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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 아파트 후분양 뿌리 내릴까
[진단] 아파트 후분양 뿌리 내릴까
  • 김호준 기자
  • 승인 2003.05.0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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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업계 반대 딛고 뿌리 내릴까


3월27일 건설교통부 대통령 업무보고 자리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보고내용에는 포함되지 않았던 ‘아파트 선시공 후분양’ 이야기를 꺼냈다.
노 대통령은 이날 “다른 부문은 소비자 중심인데 주택공급만 공급자 우선”이라며 “단기적으로 시행하기 어려우면 장기적으로라도 언제 하겠다는 정책목표가 나와야 한다”고 지적했다.
대통령이 최종찬 건교부 장관에게 도입 방안을 적극적으로 검토하라고 지시하면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후분양 논란이 부활하게 됐다.


아파트 후분양 방식은 올해 초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시절에 검토 과제로 제안된 바 있다.
후분양 방식을 검토한 배경은 선분양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기존 주택시장 구조가 부동산 투기를 야기하고 주택품질에 대한 소비자들의 불만을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당시 소비자들은 아파트 분양가 상승에 제동이 걸릴 것이라는 기대와 완성품을 보고 주택을 구입할 수 있다는 점에서 후분양에 적극적 지지를 보냈다.


하지만 건설업계에서 건설비용 조달이 어렵다는 이유로 강하게 반대했고, 건교부에서도 주택공급 물량이 감소할 위험이 있다며 회의적인 의견을 제출하면서 논의는 진척되지 않았다.
건교부의 한 주택정책 담당자는 “새 정부 출범 이후 후분양과 관련해 별다른 준비를 하고 있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는 “이미 지나간 이야기로 알고 있었는데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갑자기 이야기가 나와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국토연구원 “단계적 시행, 충격 완화”

대통령의 검토지시를 받은 다음날 최종찬 건교부 장관은 주택건설업계 관계자와 전문가 등 12명을 긴급 초청해 후분양에 따른 절차와 선결과제 등을 논의했다.
건교부에서 뒤늦게나마 후분양 방식을 전제로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4월21일에는 국토연구원과 후분양 기반 마련을 위해 연구용역 계약을 맺었다.
건교부 관계자는 “용역결과는 6월초에 나오며 이를 토대로 시민단체, 주택건설업계, 전문가 등이 참여하는 공청회를 개최해 이르면 6월말, 늦어도 7월초까지는 도입방안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건교부가 후분양 활성화 방안을 검토하기 시작하면서 그 방법과 시기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용역과제를 맡은 국토연구원은 이전부터 단계적인 도입방안을 지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토연구원 주택부문 선임연구원 윤주현 박사는 “국민주택기금에서 지원을 받는 아파트부터 단계적으로 도입해야 한다”고 밝혔다.
윤 박사는 이번 용역 과제를 수행할 사람으로 후분양 방식에 적극적인 편이다.


“전면적으로 후분양을 시행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부분적인 도입은 주택시장이 안정세를 보이는 지금 빨리 진행하는 것이 좋습니다.
국민주택기금의 지원을 받는 중소형(전용면적 25.7평 이하) 아파트부터 부분적으로 도입하면 시장의 충격을 완화할 수 있습니다.
또한 (건설업계에서 말하는 것처럼) 공급물량이 줄어들 가능성도 있지만 단계적으로 도입하면 문제될 정도는 아니라고 봅니다.


