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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케이스스터디]금융지배 둘러싼 끝없는 집착
[경영케이스스터디]금융지배 둘러싼 끝없는 집착
  • 이코노미21
  • 승인 2003.03.1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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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 시중 은행 인사권 장악… 무책임 경영·경쟁력 약화로 이어져 국가와 기업 엘리트의 관계 ② 국가와 기업의 상호관계라는 차원에서 보면 우리나라의 현대경제 역사는 큰 변화를 거쳤다.
1980년대까지는 국가가 일방적으로 시장에 군림하는 수직적 관계였다.
그러나 80년대 경제자유화와 민주화 바람이 불면서 기업의 위상이 점진적으로 높아져왔다.
이것은 시장경제의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그동안 과도하게 국가가 시장에 개입해온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해할 수 있다.
현대 시장경제제도를 살펴보면 국가와 기업의 관계는 협력과 긴장이 동시에 상존하는 관계다.
국가와 기업은 때로는 힘과 능력, 자원을 서로 나누며 찰떡궁합인 양 협력하기도 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긴장과 갈등의 관계로 변화하는 예가 많다.
결국 경제현상을 순수한 경제학의 시각에서 한발짝 비켜서서 살펴보면, 한 나라의 산업화나 경제발전은 국가 엘리트와 기업 엘리트의 상호작용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한국 경제의 산업화도 역시 국가 엘리트와 기업 엘리트의 애증관계로 볼 수 있다는 이야기다.
대한민국의 국가 형성 초기단계에 이승만 정부는 국가가 금융자본을 강하게 장악함으로써 민간기업을 통제하길 원했다.
이승만 정부가 추진한 ‘수입대체 산업화’ 전략과 귀속재산의 배분, 원조경제체제 구축, 6·25전쟁 이후의 전후복구사업 등은 역설적으로 강한 재벌체제를 탄생시키게 했다.
시중은행 민영화로 기업 엘리트 잠시 ‘숨통’ 민간 기업 엘리트가 성장하면 국가의 지배와 통제를 거추장스럽게 여기기 마련이다.
국가기구 안에서도 금융부문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다툼이 일어나기도 한다.
가령 1956년 당시 재무부는 한국은행법과 은행법을 개정해 시중은행 감독권을 재무부로 이관시키려 했다.
하지만 당시 한국은행의 엘리트들은 이에 저항했다.
이 과정에서 자유당 지도부는 김유택 한국은행 총재를 자유당에 입당시켜 저항을 무마하려 했지만, 이것이 뜻대로 되지 않자 김유택 총재를 해임한다.
국가기구 내부에서 재무부와 한국은행의 지배권을 둘러싼 대립과 마찰이 커지는 가운데, 산업자본으로 성장한 당시 민간 대기업들은 원활한 자금마련을 위해 시중은행 민영화를 기대했다.
그런 흐름에서 시중은행이 민영화된다.
시중은행의 민영화 초기에는 국가 엘리트들의 희망을 반영해, 1인 입찰한도를 5주 이내, 양도불가의 조건으로 추진했다.
시중은행의 주식이 특정 개인이나 기업에 편중되는 것을 막아서, 계속해서 국가가 시중은행을 통제하겠다는 의지를 관철하려 한 것이다.
이런 조건으로는 입찰이 성공할 수 없었다.
1인당 입찰한도를 10주로 늘리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계속 유찰이 거듭됐다.
결국 주주의 대량주식 보유가 가능하도록 조건이 완화되면서, 시중은행의 주인은 재벌과 개인 거부들로 바뀌게 된다.
조흥은행이 민덕기에게, 흥업은행(후에 한일은행)이 삼성의 이병철에게, 상업은행이 대한방직의 설경동에게, 제일은행이 삼호방직의 정재호에게 최종 불하되게 된 것이다.
시중은행이 민영화되자, 기업 엘리트들은 국가 엘리트들의 제재로부터 다소 숨통이 트였다.
하지만 국가 엘리트들의 반발이 곧 시작됐다.
