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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은행권 체질개선 절반의 성공
1. 은행권 체질개선 절반의 성공
  • 장승규 기자
  • 승인 2003.04.1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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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 사태로 위기처리 능력 가능성 엿봬…수익성 강화, 자율성 확보 시급

SK글로벌 분식회계 사건이 터진 지 한달이 가까워 오지만 금융권은 아직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카드채 부실이라는 메가톤급 악재로 불똥이 옮겨붙어, 금융 시스템 전반의 위기 가능성마저 논의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SK글로벌 사태가 터지자 전에 없이 신속하고 과감하게 대응한 은행들은, 많은 이들에게 강한 믿음을 심어주는 데 성공했다.
IMF 외환위기 이후 놀랍게 달라진 한국 금융의 진면목이 빛을 발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검찰의 SK글로벌 수사결과 발표가 있은 지 이튿날인 3월12일, 주채권은행인 하나은행 김승유 행장은 “분식회계의 책임을 물어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계열사 지분 전체를 담보로 내놓으라고 요구했고, 최 회장측이 이를 받아들였다”고 밝혔다.
채권은행들이 시장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특단의 처방을 밀어붙여 관철시킨 것이다.
13일 SK글로벌에 자금관리단을 전격 파견해 자금줄을 미리 장악했고, 19일에는 채권단 회의를 열어 87.1%의 찬성으로 신속하게 기업구조조정촉진법상의 공동관리에 들어갔다.

한국신용평가 금융팀 허석영 책임연구원은 “이전에는 열흘 걸려도 안 되던 게 하루 만에 진행되는 등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크게 줄었다”며 “채권단의 처리 스피드나 기술이 이전보다 훨씬 개선됐다”고 평가한다.
그동안 은행이 대형화와 외국인 투자자의 참여로 어느 정도 체질개선에 성공한 덕분이다.
채권단 내부의 평가도 긍정적이다.
SK글로벌 채권단 관계자는 “예전에는 주채권은행이 비용과 인력을 투입한 만큼, 채무재조정에서 유리하게 한다든지, 해당 회사를 압박해 비즈니스를 엮는 식으로 대가를 챙기려 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지금은 모든 정보가 공개돼, 채권단 운영이 훨씬 투명하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자평한다.
채권 금융기관간 이해충돌이 적은 것도 빠른 의사결정에 한몫했다.
대출금이 대부분 무역금융으로 나갔기 때문에, 담보권자와 무담보권자의 대립도 거의 생기지 않았다.



주먹구구식 대출 아직 살아 있어

하지만 아쉽게도 평가는 긍정적인 데서 멈추지 않는다.
은행의 위기처리 능력을 평가하기는 아직 이르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크레디트스위스퍼스트보스턴(CSFB) 윤석 전무는 “대형 사건 중에서는 민간은행이 주채권은행을 맡게 된 첫번째 사례”라며 “이제 시작 단계로, 채권단이 제대로 대처하는지는 더 지켜봐야 한다”고 말한다.
SK글로벌의 최종적인 처리방안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3개월간의 실사작업이 끝나봐야 알 수 있다.
진짜 문제는 그때 터질 수 있다.

은행들은 부실 대출 책임에서도 자유롭지 못한 처지다.
SK글로벌의 분식 수법이 채무 잔액증명서를 위조해 대출 잔액을 ‘0’으로 만든 초보적 수준이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은행의 엉터리 대출 심사에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참여연대는 “160조원의 공적자금을 투입해 이뤄낸 금융구조조정에 구멍이 뚫렸다”며 “채권은행들이 어떤 여신심사와 사후관리 과정을 거쳤는지 철저히 밝혀달라”고 금융감독위원회에 조사를 요청했다.
한국신용평가 허석영 책임연구원은 “그동안 주먹구구식 대출, 회사 명성에 의존한 대출이 많이 줄었다고는 해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는 걸 확인시켜줬다”며 “은행연합회의 대출정보 전산망만 확인해봐도 금방 알 수 있는데, 왜 체크하지 않았는지 미스터리”라고 말한다.

물론 은행들도 할 말은 있다.
SK글로벌 채권단 관계자는 “SK글로벌은 AA등급을 받던 우량회사였다”며 “잔액 증명을 위조하리라고 누가 생각 했겠느냐”고 말한다.
이 관계자는 “한두 은행이 SK글로벌이나 회계법인과 공모할 수는 있지만 모든 은행이 공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뭔가 제도적인 허점이 있다고 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IMF 이후 기업 대출시장의 분위기는 이전과 180도 달라졌다.
기업들이 시설 투자를 대폭 줄이고, 은행보다는 이자가 더 유리한 직접금융시장을 활용하기 시작하면서, 공급자 중심 시장에서 소비자 중심 시장으로 바뀐 것이다.
은행의 발언권은 급격히 위축됐고, 오히려 기업이 은행을 선택하는 상황이 왔다.
저금리 탓에 자금 운용에 어려움을 겪던 은행으로서는 더 몸이 달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경쟁이 치열해지면 자연 무리수가 따르게 된다.
채권단 관계자는 “SK글로벌 정도면 혜택을 줘서라도 끌어와야 하는 매력적인 고객”이라며 “최태원 회장이 구속된 뒤에도 신규 대출을 해준 은행이 적지 않을 정도”라고 말한다.

