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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재경부, 증시부양 위해 관치금융?
[포커스] 재경부, 증시부양 위해 관치금융?
  • 이경숙 기자
  • 승인 2003.05.3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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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경부, 리먼브러더스 KELS 밀어주기…“증시부양 위해 시장질서 저해” 여론 술렁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시장에서 상품은 조건이 좋아야, 값이 싸야 팔린다.
그런데 우리 금융시장에선 꼭 일이 그렇게 돌아가지만은 않는다.
“리먼브러더스 KELS 청약조건이 좋은 건지 의문스러웠지만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 “같은 규모로 우리가 직접 투자하는 것보다 리스크 헤징 비용이 비쌌지만 기관투자자로서 사회적 역할을 생각해 들어갔다.
” 금융가에서 흘러나온 말이다.
그들은 모두 익명을 요구했다.
5월초 있던 리먼브러더스 KELS 청약을 둘러싸고 솔솔 피어오르는 신관치금융 논란의 본질은 뭘까?

진상을 파악하려면 우선 재정경제부의 증시안정대책이 어떤 것인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재경부가 지난해 10월 내놓은 증시 안정 대책의 주요 골자는 이렇다.
“안정적인 장기 수요 기반 확충을 위해 기관투자자를 육성하겠다.
기업가치에 기초한 중장기 투자를 유도하겠다.
증권사의 종합자산관리계좌(랩어카운트) 운용 규제를 폐지해 증권사 기능을 확충하겠다.
주가연계채권(ELN) 등 투자 안전성을 높인 새로운 금융상품을 도입하겠다.


올 3월 재경부 변양호 금융정책국장은 ‘금융위기 대책 토론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건전한 주식시장은 주가가 떨어지면 차익 실현을 겨냥한 새로운 수요가 발생한다.
현재 국내 주식시장은 그렇지 못하다.
이것이 단기적인 주가 부양보다 안정적인 수요 확충이 더 중요한 이유다.
관치라는 비난을 받더라도 이런 구조를 뜯어고치겠다.
4월초 원금보존형 주식상품인 주가연계채권도 발매될 예정이다.
이런 상품이 활성화되면 장기 수요 확충에 도움이 된다.



기관에게 매력없는 상품 가입 ‘독려’

그래서 재경부가 선택한 것이 리먼브러더스의 KELS였다.
리먼브러더스 KELS는 다른 ELS(주가연계증권)와 달리 전체 발행액 중 70% 정도를 주식 현물에 투자한다.
5월초, 모두 합해 6300억여원의 돈이 리먼브러더스가 설계하고 삼성증권, 굿모닝신한증권이 발행한 KELS에 몰렸다.
공모 규모인 2조원엔 절반도 채 못미치는 실적이지만 그동안 증권가에서 발행된 ELS가 1조원 남짓하다는 점을 감안해보면 꽤 좋은 성적표다.


이 돈 중 4400억여원이 6월10일까지 20일 거래일 동안 주식 현물 매수에 투입될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잡힌 주식 물량은 최소 2006년 6월9일 최대 9월8일까지는 KELS 안에 묶여 있게 된다.
고객예탁금 규모가 10조원이니 전체 중 4% 남짓한 물량이 3년3개월 동안 거의 움직이지 못하게 된 셈이다.
우리 증시처럼 변동성이 큰 시장에선 반가운 소식이라 할 수 있다.
1990년대에 금융기관들이 조성한 증시안정기금 투입에 비견할 만하다.
이것이 재경부가 노린 효과인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좋은 일을 하고도 업계에선 KELS 투자에 대해 말을 아낀다.
왜일까? 사실 리먼브러더스의 KELS는 기관투자자가 자발적으로 살 만한 매력이 거의 없다.
주가가 16% 혹은 26%까지 떨어져도 원금이 보장될 수 있다는 것, 지수상승률을 75% 혹은 61%까지 쫓아갈 수 있다는 정도다.
이 정도 헤징은 우리 금융기관들도 할 수 있다.