국가 엘리트들은 약화된 시중은행에 대한 지배력을 보완하고자 산업은행 등 특수은행을 설립했다.
산업은행은 급속하게 금융자본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역할을 증대시켰다.
이렇게 국가 엘리트와 기업 엘리트들이 금융자본에 대한 지배력을 놓고 벌인 술래잡기는 끈질기고 치열했다.
이승만 정부는 국가가 산업화를 주도하고자 금융자본을 지배하고, 금융지배를 통해서 산업자본을 지배했다.
하지만 산업화전략 자체가 갖는 한계 때문에 국민들은 여전히 빈곤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수입대체 산업화’ 전략이 낳은 한계였다.
결국 경제적 빈곤도 해결하지 못한 상태에서 장기집권을 추구한 이승만 정부는 4·19혁명으로 붕괴됐다.
그러나 시민혁명의 성공으로 급속하게 성장한 국민들의 기대의식과 실업의 지속 등 경제사회적 모순은 장면 정부의 국가능력을 약화시켰다.
결국 6·25전쟁으로 과도하게 성장한 군부 엘리트들이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키자 장면 정부는 힘없이 붕괴된다.
박정희 정부는 다시 국가가 금융을 지배하게끔 만들었다.
1962년 ‘금융기관에 관한 임시조치법’을 제정해, 한국은행 총재를 포함한 금융기관의 인사권을 정부, 즉 재무부로 귀속시킨다.
이 법은 82년 말까지 존속했다.
이것이 폐지된 이후에도 정부의 ‘행정지도’에 의해 일반 시중은행 인사권은 국가 엘리트의 영향 아래 놓인다.
박정희 대통령은 수출주도 경제성장 전략을 채택하면서 과거 이승만 정부의 수입대체 산업화 전략의 한계를 극복했다.
경제는 고도성장의 성과를 거두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금융자본은 철저하게 산업화의 ‘도구’로 제한돼, 금융자본 자체의 발전과 성숙은 더뎠다.
산업은행 사례, 해외 집권자들도 벤치마킹 따지고 보면 은행의 수익성과 재무건전성보다는 청와대의 눈치만 살피는 시중은행장들의 관행은 ‘국가의 금융지배’라는 역사의 산물이다.
국가 엘리트가 금융지배에 대한 끈을 놓지 않으려는 강한 집착이 주인의식 없는 무책임한 은행 경영진들을 양산한 것이다.
이것이 결국 시중은행들의 경쟁력을 약화시켰다.
지난 97년 외환위기 때 한국의 금융시스템이 속절없이 붕괴한 원인이 이런 역사들이었던 것이다.
최근 새로 출범한 노무현 정부에서도 국가 엘리트들은 정부가 지분을 보유한 은행의 은행장 선임에 강한 의욕과 집착을 보여주었다.
이것도 역시 틈만 보이면 지배력을 확장하려는 국가 엘리트들의 속성이 그대로 드러난 사례다.
필자는 10여년 전 구소련에서 독립한 중앙아시아의 신생국에 대한 경제개발계획 수립 작업에 참여한 적이 있다.
신생국에 새로 당선된 대통령은 산업화에 필요한 자본을 동원하기 위해서 공기업을 민영화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떻게 하면 과거 국유기업에 대한 강한 지배력을 유지할 수 있을까”만을 고민했다.
그는 결국 한국의 산업은행을 벤치마킹해, 민영화 이후에도 산업은행을 통해 기업에 대한 지배력을 일정 부분 유지하는 대안에 매력을 느꼈다.
집권 엘리트들이 시장 지배력에 집착을 보이는 것은 과거 공산주의 계획경제 시절이나 자유시장경제로 전환한 이후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양우성/ 일본 TMA 부사장 겸 CEO yang@tmbiz.com 용어설명/수입대체 산업화전략 국가가 관세나 수입의 양적 제한을 통해서 공업제품의 국내시장을 격리시키고, 각종 지원조치를 통해 국내 공업을 육성해 이를 통해 수입을 대체하려는 전략이다.
주로 중남미 개발도상국에서 채택한 성장전략으로 이승만 정권이 채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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