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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경기부양, 약인가 독인가
[커버] 경기부양, 약인가 독인가
  • 이원재 기자
  • 승인 2003.02.1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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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소비 둔화되자 목소리 높아져… 전문가들 “부작용 우려 커 시기상조” 지적

경기둔화가 현실화하고 있다는 의견은 정책당국쪽에서도 흘러나오고 있다.
한국은행 박승 총재는 2월6일 “경기가 예상보다 둔화될 것”이라면서 올해 연간 경제성장률 전망을 애초 5.7%에서 5.5%로 낮춰 잡았다.
국책연구원 한국개발연구원(KDI)도 같은 날 월간경제동향을 통해 “전반적인 경기가 둔화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국내 소비다.
한국은행은 6일 콜금리 목표를 현재의 4.25%로 유지하겠다고 발표하면서 “민간소비는 크게 둔화되고 있으며 이러한 추세는 대내외 여건의 불확실성 증대 등으로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라고 우려를 나타냈다.
실제로 산업자원부에 따르면, 주요 백화점 판매액은 지난해 10월 전년 대비 11.8% 증가했던 것을 정점으로, 11월에는 -1.3%, 12월에는 -13.8%로 큰 하락세를 보였다.
소비재 판매액 역시 11, 12월 두달 연속 하락했다.
현재와 미래의 생활형편에 대한 소비자들의 판단을 반영하는 @소비자태도지수는 지난해 4분기 1년 만에 처음으로 ‘낙관’과 ‘비관’을 가르는 경계선인 50선 아래로 떨어졌고, 올해 1분기에도 50선을 밑도는 수준이라고 삼성경제연구소는 밝혔다.



3단계 경기부양 시나리오 소문도

일이 이렇게 되자 정부가 나서서 경기를 조기에 부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기 시작한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기업의 체감경기를 보여주는 @@기업경기실사지수(BSI) 2월 수치가 15개월 만에 최저치라고 발표하면서 정부가 내수부양책에 적극적으로 나설 때라고 주장했다.
정부 한쪽에서도 조기 경기부양론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전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최근 “최근의 경제상황이 애초 전망보다 좋지 않다”면서 경기가 더 나빠지면 재정 조기 집행 등의 수단을 통해 경기 떠받치기에 나서겠다는 뜻을 비쳤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가 가계 대출 억제정책의 부작용을 지적하면서 완화 검토를 시사하자 시장의 경기부양 기대는 더욱 커졌다.


금융시장에서는 정부가 이미 3단계 경기부양 시나리오를 만들어놓았다는 소문까지 떠돌았다.
사회기반시설 등에 대한 재정지출 조기집행, 금리인하, 국채 발행을 통한 @@@추경예산 편성으로 이어지는 강도 높은 부양책이 준비되고 있다는 얘기다.
당사자인 재경부는 공식적으로 조기 경기부양론을 일축하고 있지만, 내수소비 위축에 속이 탄 기업쪽에서는 여전히 경기부양을 부추기고 있는 분위기다.
경제 일간지들을 중심으로 한 일부 언론들도 이런 조기 경기부양론에 합세했다.


그러나 많은 경제 전문가들은 경기부양론에 대해 비판적이다.
섣불리 실행했다가는 낭패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나 요즘같이 미국의 이라크 공격이나 북한 핵문제 논란 등 해외 환경의 불확실성으로 인한 불안심리가 클 때는, 괜히 돈만 쏟아붓고 효과는 거의 보지 못하는 실패한 정책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다.


일단 첫단계로 꼽히는 재정지출 조기집행은 도로나 다리와 같은 대형 공공 공사를 앞당겨 시행하는 방법으로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방안은 어차피 올해 집행될 재정자금을 몇달 앞당겨 사용하는 ‘조삼모사’ 방식의 부양책에 지나지 않는다.
대우증권 김영호 투자전략팀장은 “수요를 몇달 앞당기는 것만으로 시장 심리를 반전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게다가 최근 몇년 동안 정부는 항상 연초에 “경기위축에 대비해 재정지출을 조기집행할 것”이라는 발표를 했지만 결국 자금은 조기집행되지 않았던 전력이 있다.
그래서 이는 단순한 ‘립 서비스’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자칫하면 불경기에 고물가만 초래

시장에서 정부의 2단계 경기부양책이라고 알려진 금리인하는 좀더 강력한 정책이기는 하다.
그러나 문제는 부작용이 훨씬 클 수 있다는 것이다.
미래에셋증권 류승선 이코노미스트는 “금리인하는 무차별적으로 소비심리를 부추겨서 지난해와 같은 집값 폭등 사태를 빚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가뜩이나 들썩이고 있는 물가를 자극해 불경기와 높은 물가라는 최악의 조합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몇달 동안 가계 대출을 억제하면서 간신히 소비심리 과열을 막고 집값을 안정시켜놓았는데, 지금 섣불리 금리인하를 했다가 그동안의 노력이 공염불이 돼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추경예산 편성은 정말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최후의 대책이다.
정부가 국채를 발행해야 하므로 균형재정을 포기하고 적자로 돌아서야 한다.
나라살림의 기조를 통째로 바꿔야 한다는 얘기다.


