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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리포트] 동북아 물류허브의 꿈을 위하여
[현장리포트] 동북아 물류허브의 꿈을 위하여
  • 이현호 기자
  • 승인 2003.05.2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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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물기 타고 33시간 지구를 돌다

인천국제공항에서 첫 출발은 산뜻하지 못했다.
출국수속 과정에서 약간의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법무부 출입국관리사무소 출국담당자는 여객기가 아닌 화물비행기로 가는 기자를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버스기사 몰래 무임승차를 하려다 들킨 아이처럼 다소 무안해지기까지 했다.
어찌됐든 ‘무사히’ 출국수속을 밟고 조종사들과 함께 활주로 밑으로 난 지하차도를 통해 화물터미널로 향했다.


5월12일 오후 8시, 인천국제공항 아시아나 화물터미널 앞은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1시간30분 뒤 뉴욕을 향해 출발할 OZ583 B747-400 화물비행기에 화물을 싣기 위해 10여명의 직원들이 부지런히 손길을 움직이고 있었다.
항공화물 대리점에서 싣고 온 화물들은 아시아나항공 터미널에 도착하면 TMS라는 최첨단 배송관리시스템에 따라 자동으로 분류된다.
화물적재대인 팰릿(Pallet)이나 컨테이너에 단단하게 적재·포장하는 작업도 여기서 함께 진행된다.



세계일주 화물비행기에 동승

아시아나항공은 최근 화물비행기 세계일주노선을 새로 만들었다.
지난 4월28일부터 매주 월요일 서울을 출발해 태평양과 대서양을 횡단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노선이다.
물론 아시아나항공은 지난 1998년 1월부터 국내 최초로 ‘서울-앵커리지-뉴욕-브뤼셀-서울’의 세계일주노선을 일주일에 세차례씩 운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매주 월요일 한차례씩 ‘서울-앵커리지-뉴욕-브뤼셀-빈-서울’이란 세계 최장거리 일주노선을 추가로 만들었다.
기존 노선에 빈 기착이 추가된 것이다.
이 노선에는 적재량 100톤 규모의 최첨단 B747-400 화물비행기가 투입됐다.


기자는 33시간을 꼬박 비행기 안에서 보내야 하는 이 노선에 동행취재를 신청했다.
세계일주 화물노선을 생생하게 체험해봄으로써 시장성과 성장가능성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였다.
마침 운송수단은 다르지만 화물연대의 파업으로 물류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도 늘고 있었다.
동북아 물류 중심기지라는 국가적 화두도 이런 취재를 결심하게 만들었다.


아시아나항공이 세계 최장거리 노선을 새로 만든 배경은 돌아올 때 적자를 조금이나마 보전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한국발 물량은 수요가 넘친다.
하지만 한국으로 다시 싣고 들어오는 물량은 거의 없어 적자에 허덕인다.
항공사 입장에서는 화물사업의 수익 측면에서 개선책 마련이 시급했다.
아시아나항공은 세계일주노선을 만들어 이런 적자구조를 해소하려고 시도했다.
미국 동부에서 유럽으로, 다시 유럽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을 택하면 새로운 화물 수요를 창출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바로 아시아로 들어오는 물량은 적지만 유럽에서 아시아로 들어오는 물량은 꽤 있었다.



△ 인천공항, 기대와 긴장 속 출발

밤이 되자 인천국제공항의 활주로에는 차가운 공기가 매섭게 불어온다.
1시간에 걸쳐 100톤이 넘는 화물을 탑재하는 작업을 완료하자 아메리칸항공에서 잔뼈가 굵은 뒤 2001년 7월 아시아나항공으로 자리를 옮긴 미국인 캡틴 포즈 기장이 직접 최종 점검에 들어간다.
타이어를 비롯한 기체에 손상부위는 없는지, 방사능이나 발화성 화물은 없는지, 기체의 앞뒤 무게중심이 맞도록 화물이 적절하게 배치됐는지 등을 꼼꼼하게 챙기는 것이다.
포즈 기장은 “여객기도 마찬가지이지만 화물비행기는 단 하나의 결함이라도 발견되면 출발할 수 없다”고 말한다.


