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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공식상품 태반, 먼지 속 잠자
2. 공식상품 태반, 먼지 속 잠자
  • 이희욱 기자
  • 승인 2003.05.3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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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고율 80%, 총 1500억원 규모…정부·조직위 무대책에 제조업자들 울상


최근 2002 한일월드컵 휘장사업권을 둘러싼 로비 의혹으로 온 나라가 술렁이고 있다.
관련 사업자들이 잇따라 조사를 받거나 구속되고, 유력 정치인들의 이름도 심심찮게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이를 보며 남몰래 한숨짓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
실질적인 피해 당사자인 월드컵 공식상품 제조업체들이다.


한때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인식되며 너나 할 것 없이 뛰어들었던 월드컵 공식상품 판매사업이 채 1년도 안 돼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다.
공인 티셔츠와 축구공, 마스코트와 각종 기념품 등의 80%는 주인을 잃고 먼지를 뒤집어쓴 채 창고에 처박혀 있는 실정이다.
휘장 사업권자였던 코오롱TNS는 사업 실패로 인한 재정난을 견디지 못하고 지난해 7월 고의부도란 의혹 속에 뒤로 나자빠졌다.
사업에 참여했던 하청업체와 라이선스 업체들이 줄도산을 당한 건 예정된 수순이었다.
‘붉은 기적’의 감동은 아직도 생생하지만, 상품 판매업체들의 생채기는 여전히 아물지 않았다.



경험없는 사업권자, 주먹구구식 마케팅

월드컵을 개최한 지 1년이 지난 지금, 남아도는 월드컵 공식상품은 전체 생산량의 80%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된다.
금액으로 따지면 150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코오롱TNS와 계약한 하청업체에 FIFA와 단독 계약한 라이선스 업체를 합하면 사업에 참여했던 업체는 모두 3천여곳에 이른다.
이들 중 상당수는 자금난을 이기지 못하고 부도를 낸 상태다.
남은 재고분에 대한 마땅한 처분통로도 없는 형편이다.
2만5천원짜리 공식 티셔츠를 5천원에 내놓아도 거의 팔리지 않는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월드컵 공식상품 제조업자들은 지난 3월16일 ‘2002 월드컵 중소기업인 피해대책 협의회’(월피협)를 결성하고 서울 효창동 백범 김구기념관에서 월드컵 피해대책 토론회를 하는 등 생존을 위한 단체행동에 들어갔다.
이들은 무엇보다 사업권자를 선정하는 과정에 문제가 있었다고 볼멘소리를 늘어놓았다.


“처음부터 보따리 장수에 불과한 홍콩계 업체 CPP코리아를 선정한 게 잘못이었어요. 하지만 그건 FIFA가 선정한 거니까 어쩔 수 없다고 칩시다.
그런데 나중에 코오롱TNS로 사업권자를 바꾸는 과정에선 정부쪽에서 철저하게 검증했어야 했다는 것이죠.”

월드컵 도우미 전화(02-562-0550)를 운영하고 있는 황주성 월피협 공동대표는 “스포츠 마케팅에 대한 전문성이 떨어지는 사업권자가 나섰기에 출발부터 실패가 예견됐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일본의 경우 일찌감치 세계적 광고회사인 ‘덴츠’를 마케팅 대행사로 선정해 공식상품 판매활동을 활발히 펼쳤다.
반면 국내에선 스포츠 마케팅 경험이 없었던 CPP코리아와 코오롱TNS가 잇따라 사업권자로 나서면서 주먹구구식 마케팅을 펼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 무리하게 공식상품 계약을 남발한 것도 사업 실패의 원인으로 꼽힌다.
코오롱TNS가 사업권을 넘겨받았을 땐 이미 CPP코리아가 티셔츠나 열쇠고리 등 30여개 알짜배기 품목에 대한 로열티를 챙긴 뒤였다.
거액을 주고 뒤늦게 사업권을 넘겨받은 코오롱TNS는 수지를 맞추기 위해 축구와 상관없는 상품까지 계약을 남발했다.
“코오롱TNS가 사업권자로 나선 이후 600종에 2천개가 넘는 공식상품이 시중에 유통됐다”며 황주성 대표는 분을 삭이지 못했다.
심지어는 월드컵 엠블럼이 찍힌 ‘월드컵 막걸리’가 로열티를 포함해 1600원에 시중에 나왔다가, 1천원 안팎의 일반 막걸리에 밀려 사라지기도 했다.