물론 요즘같이 자꾸만 심리가 악화할 때 정부가 뭐라도 대책을 내놓으면 효과는 있을 것이다.
당장 공공건설 일정을 앞당기면 건설회사들이 공사일정을 앞당기고, 건설현장의 일용직 노임을 더 앞당겨 지급하고,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일용직 노동자들이 소비를 늘리면서 밑바닥 소비심리를 조금이라도 호전시킬 수 있을지 모른다.
이덕청 LG투자증권 금융시장팀장은 “상반기가 워낙 소비가 위축된 시점이니, 공공건설 지출 확대 등을 통해 경기하강 속도를 늦추면서 경기가 좋아질 때까지 완충 역할을 할 수는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금리를 낮추거나 가계 대출 억제를 완화하거나 하면 당장 소비심리는 어느 정도 나아질 것이다.
기업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특소세 추가 감면, 가계 대출 억제 완화, 신용카드 현금 대출 규제 완화 등을 통해 시중에 돈을 풀어 얼어붙은 소비심리를 달랠 수도 있을 것이다.
정책이란 게 단기적으로는 가뭄에 단비같이 달콤하니 기업들과 일부 언론이 이렇게 정부에 돈을 풀라고 아우성인 것이다.


그러나 경제 전문가들이 정말로 걱정하는 것은 미국의 이라크 습격과 북한 핵문제 해결 이후다.
박승 한국은행 총재는 미국의 이라크 공격 국면이 지나고 나면 하반기부터 경기가 회복될 것으로 본다며 올해 경제성장률을 5.5%로 예상하고 있다.
하지만 많은 금융시장 참여자들은 이는 쉽지 않은 목표라고 전망한다.
재경부는 올해 성장률 예상치를 5%대라고 보고 있지만, 재경부 안에서조차 이를 비관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이런 낙관론에는 국제정치의 불확실성이 제거되면 세계경기가 바로 회복세로 접어들 것이라는 가정이 깔려 있는데, 이는 어쩌면 희망사항일 뿐일지 모른다는 게 비관론자들의 견해다.



유혹을 참아내고 실탄을 아낄 때

주식시장에서는 이미 “미국의 이라크 공격 이후에도 여전히 경기회복은 어려울 것”이라는 논의가 불거지고 있다.
지금 시장에서는 미국-이라크 전쟁이라는 불확실성만 제거된다면 바로 경제회복이 시작될 것이라는 기대가 지배적이지만, 미국 경제가 이라크 공격 뒤에도 생각보다 더디게 회복될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메리츠증권 고유선 이코노미스트는 “미국의 경기선행지수들은 현재 정점이거나 하강기를 거치고 있는 중이라, 올해 하반기쯤의 경기를 좋게 보기 힘든 상황”이라고 주장했다.
한국 경제에서는 여전히 내수를 통해 경기둔화 충격을 막는 정도는 할 수 있어도, 완연한 성장으로 돌아서려면 역시 수출이 대폭 늘어나면서 앞장서줘야 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좋지 않은 신호다.


정부가 만일 당장 기업들과 일부 언론의 아우성을 방패삼아 돈을 풀고 나선다면, 단기적으로 경기둔화 속도를 늦춰볼 수는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랬다가 정작 하반기에 경기상황이 더 나빠지면, 그때 가서 집행할 실탄이 없어 낭패를 볼지 모른다.
이미 정부가 나설 여지는 많지 않다.
금리는 매우 낮은 수준이라 더 낮추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균형재정까지 포기할 생각이 아니라면 재정집행을 상반기로 앞당겼을 때 하반기에는 끌어쓴 만큼 덜 집행해야 한다.
박승 한국은행 총재조차 “불확실성으로 인해 전세계 경기가 둔화된 상황에서 우리만 부양에 나설 경우 성장에는 별 도움을 주지 못하고 경상수지만 악화될 것”이라고 했다.


지금은 유혹을 참아내고 실탄을 아낄 때다.
아무리 불안해도 표적을 확인하고 장전만 해둬야 한다.
섣부른 경기부양책은 약이 아니라 독이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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