저녁 9시30분, 수출화물로 가득 찬 OZ583편에 아시아나 홍보팀 김형진씨, 화물팀 김진 대리, 조업팀 이상기 주임, 취재기자 등 4명의 신참내기 탑승객이 모였다.
출발에 앞서 포즈 기장은 여객기의 여승무원처럼 신참내기들에게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때 응급조처할 방법을 친절히 설명해준다.


기내를 한번 쓱 들러보니 4명이 탈 수 있는 좌석을 제외하고는 빼곡하게 화물로 가득차 있다.
화물칸 앞쪽에는 삼성전자의 TFT-LCD(초박막액정표시장치)가 가득 실려 있다.
그뒤로 LG전자의 전자부품이 적지 않게 눈에 띄었다.
기내 중간쯤에는 고급 의류 브랜드도 눈에 보인다.
뒤쪽으로는 위험한 화학품이 가득차 있었다.
위험한 물품이 단가가 높기 때문에 항공사 입장에서는 반가운 손님들이다.
하지만 신참내기 탑승객들은 은근히 걱정을 하기도 했다.


인천에서 출발하는 항공화물은 대부분 반도체를 비롯해 전기·전자부품이 70% 이상을 차지한다.
가볍고 빠른 운송이 요구되기 때문에 항공화물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번 OZ583편의 화물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중국과 일본,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미국으로 가는 수출품이 가득 실려 있었다.
한국이 동북아 물류기지가 될 수 있다는 근거는 이런 데서 나오는 듯 싶었다.


화물팀 김진 대리도 “미국편 화물기는 한국뿐만 아니라 주변 아시아 국가의 항공화물 수요까지 모두 챙기기 때문에 가장 수익이 높은 알짜배기 노선”이라고 말한다.
결국 한국 항공화물의 발달은 한국이 아시아 물류기지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미주노선은 지난해 아시아나항공의 화물기 실적 400만톤 중 4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크다.
절대량으로도 아시아 항공사들 중에서는 아시아나항공이 대한항공 다음으로 많다.



△ 앵커리지 거쳐 뉴욕에 안착

자다가 깨다가 지루하게 8시간을 날아 중간 급유지인 앵커리지에 도착했다.
앵커리지는 미국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미국 땅에 처음으로 내딛는 발거음이 긴 여정에도 상쾌하기만 하다.
1시간 동안 급유를 한 화물비행기는 첫번째 목적지인 뉴욕을 향해 다시 몸을 일으켰다.


미국 시각으로 13일 새벽 1시. 뉴욕의 존케네디공항 아시아나 전용 화물터미널에 OZ583편이 육중한 몸을 내렸다.
4명의 신참내기 탑승객은 분주하게 자기 짐을 챙겨 내렸다.
곧바로 화물기 안의 화물들을 분류하는 작업이 시작되기 때문에 자리를 비켜야 했던 것이다.
미국에 도착한 화물들 가운데 일부는 창고에서 주인을 기다리거나, 아니면 바로 거래처로 직행한다.
오영돈 뉴욕 화물지점장이 손님들을 반갑게 맞이한다.


화물터미널은 분주하게 움직인다.
짧은 3시간 안에 모든 화물을 부지런히 내리고 실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서울발 화물기는 뉴욕에 내려야 할 화물이 대부분이라 더욱 바쁘게 움직인다.
화물을 다 내리고 나면 유럽으로 싣고 갈 화물을 다시 싣는다.
빈 비행기로 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뉴욕 화물지점은 미국 지점 가운데 최대 실적을 올리며 매년 6만3천톤의 화물을 처리하고 있다.
게다가 유럽으로 순환하는 세계일주노선과 연결돼 있어 흑자를 기록한다.
만약 곧바로 서울로 돌아간다면 화물기는 텅텅 비게 된다.
뉴욕으로 올 때의 5분의 1인 20톤밖에 채우지 못한다.
하지만 세계일주노선은 미국의 수출물품을 유럽으로 싣고 가기 때문에 50톤 이상을 나르며 높은 수익을 창출한다.
아시아나항공의 화물분야가 흑자를 기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대서양 넘어 벨기에 브뤼셀로

4명의 일행은 비행기에 다시 몸을 태우고 다음 목적지로 향한다.
이제 비행기는 태평양이 아닌 대서양을 가로질러 벨기에 브뤼셀공항으로 가고 있다.
또다시 이어지는 9시간의 긴 비행 끝에 유럽시각으로 13일 오후 1시에 벨기에 브뤼셀공항에 도착했다.
이쯤되니 서울, 뉴욕, 브뤼셀을 오가는 시차로 정신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브뤼셀에서는 장만우 화물지점장이 4명의 탑승객을 반갑게 맞이한다.


