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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국가채무 민간방식으로 푼다
[글로벌]국가채무 민간방식으로 푼다
  • 이승철 기자
  • 승인 2003.02.2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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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국가부도에 기업 도산절차 도입 추진… 합의 도출 1년이상 걸릴듯 역사적 경험에 따르면, 오늘날 세계 금융시스템 밑에서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금융 위기를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특히 세계 금융자본의 공략대상인 개발도상국에서 금융 위기는 이제 보편적 현상이기까지 하다.
1970년대 후반 남미 외채 위기를 비롯해, 80년대 초반 3차 세계 외채 위기, 80년대 후반 미국 자본시장 폭락, 91년 인도 국제수지 위기, 92년 이른바 ERM(유럽환율조정기구) 위기, 90년대 중반 멕시코 페소화 위기와 잇따른 남미 외환 위기, 97년 한국 등 동아시아 외환 위기, 98년 러시아 위기, 90년대 후반 브라질 헤알화 붕괴와 남미지역 확산, 2000년 터키 위기, 그리고 현재진행형인 아르헨티나 경제 위기까지.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남미 국가의 사례에서 보듯이, 해묵은 외채 문제가 전세계의 골칫덩이로 등장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에 따라 국가의 외채 문제를 개별 기업의 워크아웃이나 도산 절차와 같은 민간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시도가 국제통화기금(IMF)을 중심으로 급물살을 타고 있다.
이른바 ‘국가채무 조정’이 그것이다.
이는 2000년 11월 앤 크루거(68) IMF 수석 부총재가 처음 공론화한 발상이다.
지난해 말 IMF의 공식안이 발표된 데 이어, 2월20~21일 독일 베를린에서 첫 세미나가 개최됐다.
앤 크루거 부총재는 세계적 여성 경제학자로, 70년대 한국 등 개발도상국의 경제성장 과정에 애정어린 관심을 줄곧 견지해온 보기 드문 인물이다.
‘디폴트만은 막자’ 새로운 대안 부상 그의 문제의식은 이렇다.
금융 위기와 또 다른 위기 사이의 시간 간격이 날로 좁아지고 있다.
주목할 사실은 금융 위기의 발생 횟수가 증가하지 않더라도, 주변국가 사이의 전파력이 점점 더 강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과거처럼 대규모 재정적자나 왜곡된 금융시스템에 만성적으로 시달리지 않는 나라까지도, 외부 상황이 악화되면 언제든지 금융 위기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그 대표적 사례로 90년대 말 우리나라와 말레이시아 등 동아시아 외환 위기를 꼽을 수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한가지 지상명제가 도출된다.
어떤 경우에도 디폴트(채무불이행 선언)만은 막아보자는 것이다.
기업에 돈을 빌려줬다가 돌려받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최악의 경우 회사를 매각한 금액에서 적어도 일부분은 돌려받을 수 있다.
하지만 국가채무 변제를 위해 국가를 매각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금까지 채권자가 개발도상국에 빌려준 국가채무에 대해 꽤 안심할 수 있었던 이유는, IMF로 대표되는 세계통화 체제의 개입 덕분이었다.
그러나 지난 20년간의 경험을 보자면, IMF의 개입이 국가부채를 회수할 수 있는 보증수표이기는커녕 외채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하는 경우가 잦아지고 있다.
IMF 구제금융을 통해 당장 급한 불을 끄더라도, IMF가 요구하는 고금리, 긴축 정책 때문에 디플레이션에 시달리기 십상이다.
이는 외부 투자자를 더욱 불안하게 만든다.
또 IMF 일정에따라 금융시장 개방이 가속화하면서, 자국 통화 가치가 하락하고 외생 변수에 더 많이 노출되는 부작용을 겪는다.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른 국가채무 조정을 향한 IMF의 접근방식은 두가지다.
하나는 법률적 접근방식이다.
전세계 대다수 국가의 채권자들을 하나로 묶는 ‘국가채무조정장치’(SDRM)라는 법적 틀을 제정하는 것이다.
SDRM은 세가지 내용으로 요약된다.
첫째, 신흥시장에 투자하는 채권자는 이후 75% 이상의 다수 채권자가 채무국의 채무 조정안에 합의한다면 이에 따르기로 사전에 명시적 서약을 해야 한다.
둘째, 채무국은 금리를 낮추거나 상환기간을 연장하는 등의 채무 조정안이 만들어질 때까지, 모든 기존 부채 상환일정을 잠정 중단시킬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채무국이 채권자의 이익을 해치지 않는 방향으로 대내외 경제정책을 충실히 시행한다는 단서가 붙는다.
마지막으로 채무 조정안이 논의되고 시행되는 동안, 채권자들은 채무국가의 금융시장 안정을 위한 정책자금을 추가로 공여해야 한다.
이 추가 공여자금은 나중에 기존 부채보다 반드시 우선 변제돼야 한다.
또 한가지는 ‘집단행동조항’(CAC)으로, 일종의 계약적 접근방식이다.
상대적으로 엄격한 법률적 접근에 얽매이는 것을 꺼리는 미국이 적극 주장하고 있다.
이는 채무 조정이 신속히 이뤄질 수 있도록 특정채무에 대해 소수 채권자의 소송제기 등 개별적 자구행동을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것이다.
신용도 낮은 나라 돈 빌리기 더 막막? 앤 크루거 부총재는 “채무 조정 방식이 도입되면 채권자들은 채무국의 재정금융 정책 및 환율 정책뿐 아니라 은행 개혁, 국내 지불시스템 통합, 국내 파산체제 운용 등의 문제에도 더욱 관심을 쏟게 될 것”이라고 긍정적 변화 가능성을 역설했다.
하지만 이를 위해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새 제도에 대한 선진국의 동의를 얻는 작업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선진국 자본시장의 개별 경제 주체들을 설득하기란 더 어려워 보인다.
논의의 수혜자인 개발도상국으로서도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할 ‘주권 침해’의 부담감을 떨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민간 채권자 대 국가 사이의 채무관계를 IMF가 개입해 조정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라는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이에 대해 앤 크루거 부총재는 “IMF는 채무관계를 재조정하는 협상 과정만을 강제할 뿐, 재조정 결과를 강제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며, “일단 다수 채권자의 합의가 이뤄지면, 집단행동조항(CAC)을 통해 소수 채권자까지 법적으로 강제하겠다는 것”이라고 논박한다.
또 다른 주요 논란거리는 ‘채무 조정 대상국은 주요 채무 변제를 위해 석유, 광물과 같은 국가자원의 일부분까지 강제로 처분해야 하는 의무를 지는가’라는 것이다.
이는 채권자쪽의 중대한 관심사다.
이에 대한 답은 “그렇다”쪽으로 모아지고 있다.
IMF의 제안은 이제 출발 단계이며, 전세계의 합의를 이루기까지 1년 이상의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다.
국가 채무 조정 방식이 본격 시행되면 투자가는 신용도가 낮은 국가에 대한 투자를 꺼릴 것이라거나 자금 조달 비용이 급등할 것이라는 등 부작용 문제도 꾸준히 제기된다.
IMF는 “과거 영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사례를 보면, 민간시장에서 CAC는 채권 금리결정에 어떠한 체계적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고 항변하지만, 국가신용도에 따라 희비가 크게 엇갈릴 것으로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무디스 등 몇몇 주요 신용평가기관의 영향력이 더욱 굳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높아지는 가운데, 이에 대한 반발로서 개도국 중심으로 새로운 신용평가기관을 설립하려는 시도가 본격화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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