하지만 후분양 활성화를 추진한다고 해도 법적으로 선분양을 막기는 어렵다.
세계 어떤 나라도 법으로 “주택공급은 시공 후에 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윤주현 박사도 “소비자들의 선택을 보장한다는 차원에서 선분양을 금지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며 “다만 선분양을 개선하고 후분양을 활성화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우선 선분양을 개선하기 위해 단계적으로 중도금 납입 비중을 줄이면서, 장기적으로는 사전청약은 허용하되 청약금만 받고 잔금은 입주할 때 받도록 규정할 수 있다.
실제 일본과 미국에도 아파트를 공급할 때는 선분양을 활용하고 있으나 구입자금의 대부분은 입주시점에 지불한다.
주택공급업자는 다만 사전청약을 통해 소비자를 확보함으로써 사업 리스크를 줄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윤 박사는 “민간 건설업체를 후분양으로 유도하기 위해 조세감면이나 금융지원 등 인센티브를 부여할 필요도 있다”고 지적했다.



소비자·업계, 적응시간 필요할 듯

한편 주택건설업계는 대규모 주택공급이 필요한 국내 현실을 고려할 때 후분양은 시기상조라고 지적한다.
주택보급률, 특히 주택수요가 집중되어 있는 서울 등 수도권의 주택보급률이 여타 지역에 크게 못미치는 상황에서 주택 공급이 후분양 방식으로 바뀌면 공급물량이 줄어들어 오히려 주택가격이 상승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주택사업자는 그동안 선분양 대금으로 손쉽게 건설비용을 마련할 수 있었지만 후분양이 전면적으로 시행되면 대규모 건설자금을 금융권에서 차입해야 한다.
한국주택협회 박규선 실장은 “일부 대형 건설업체를 제외하면 현실적으로 수백억원에서 수천억원이 들어가는 아파트 건설비용을 조달할 수 있는 건설업체는 거의 없기 때문에 아파트 공급이 크게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동안 분양시장 동향을 보면서 분양시기를 조절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아파트가 공급되는 시점의 주택수요를 예측해야 하므로 사업 리스크도 커진다.
LG건설 박현수 차장은 “대형 건설업체도 사업 리스크를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수도권에 1천세대 이상 아파트 단지를 공급하기는 어려워지고 사업성이 확실한 소규모 사업에 치중할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땅 짚고 헤엄치는 장사’를 해온 대형 건설업체에 후분양은 달갑지 않은 손님임에 분명하다.
IMF 이후 대형 건설업체들은 부담이 큰 자체 사업은 줄이고 안정적인 수익이 보장되는 재개발, 재건축 수주, 혹은 영세한 시행사가 이미 부지를 확보한 사업에만 매달렸다.


엄살을 부리고 있지만 대형 건설업체들은 당분간 건설자금을 조달하는 데 큰 문제가 없다.
LG건설 관계자는 “지금 당장 후분양으로 바꿔도 기존 공급물량을 유지하면서 2~3년 동안 부채비율 200% 이하를 유지할 수 있다”고 밝혔다.
LG건설은 매년 아파트 1만세대 정도를 공급해왔다.
지금부터 2~3년 뒤에 완공된 아파트를 팔면 자금이 들어오기 때문에 현금 흐름에는 큰 문제가 없다는 이야기다.
삼성물산, 대림산업 등 다른 대형 업체들도 2001년 이후 주택시장 호황 덕에 재무구조가 좋아져 현금 흐름에 여유가 있으며, 자체 신용으로 은행권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데도 어려움이 없다.


하지만 자금조달 능력이 떨어지는 중소형 건설업체는 후분양으로 바꾸면 훨씬 적응력이 떨어질 것이다.
문제는 이들이 전체 공급물량의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어 주택공급량이 감소할 가능성이 높다는 데 있다.
또한 청약통장을 손에 쥐고 아파트 분양을 기다려온 소비자들도 후분양에 적응하려면 상당한 기간이 필요할 것이다.
아파트 분양이 2~3년 동안 사라지면 주택 구입자들이 심리적으로 불안해할 수도 있다.


때문에 전문가들은 단기간에 후분양으로 전환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단계적으로 도입 일정을 잡아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건설산업전략연구소 김선덕 소장은 “후분양은 국내 주택공급 방식을 근본부터 바꾸는 작업”이라며 “공급자든 소비자든 적응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 소장은 “차츰 중도금 납부 비율을 줄이거나 단계적으로 분양시기를 뒤로 늦춰 나중에는 완공됐을 때 분양하도록 하는 등 적응할 시간을 줘야 한다”고 말했다.



