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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케이스스터디] 맹목적 낙관주의를 경계하라
[경영케이스스터디] 맹목적 낙관주의를 경계하라
  • 양우성/ 일본 TMA 부사장
  • 승인 2003.02.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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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송금 파문, 위험요소 과소평가한 탓… 영국 BP, ‘비판적 참모’ 제도적으로 보장 얼마 전 일본으로 출장을 갔다가 현대그룹의 대북송금 파문을 뉴스로 접했다.
설마하던 소문이 사실로 다가오자 당혹스러움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일본인 사업 파트너들에게 모국의 나쁜 뉴스를 자세하게 설명하는 일은 정말 곤혹스러웠다.
이번 파문은 국내에서의 파장뿐 아니라 국제 외교무대와 세계시장에서도 그 파급효과가 적지 않을 듯 싶다.
“어떻게 하면 좋은 의사결정구조를 만들 수 있을까”라는 문제를 주 관심사로 다루고 있는 필자의 시각에서 보면 이번 비밀 대북송금 파문도 전형적으로 나쁜 의사결정구조가 지닌 문제점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아마도 역설적으로는 이번 대북송금 파문이 ‘좋은 의사결정’을 만드는 데 필요한 또 하나의 교훈을 주는 유익한 ‘반면교사’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이번 대북송금 스캔들에서 가장 크게 드러난 문제점은 ‘한국 정부와 대기업의 불투명한 의사결정 관행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뿌리깊은 문화’라는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과 그 측근들은 ‘통치행위’라는 전제군주 시절이나 파시스트 정치문화에서 통용되던 낡은 이론을 들먹이면서 자신들의 의사결정을 합리화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현대 자유민주주의 정치를 이념적 뿌리로 하는 국가나 국내 중산층에게는 그다지 설득력있는 변명이 되지는 못한다.
현대 민주주의 국가와 기업에 요구되는 기본요건은 ‘투명한 의사결정’이기 때문이다.
‘통치행위’로 합리화, 설득력 떨어져 한때 대한민국의 간판급 기업이었던 현대그룹은 대북사업의 독점권을 획득하기 위해 5억달러라는 거금을 선뜻 북한에 지불했다.
그것도 정상적인 이사회의 의결이나 주주총회의 승인도 없이 이뤄진 일이었다.
공개 주식시장에 상장된 회사로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시장경제의 건전한 발전과 정착, 공정한 경쟁의 룰을 만들고 집행해야 할 정부의 최고 수반인 대통령이 현대그룹의 이러한 불투명한 의사결정을 오히려 보호하고 두둔하려 했다.
이것은 정부의 역할에 대한 기본적 신뢰마저 무너뜨리는 패착이다.
김대중 대통령과 당시 현대그룹 총수는 왜 이런 어이없는 의사결정을 내렸을까? 여러 가지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자신들이 채택하려는 의사결정 대안의 긍정적 면만 보려는 경향, 즉 ‘맹목적 낙관주의’(wishful thinking)의 함정에 빠졌기 때문이다.
이번 대북송금 파문의 당사자들은 불법적인 대북송금과 밀실거래가 사후적으로라도 사법적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위험요소를 과소평가하거나 외면했다는 데 근본적 문제가 있다.
만일 당시 청와대 참모 중 한사람이 “나중에 불법 논란의 소지가 있습니다.
대통령 본인과 우리 국민의 정부에 정치적으로도 커다란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라며 ‘부정적 의견’을 적극적으로 직언했다면 김대중 대통령도 한번쯤 재고했을지 모른다.
마찬가지로 현대그룹 내부에서도 “회장님, 대북사업 독점권을 획득하는 것도 좋은 사업기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방식으로 송금하고 거래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나중에 사법처리의 위험도 있고 송금방법 등이 나중에 문제돼 국내 정치의 소용돌이에 빠져버려 자칫 사업 자체가 무산되거나 실패할 위험도 있습니다”라며 ‘부정적 의견’을 강력하게 제시하는 참모나 이사가 의사결정에 참여했더라면 이렇게 어리석은 거래구조를 만들고 스스로 함정을 파는 우를 범하는 일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김대중 대통령 주변과 현대그룹 총수 주변에는 부정적 의견이나 비판적 대안을 제시하는 ‘제도화된 비판적 참모’가 존재하지 않은 셈이 된다.
전지전능한 최고 의사결정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의사결정자들은 상황을 오판하거나 대안을 잘못 선택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선진화된 기업이나 조직들은 의사결정자에게 나쁜 소식과 듣기 거북한 의견을 개진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을 제도화시켜 놓는다.
영국의 대형 석유업체인 브리티시 피트롤리엄(BP) 이사회에는 의무적으로 최고경영자나 다수 이사의 의견에 반대시각이나 비판의견을 준비하고 그 논리적 타당성을 보여주어야 하는 이사가 별도로 지정돼 있다.
최고경영자나 다른 이사진들이 맹목적 낙관주의에 빠질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 만든 제도적 장치다.
우리 역사에서 살펴보면 우리는 이미 오래 전부터 훌륭한 의사결정시스템을 만들고 활용해왔다.
가령 '조선왕조실록'에는 군주의 의사결정을 비판하거나 다른 의견을 제시하고 심지어 꾸짖는 신하들이 무수하게 나온다.
정도전이 그 기틀을 다져놓은 조선왕조의 최고 의사결정시스템이 그런 문화를 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사간원 같은 제도가 있었던 덕도 크지만, 선비의 기본적 도리이자 자질이 최고 의사결정자인 군왕의 잘못된 의사결정을 바로잡는 것이라는 신념이 정치문화로 자리잡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한국식 ‘블랙박스’ 시스템 뜯어고쳐야 현대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에서는 행정부를 의회가 견제하고, 여당을 야당이 견제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현대적인 민주공화국을 수립한 이후에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조선왕조실록'만큼 유리알처럼 투명한 대통령의 의사결정 회의록이나 일지를 접해본 적이 없다.
그저 과거 핵심 권부에 있던 정치인이나 청와대 출입기자의 입과 글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믿거나 말거나 식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우리 기업들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상법에 의하면 기업의 중요한 경영상 안건은 이사회 회의록을 작성해 기록을 남기도록 규정돼 있다.
그러나 어느 누가 감히 회장이나 대표이사의 의사결정에 제동을 걸거나 비판할 수 있는가? 이것은 마치 블랙박스와 같다.
항공기의 블랙박스는 사고가 발생한 다음에 전문가들이 분해해 정확한 비행 관련 기록을 확인한다.
하지만 한국의 대다수 기업이나 정부라는 블랙박스는 도무지 뜯어볼 수 없는 영원한 침묵의 상자와 같다.
이런 의사결정 문화에 너무도 익숙한 한국의 기업경영자와 정치인들은 자신도 모르게 불법의 지뢰밭에 발을 디디고, 자신의 의견에 반대되는 정보와 대안을 제도적으로 봉쇄하는 의사결정 체제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번 대북송금 파문은 이런 문화적 토양 아래에서 자라난 한국식 블랙박스 시스템의 표피적 현상에 불과하다.
이제 우리 기업과 정부도 강제적으로 반대의견자를 지명해서 그로 하여금 최고통치자나 최고경영자의 의견, 주장과 반대되는 의견과 논리를 개발하도록 하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그렇다면 최소한 최악의 결정은 피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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