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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 케이스스터디]독재가 낳은 기형아, 사채시장
[경영 케이스스터디]독재가 낳은 기형아, 사채시장
  • 이코노미21
  • 승인 2003.03.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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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자금수요 지하금융 이용해 충당… 양성화된 단자회사, IMF 위기 불러 |국가와 기업 엘리트의 관계(3)| 1997년의 외환위기. IMF의 구제금융을 받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주식회사 대한민국이 부도날 상황에 처했던 위기였다.
그 위기의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하지만 위기의 방아쇠를 당긴 것은 종합금융회사의 무분별한 해외투자, 엄밀히 말하면 무모한 투기였다.
바로 그 종합금융회사는 사실 박정희 정부의 과도한 금융지배의 부산물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3년부터 의욕적으로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했다.
5·16군사쿠데타 이후 강화시킨 국가의 금융지배력을 수단으로 삼아, 박정희 정부는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동원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의 금융지배는 여러 문제들을 낳았다.
첫째 문제는 국가가 금리를 통제하면서 시장의 원리가 작동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제도권 금융과 비제도권 금융의 돈값의 차이, 즉 금리격차가 커진 게 큰 문제였다.
둘째 문제는 국가의 통제를 벗어난 비제도권 금융, 즉 사채시장 역시 꾸준히 성장해 나갔다는 점이다.
세번째 문제는 기업들의 재무구조가 자기자본보다는 외부자금에 의존하는 구조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즉 기업의 재무구조에서 부채 비중이 늘어남에 따라 기업의 수익성도 떨어지고, 한국기업의 경쟁력이 전반적으로 취약해졌다.
2차 경제개발계획 기간, 사채시장 쑥쑥 우선 국가의 과도한 금리규제로 인해 시중은행의 금리와 사채시장의 금리격차가 무척 컸다.
가령 1963년의 은행의 실질금리(명목금리에서 물가상승률을 뺀 수치)는 연 -13.5%였는데, 당시 사채시장의 금리는 연 52.5%가 넘었다.
이러한 금리격차는 꾸준히 지속됐다.
1965년 12.3%, 1966년 11.5%, 1967년 10.4%로 내려가다가, 1968년부터는 9.7% 등 1971년까지 은행의 실질금리가 연10%를 밑돌았다.
반면 사채시장의 금리는 1965년 58.92%, 1966년 58.68%, 1967년 56.52%, 1968년 56.04%, 1969년 51.36%, 1970년 50.16% 등 줄곧 50%를 웃돌았다.
은행금리와 사채시장의 금리 차이가 크다는 것은 바로 한국경제의 금융수요가 늘 금융공급보다 많았다는 의미다.
동시에 기업들의 자금수요를 국가가 채워줄 수 없었다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국가는 이런 자금 부족분을 외채조달을 통해 보충했다.
외채 규모도 만만치 않았다.
예를 들면 1964년 은행권이 공급한 기업자금규모는 56억원이고, 사채시장이 맡은 부문이 39억원, 외채부문이 27억원이었다.
그러다 1차 경제개발계획이 끝난 1967년에는 은행이 636억원, 사채시장이 191억원, 외채가 646억원으로 은행과 외채가 압도적으로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두 부문 모두 국가가 강력하게 통제하던 부문이라, 이때만해도 사채시장의 부작용이 국가엘리트나 기업엘리트 모두에게 그리 부담스럽지 않았다.
그러나 2차 경제개발계획 기간에는 사채시장의 성장이 두드러진다.
1968년 은행부문이 1156억원, 외채부문이 1087억원, 사채시장이 378억원을 공급했다.
그러다 1970년에는 은행부문이 1423억원, 외채부문이 1463억원, 사채시장이 888억원을 공급해 사채시장이 급성장했다.
1971년에는 은행부문이 1828억원, 외채부문이 1371억원, 사채시장이 1135억원을 공급해 사채시장이 기업의 자금조달창구로 무시하지 못할 위치를 차지했다.