주택금융제도 전면적 개편 전제돼야

또한 후분양으로 주택공급 방식을 바꾸기 위해서는 주택금융제도의 전면적인 개편이 전제돼야 한다.
우선 건설업체들이 자금을 쉽게 조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동안 건설업체가 선분양 대금으로 충당했던 수십조원에 이르는 주택건설비용을 금융권에서 조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은행이 건설업체의 신용도보다는 개별 프로젝트에 귀속된 자산과 계약상의 권리를 담보로 투자하는 프로젝트 파이낸싱(Project Financing)이 활성화돼야 한다.
최근 은행에서 부동산투자신탁을 통해 비슷한 방식으로 주택개발사업에 투자하고 있지만 연간 투자규모가 1조5천억원에 불과하다.
전문가들은 “은행뿐만 아니라 리츠, 펀드 연기금 등 다양한 자금조달 창구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한편 후분양을 하면 소비자들이 입주할 때 목돈을 한꺼번에 내야 하기 때문에 이를 보완하는 제도가 필수적이다.
선진국처럼 장기주택금융(모기지론) 제도가 도입돼 20~30년 동안 원리금을 갚아나갈 수 있으면 소비자들의 주택 구입이 용이해질 수 있다.
전문가들은 “후분양방식은 프로젝트 파이낸싱, 개발리츠, 모기지론 등 선진국 방식의 주택금융 제도화와 맞물려 진행될 것”이라고 말한다.







소비자는 유리할까? 불리할까?

소비자들은 대체로 후분양에 찬성하고 있다.
최근 부동산정보업체 스피드뱅크가 네티즌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전체 응답자의 87%가 후분양에 찬성했다.
소비자들이 후분양에 찬성하는 이유는 여러가지다.
우선 아파트 품질에 대한 불안감이 없어진다.
냉장고나 텔레비전도 실물을 보고 구입하는데 전재산을 투입하고 빚까지 지면서 사는 아파트는 모델하우스만 보고 구입하는 것은 불합리하기 때문이다.
또한 분양받은 아파트가 완공돼 입주할 때까지 마음을 졸일 필요도 없게 된다.
마지막으로 분양권 거래가 사라지면서 아파트값이 안정을 찾을 것이라는 기대도 후분양에 지지를 보내는 중요한 이유다.


그동안 선분양이 소비자에게 유리한 점도 있었다.
당첨되기는 어렵지만 아파트 분양을 받으면 어김없이 프리미엄이 붙었기 때문이다.
입주시점에는 아파트 가격이 많이 올라 소비자들은 상대적으로 싼값에 아파트를 구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실주거 목적이 아니더라도 청약통장을 이용해 아파트를 분양받으려고 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선시공 후분양이 정착되면 시세차익은 건설업체의 몫이 된다.
또한 건설업체는 입주할 때 분양대금을 받게 되면 건설비용 조달에 다른 금융비용으로 인해 분양가가 지금보다 10~15% 높아져 소비자에게 불리할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분양가는 원가에 좌우되기보다는 주변시세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에 금융비용이 고스란히 분양가에 반영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후분양방식이 정착되면 분양가 거품을 없애고 아파트값 안정에 기여할 수도 있다.
기존 선분양 후시공 아래서는 분양권을 쉽게 거래할 수 있어 투기수요가 몰려 분양가가 상승했다.
분양가 상승은 다시 주변시세를 끌어올려 전체 아파트값 상승을 이끌었다.
실제 지난해 아파트값은 수급으로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급등했다.
후분양이 일반화하면 최소한 분양권 거래를 둘러싼 투기 수요를 잡을 수 있다는 점에서 주택시장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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