심지어는 월드컵 공식 마스코트조차 경기장에서 외면을 당했다.
마스코트를 판매했던 이명재씨는 “경기장이나 광화문 응원장, 공항 등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을 겨냥해 대형 마스코트를 내놓았지만, 서울·수원·대구 경기장 등 세곳을 제외하곤 들어가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대형 마스코트 가격이 수천만원에 이른다는 이유로 주요 경기장쪽에서 난색을 표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명재씨는 “라이선스를 신청하고 서류와 디자인 샘플 승인 등을 받는데 거의 2년이 걸렸다”며 “마케팅 대행사가 일괄적으로 라이선스 승인을 받은 일본에 비해 국내 업체들은 자체적으로 승인을 받아야 했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무엇보다 피해가 컸던 쪽은 공식 티셔츠 제조업체들이다.
붉은악마 응원단이 제작한 ‘비 더 레즈’(Be the Reds) 티셔츠가 불티나게 팔리는 바람에 트윈인터내셔널, 영원코리아 등 10여개 업체가 내놓은 공식 티셔츠는 절반 이상이 창고에서 썩어버렸다.
“업체들이 제조한 200만장의 티셔츠 중 팔린 건 채 100만장이 안 된다.
그나마 팔린 제품들도 상당수는 원가 수준에서 ‘땡처리’한 것”이라며 황주성 대표는 업체들의 고충을 설명한다.
이들 업체들의 피해규모는 모두 6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월피협쪽은 파악하고 있다.


다행히 수익을 남겼던 참여업체들도 정부쪽의 초기 대응이 부족했던 점을 아쉬워했다.
축구공을 생산했던 비바스포츠 권오성 사장은 “핵심 아이템을 판매한데다 94·98 월드컵에서 쌓은 판매경험 덕분에 수익을 올렸다”고 안도하면서도 “월드컵이 대형 프로젝트인 점을 감안할 때, 정부 차원에서 조직적인 홍보 프로그램을 진행했더라면 사태가 이 지경까지는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하지만 권오성 사장은 “월드컵 상품판매 경험이 없는 업체들이 판매량을 낙관하고 제품을 너무 많이 생산한 탓도 있다”며 업계쪽의 경험 미숙도 꼬집었다.



수요 예측 못한 제조업체들도 책임

물론 제조업체들도 이에 대해 자신들의 잘못을 일부 시인했다.
하지만 근본 원인은 안일한 정부쪽 대응에 있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황주성 대표는 “당시만 해도 마케팅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정부쪽에서도 물건만 내놓으면 대박을 터뜨릴 것으로 보고 아무런 마케팅 정책도 내놓지 않았다”고 안일했던 초기 대응을 지적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정부쪽 입장은 다르다.
당시 문화관광부에서 일했던 관계자는 “피파(FIFA)와 CPP코리아가 직접 계약을 맺은데다, 수요 예측 등은 계약 당사자인 CPP코리아와 코오롱TNS 등이 직접 했기 때문에 상품에 관한 한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며 곤혹스러워했다.
그는 오히려 “정부가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던 상황 자체가 문제였다”며 FIFA쪽의 강한 입김을 에둘러 시인했다.
이에 덧붙여 “코오롱TNS가 무리하게 계약을 확대하면서 상품 질이 떨어진 것도 원인”이라고 이 관계자는 분석했다.


하지만 월드컵을 개최한 지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정부나 조직위쪽에선 이렇다 할 대책을 내놓지 않고 있다.
늘어나는 재고를 해결해줄 대책도, 참여업체의 불만을 잠재워줄 묘안도 없다.
최소한 참여업체와 지속적으로 해결책을 논의할 수 있는 전담 부서조차 없다.
무엇보다 3천여 중소 피해업체들이 분통을 터뜨리는 근본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현재 이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창고에 쌓여 있는 재고분을 처분할 만한 통로를 시급히 마련하는 것이다.
이들이 월드컵 공식상품을 판매할 수 있는 기간은 원래 지난해 말까지였다.
하지만 쌓여가는 재고를 처리할 수 없는 업체들은 고심 끝에 피파에 요청해 판매기간을 올해 말까지로 겨우 연장한 상태다.
그나마 ‘한일월드컵 1주년’이라는 시점이 재고물량을 처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때문에 이들은 정부나 조직위가 나서 문제를 해결해줄 것을 강력히 요청하고 있다.
제조업자를 위한 1주년 기념행사를 열고 별도 부스를 마련해 판매여건을 조성해주거나, 대국민 홍보를 대대적으로 전개하는 등 국민들의 관심을 유도하든지, 그것도 아니면 한일월드컵에 참여했던 후원업체나 조직위 등이 앞장서 물건을 구매해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


“지난 2002 한일월드컵으로 조직위는 1600억원에 이르는 수익을 거뒀습니다.
이 돈의 10%라도 상품 판매업자들을 배려해 ‘장례비’라도 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들에게 남은 월드컵 상품은 벗어던지고픈 짐일 뿐이다.
“월드컵으로 건진 건 히딩크와 정몽준, 길거리응원과 4강밖에 없다”는 제조업자들의 자조 섞인 목소리가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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