사실 브뤼셀지점은 뉴욕지점보다 더 분주하다.
미국에서 날아온 수출입품과 유럽에서 아시아로 들어갈 수출입품이 교착하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항공화물 품목도 제일 다양하다.
물론 유럽지역에서는 아시아나의 독일 프랑크푸르트지점이 매출액으로는 제일 큰 지점이다.
하지만 브뤼셀지점은 가장 많은 화물기들이 내리는 유럽 내 최대 공항이다.
아시아나항공도 1년에 1만톤 이상의 실적을 올리며 1800만달러의 수익을 내고 있다.


특히 브뤼셀에서는 화학약품 수송이 제일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화학약품은 항공화물에서 가장 높은 요금을 받는 물품에 속한다.
이외에도 자동차부품, 의료정밀기기, 초콜릿 등이 들어오고 나간다.
특히 한국을 거쳐 일본과 중국으로 들어가는 수출입품의 대부분이 여기에서 실린다.
그만큼 브뤼셀은 아시아나항공 입장에서는 ‘전략 거점’인 셈이다.



△ 동유럽의 전초기지 빈에 도착

이어 비행기는 또다시 다음 목적지인 오스트리아 빈으로 향했다.
비행기에 몸을 실은 일행은 브뤼셀에서 2시간 거리인 빈에 대한 기대감으로 다소 들뜬 기분이었다.
사실 지도상으로는 아주 멀어 보이지만 실제 비행거리는 그리 멀지 않은 것이다.
유럽지역이 한울타리에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현지시각으로 13일 저녁 6시30분에 도착한 빈공항 아시아나항공 화물터미널. 이곳은 아시아나항공이 유럽지역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점 가운데 하나다.
일단 빈공항 입장에서 아시아나항공은 더할 나위 없는 고객이다.
화물전용기로는 가장 큰 보잉 747-400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지난 4월28일 아시아나항공이 처음 들어올 때는 지역 언론들이 대서특필할 만큼 커다란 뉴스거리였다고 한다.


아시아나항공이 신규 노선에 빈을 중간 기착지로 추가한 이유로는 몇가지를 꼽을 수 있다.
우선 경쟁사인 대한항공이 들어오지 않고 있어 시장을 선점한다는 의미가 있다.
게다가 빈은 동유럽의 전초기지가 될 수 있다.
오스트리아 빈의 주변국인 폴란드와 헝가리 등이 유럽연합(EU) 가입을 서두르고 있어 앞으로 동유럽권의 물류허브로 자리잡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폴란드와 헝가리가 EU에 가입하면 인건비가 싼 이들 지역에 공장이 들어서면서 그 관문인 빈공항으로 물류가 몰릴 것이다.
물론 아직까지 빈의 화물량은 브뤼셀의 절반 수준이지만 아시아나 입장에선 장기 투자를 한다는 의미가 있다.
빈공항쪽도 아시아나항공이 화물기 노선 취항을 계기로 아시아나항공만을 상대하는 별도 조직을 만들며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빈에서 서울 손님들을 처음 맞이한 사람은 프랑크푸르트지점 정용교 운송과장이었다.
빈지점이 신설된 지 3주밖에 되지 않아 아직까지는 인력 인프라를 구축하지 못했기 때문에 두 지점 일을 하는 것이다.
정 과장은 매번 프랑크푸르트에서 날아와 빈지점의 화물작업을 직접 챙기는 바쁜 일정을 보낸다.



△ 피곤한 몸 이끌고 다시 원점으로

세계일주노선의 여정이 마지막을 향해 달린다.
빈공항에서 모든 화물을 싣고 내리는 작업이 끝난 것이다.
아시아로 향하는 유럽의 수출품을 실은 항공기는 힘차게 빈 활주로를 차고 날아오르고 있었다.
한국이 포도송이처럼 동북아의 물류중심지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서울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새록새록 느낌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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