그에 비해 환금성, 유동성, 수익성 매력은 크게 떨어진다.
일단 주식이란 위험자산에 3년 동안 돈이 묶여 있게 된다.
게다가 이 ELS는 만기 시점 지수를 기준으로 수익이 계산된다.
물론 90년대 미국처럼 장기 상승세를 탄다면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우리 증시엔 종합주가지수 500에서 1000대 박스권에서 17년 가까이 머물러왔다는 핸디캡이 있다.
내년에 천정을 쳤다가 내후년엔 다시 500대로 떨어질 수도 있는 일이다.
환금성이 떨어지니 유동성도 크게 기대할 것이 없다.
제2시장 거래가 활성화할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얘기다.


수익성 매력도 높지 않다.
ELS는 중간에 팔고 나오려면 투자자가 남은 기간만큼 옵션 비용을 내놔야 한다.
옵션 비용은 만기까지 남은 기간이 길수록 비싸다.
1년 뒤부터 중도 환매할 수 있다고는 하나 2년짜리 옵션 비용을 뱉고 나가야 한다.
KELS는 다른 ELS보다 비용이 비싸게 드는 편이다.
발행규모가 크고 만기기간이 3년으로 긴 탓이다.
또 리먼브러더스가 독특하게 내놓은 구조라 시장에 비교할 만한 다른 상품이 없었다는 점도 가격이 다소 높게 책정되는 데에 한몫했다.


파생상품 시장에선 창의성이 곧 가격이다.
국내 은행, 증권사를 놔두고 재경부가 하필 리먼브러더스 상품을 밀어준 건 재경부 내 인맥 따위보다는 상품 자체의 창의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창의적인 작품이라 해도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시장에선 투자 매력이 떨어지면 팔리지 않는다.
공모가 진행된 5월초, 업계에선 재경부의 ‘ KELS 마케팅 지원’ 사례가 여러가지 소문으로 무성하게 나돌았다.
재경부의 ‘독려’가 없었어도 청약 규모가 6천억원을 넘을 수 있었을까?


대증요법보다 근원적 처방이 절실

여하간 현재 금융기관의 조달금리가 5%에 달하는 현실을 감안해보면 금융기관들은 KELS 투자를 위해 무리수를 둔 것으로 보인다.
일단 참여 규모가 상당히 크다.
1분기에 이미 1조원을 주식시장에 투자한 국민은행은 이번에도 1100억원을 청약해 가장 많이 투자했다.
증권업협회 등 4개 증권유관기관이 출자한 공동투자펀드는 다른 주식형 펀드에서 1천억원을 빼 KELS에 넣었다.
그동안 주식엔 시중은행의 절반 규모밖엔 투자하지 않았던 기업은행도 1천억원을 청약했다.
이 돈은 모두 은행 고유계정에서 빠져나갔다.
자기자본은 은행 수익성, 대출 위험 관리력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


신관치금융 논란은 일단 접어두자. 그러기엔 법 개정, 제도 개선, 증권사 구조조정 등 민관이 힘을 합쳐 해결해야 할 급한 과제들이 너무 많이 남아 있다.
그래도 두가지 의문은 지울 수가 없다.
리먼브러더스의 KELS가 과연 관치 논란을 무릅쓰고라도 키워줄 만큼 우리 증시에 좋은 상품인가? 시장을 키우는 것이 시장 질서를 바로잡는 것보다 우선시되어야 할 일인가?

20여년 이상 시장을 본 한 중견 금융인은 이렇게 지적한다.
“KELS가 증시안정기금보다 효과적이라고 할 만한 건지는 모르겠다.
과거 증안기금 투입도 단기적으로 반짝했을 뿐 장기적으론 효과가 없었다.
대증요법은 먹히지 않는다.
안정성, 예측가능성을 높이는 근원적 처방이 필요하다.
시장에 자신감이 붙으면 주가의 하방경직성은 자연스레 생긴다.
” 다른 금융인은 말한다.
“솔직히 말해 국내 기관 중 KELS 같은 구조의 대규모 상품을 내놓을 만한 역량이 있는 곳은 없다.
아직 자본 규모도 작고 경험도 적다.
하지만 머지않은 미래엔 할 수 있을 것이다.
” 재경부 방안대로 안정적인 장기 수요 기반 확충을 위한 제1과제는 국내 기관투자자를 육성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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