이러한 과당 경쟁의 폐해는 인수합병을 통해, 은행 숫자를 더 줄여야 한다는 주장에 상당한 설득력을 실어준다.
한 외국계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은행 숫자가 절대적 기준에서 많은 건 아니지만, 경쟁이 심한 우리의 특수성을 생각하면 좀더 줄어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대형화를 통해 은행의 경쟁력이 강화돼야, 기업과 대등한 위치에서 ‘건강한’ 긴장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미 세계적 수준으로 성장한 일부 대기업들에 비한다면, 은행의 경쟁력이 한참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취약한 수익 구조와 재무 구조도 은행의 운신 폭을 제약하는 요인 중 하나다.
한국금융연구원 김우진 연구위원은 “여유 자본이 부족한 상황에서 모든 것은 생사의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부실기업을 ‘공동관리’에 넣는 것은 간단하지만, 그렇게 하자면 대출금의 20%를 대손충당금으로 쌓아야 한다.
지금 현실에서 그 정도 충당금을 쌓고도 흑자를 낼 수 있는 은행은 많지 않다.
김우진 연구위원은 “그동안 선진 금융 기법이나 스코어링 시스템은 대부분 도입했지만, 누적된 과거 부실이 깨끗하게 정리될 때까지는 완전하게 뿌리를 내리기 힘들 것”이라고 말한다.
남아 있는 누적 부실을 신속하게 정리한다면 또다시 공적자금을 투입하는 방법밖에 없다.
현실적으로 어려운 방법이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은행의 수익성을 강화하는 길뿐이다.
김우진 연구위원은 앞으로 2~3년간은 각 은행의 수익성을 강화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말한다.
때문에 그는 합병을 통한 해법에는 유보적인 입장이다.

정부 역시 은행 개혁이 충분하게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데는 동의한다.
금융감독위원회 유재훈 은행감독과장은 “SK글로벌 사태나, 이라크 전쟁, 고유가 같은 돌발변수가 생기면 금방 적자로 돌아설 만큼 수익구조가 취약한 은행이 적지 않다”며 “재무구조 측면에서도 BIS 자기자본비율은 개선됐지만, 외국에 비해 기본 자산은 여전히 낮은 상태”라고 말한다.
그는 “금융은 유리잔과 같다”며 “허약한 부분이 있으면 사소한 외부 충격에도 쉽게 깨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금융산업 전반의 시스템 안정성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진단이다.

‘리스크 관리’는 은행권에서 IMF 이후 수없이 강조한 말이다.
수십억원을 들여 첨단 리스크 관리 시스템을 새로 구축한 은행도 적지 않다.
이 값비싼 시스템은 SK글로벌 부실대출 과정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산출된 결과가 대출 의사결정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고 묵살된 것일까. SK글로벌 부실 대출의 적지 않은 부분이 지난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이러한 의문은 더욱 증폭된다.
금융감독원 은행감독국 최규철 리스크감독팀장은 “많은 은행들이 리스크 관리 전담 조직을 만들고, 시스템을 구축했지만, 아직은 결과의 정확성에 대해 자신하지 못한다”며 “그러다보니 실제로 의사결정에 반영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고 말한다.
리스크 관리시스템은 과거 기록과 통계에 주로 의존한다.
정확하고 섬세한 측정을 위해서는 상당기간의 자료 축적이 반드시 필요하다.
의욕만으로 모든 과정을 건너뛸 수는 없는 것이다.



대형화 통해 과당경쟁 막아야

일단, SK글로벌 처리문제는 관치 논란에서만큼은 한발 빗겨나 있는 듯하다.
채권단 중심으로 모든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 대체적 평가다.
하지만 한국의 은행산업에서 정부는 여전히 핵심 변수라는 데는 변함이 없다.
정부는 8개 시중은행 가운데 신한은행을 제외한 7개 은행에서 최대 주주나 2대 주주로 있다.
한 금융 전문가는 “공적자금 투입 은행의 경우 정부가 모든 일에 일일이 간섭하고 있어 책임경영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고 말한다.
이사회에서 결정한 내용도 정부의 전화 한통이면 뒤집히는 상황에서, 이사회의 은행장 견제도 현실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심지어는 자산 매각이나 자본 확충도 정부에서 정해주는 순서를 기다려야지 마음대로 할 수 없다”며 “은행산업에서는 아직도 시장 중심 인프라가 없다”고 말한다.
그는 또 “정부가 하는 역할 중에서 상당부분은 각 은행 이사회나 은행장에게 넘겨줘야 한다”며 “과도한 간섭 때문에 정부도 정작 해야 할 일을 못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물론 정부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보는 입장도 있다.
한국신용평가 안태영 선임연구원은 “시장과 시장 참여자, 그리고 정부를 완전히 별개로 보는 나라는 없다”며 “자율성을 어느 정도 주느냐의 문제”라고 말한다.
그는 “국제 신용평가 기관이 은행을 평가할 때, 표면적이든 암묵적이든 정부가 지지하는 금융 시스템의 안정성을 고려해 등급을 준다”며 “정부와 은행 모두 금융 시스템 안정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당사자”라고 강조한다.
한 외국계 증권사 애널리스트도 “외국의 경우 금융시장이 붕괴 위기에 처하면, 금융기관들이 알아서 이를 떠받치는 노력을 한다”며 “우리는 그런 협조가 제대로 안 되기 때문에 정부에서 나서게 되는 측면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예전처럼 퇴출시켜야 할 기업을 억지로 살리려고 하는 식의 관치금융은 이제는 정부에서 할 수도 없고, 은행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SK글로벌 사건은 그동안 지나치게 고평가돼온 은행권의 구조조정 성과를 냉정하게 다시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던져줬다는 점에서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100% 안전한 금융 시스템은 어디에도 없으며, SK글로벌 사건과 같은 외부충격은 언제든지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 역시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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