국가가 금융시장을 지배하려고 다양한 노력과 제도를 동원했지만, 오히려 국가의 지배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사채시장, 지하금융시장을 강력하게 번성시킨 셈이었다.
국민경제가 고도성장의 가도를 시원하게 달릴 때에는 이런 금융부문의 문제점들이 대수롭지 않았다.
그러나 경제가 침체기를 맞자 이런 모순들이 갑자기 부각됐다.
바로 박정희 정부의 2차 경제개발계획이 끝나갈 무렵이 그런 때였다.
동전의 양면처럼 수출중심의 고도성장전략과 외채중심의 자본조달 전략은 여러 대가를 치러야 했다.
세계금융시장의 고금리 대두, 변동환율제도의 등장, 개도국에 대한 보호무역장벽 증가, 일본의 엔화하락에 따른 한국기업의 중간재·원료구입비용 증가 등이 그것이었다.
결국 기업들은 수익성하락을 맛보는 동시에 은행, 외채, 사채시장 등 3중의 외부금융 부담을 겪어야 했다.
특히 연 50%에 육박하는 사채시장의 고금리는 기업들을 부도위기로 몰아갔다.
재벌, 종금사 등 제2금융사 설립 잇달아 처음으로 중대한 경제위기에 빠진 박정희 대통령과 경제관료들은 소위 ‘8.3조치’라는 기업의 사채금융 탕감정책을 선택했다.
핵심적인 내용은 기업들이 사채금융사용 내역을 신고하면, 신고한 기존 사채는 3년거치 5년 분할상환의 조건으로 갚아나가도록 만들어주고, 금리도 연 16%로 대폭 인하한다는 것이었다.
또는 사채전주에게 선택권을 부여해서, 사채업자가 기업에 꿔준 자금을 해당기업의 자본금으로 출자전환하라는 내용이었다.
기업의 과도한 사채금융 비용을 초헌법적 수단으로 경감시켜주는 정책이었다.
하지만 박정희 정부는 사채업자들을 달랠 제도도 함께 던져주었다.
‘단기금융업법’을 제정해, 대한민국에만 고유한 ‘투자금융회사’라는 단기금융전문기관을 제도화시킨 것이다.
그것은 사채시장이 맡아오던 어음할인 업무를 전담하는 ‘양지로 올라온 사채시장’, 소위 ‘단자회사’라고 불리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1970년대에는 주식매매와 같은 직접금융업무도 허용하는 종합금융회사도 제도화한다.
지하에 있던 사채자금을 제도권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서슬 퍼런 국가도 일정부분을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금융회사들은 대출이자율도 시중은행보다 높게 허용됐고, 소유지분을 엄격하게 제한한 시중은행과 달리 소유권에 대한 규제도 없었다.
자연스럽게 단자회사의 비중이 커져 갔다.
게다가 점차 제2금융권의 지배구조가 변화했다.
재벌들이 투자금융회사 설립과 인수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시중은행에 대한 국가의 지배가 심하니까, 투자금융회사라는 제2금융권에서 재벌들은 자금동원의 자율성을 추구한 것이다.
1980년대 중반에는 투자금융회사와 종합금융사 등 제2금융권의 수신비중이 48%대에 달하면서 시중은행에 버금가는 위세를 차지한다.
결국 제2금융권은 모그룹의 자금조달창구라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이렇듯 국가엘리트는 아무리 금융부문을 통제하고 싶어도 시장원리를 추방할 수는 없었다.
결국 기업엘리트에게 제2금융권의 지배기회만 제공하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은 것이다.
사채시장의 번성과 제2금융권의 탄생역사는 점점 금융자본에 대한 국가엘리트의 지배력이 상대적으로 약해지는 장기적인 흐름의 한 단면이었다.
양우성/ 일본 TMA 부사장 겸 CEO yang@tm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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