바 TMT산업에 체계적으로 잘못 쏟아부었다는 것. 결국 90년대 중반 이후 투자 붐의 비밀은 주식시장이 제공한 거짓된 정보로 기업들이 거의 공짜로 자금을 조달했다는 데 숨어 있다는 게 브레너의 생각이다.
“주식시장이 가장 잘 알고 있다”는 속설에 대한 브레너의 정면도전인 셈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역사상 전례없는 투기적 거품이 남긴 추한 잔해가 아닐까? 거품이 꺼진 2000년 이후 과잉설비와 이윤율 하락 속도가 더욱 빨라지고 있다는 게 바로 그 증거다.
주가상승이 경기를 과열시켰던 바로 그 메커니즘이 주가하락과 함께 경기를 더욱 하강시키고 있다는 사실에서 눈을 뗄 수 없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그의 말대로 “필름은 거꾸로 돌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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