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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지속가능성 평가 자리 잡을까
2. 지속가능성 평가 자리 잡을까
  • 이경숙 기자
  • 승인 2003.06.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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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소나무 계라는 것이 있었다.
시간은 20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 왕실과 권세가들이 왕실의 국용림은 물론 백성의 공리지(供利地)까지 독차지하자 마을 근처 산림에 기대 건축재와 땔감, 이런저런 나물을 구했던 민초들은 곤경에 처하게 됐다.
돈도 없고 백도 없는 백성들은 계를 결성해 직접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전남 보성군 복내면 이리에 있는 송계비는 소나무 계의 기원을 이렇게 전한다.
“송계산 모두가 솔숲으로 구성되어 있고 특히 소나무가 건축재, 가구재, 관곽재, 임산연료로서 수요가 막중하기 때문에 잘 관리하고 수호하여 적절하게 채취하고 균등하게 배분하여 고르게 이익을 나누고자 송계라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와 고속성장기를 거치며 사라졌던 ‘소나무 계’의 정신이 되살아나고 있다.
단, 시대가 바뀌어 ‘소나무’는 ‘기업’으로 바뀌었다.
6월2일 서울 양재동 현대자동차 본사에선 현대·기아자동차 정몽구 회장이 환경경영 전략을 기업의 핵심전략으로 채택하겠다고 선언했다.
2010년까지 1조3천억원을 환경 분야에 투자해 자동차 생산뿐 아니라 환경 분야에서도 세계에서 다섯손가락 안에 들겠다는 것이 주요 골자다.
이날 포항에선 포스코 이구택 회장이 포스코 윤리규범을 선포했다.
포스코는 윤리규범 평가모델을 개발해 실천 상황을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할 방침이다.


변화의 조짐은 정부 조직에서도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산업자원부는 삼성지구환경연구소와 함께 기업의 경제, 사회, 환경적 성과를 평가하는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 지표를 개발하고 있다.
우수기업 시상, 신용평가사의 심사에 활용해 지속가능성이 높은 기업에 인센티브를 주겠다는 목적이다.
환경부는 대통령 직속 순수 자문기구인 지속가능발전위원회의 기능을 단순 자문에서 심의까지 확대하는 것을 골자로 한 규정 개정안을 곧 마련할 예정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3일 노사협력 모범업체인 유한양행을 방문해 임직원을 독려했다.


생태계의 자양분을 쭉쭉 빨아들이며 고속성장을 거듭해온 대기업들이 드디어 상생의 길, 공존의 길을 찾기 시작한 것일까? 엔론, SK글로벌 분식회계 사건을 거치며 신뢰경영의 중요성을 새삼 깨달은 것일까?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 정부 땐 고속성장 기업 중심의 정책을 펴던 전 정권들과는 달리 사회적 책임감이 높은 기업들이 대우받는 시절이 올까? 그렇게 보기엔 뭔가 부족하다.



지배구조, 기업 지속성에 큰 영향

현대·기아차 정몽구 회장이 글로벌 환경경영을 선포하기 직전, 현대·기아차 그룹은 도덕성 논란에 휘말렸다.
기아차가 현대모비스 주식 170만주를 매입하면서 공시가 나가기도 전에 매입 물량의 절반을 사들인 것이다.
기아차와 현대모비스로선 고의든 고의가 아니었든 일반투자자를 호도했다는 비난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됐다.
마침 정몽구 회장의 외아들 정의선 전무의 현대모비스 지분 취득을 앞둔 상황이라 주식 매집 자체에 대한 시장의 눈길도 곱지만은 않다.
계열사인 본텍 지분 30%를 가진 정 전무는 현대모비스과 합병이 완료되면 자연스럽게 그룹의 지주사 역할을 하는 현대모비스 지분을 보유하게 된다.
기아차의 주식 매집으로 정몽구-의선 부자는 돈 한푼 더 들이는 것 없이 순환출자 구조와 그룹의 지배권을 더 확고히 다지게 됐다.


순환출자 구조를 가진 삼성, SK 역시 이런 논란에서 자유롭긴 힘들다.
대주주가 적은 지분으로 많은 계열사를 거느리는 지배구조는 시너지가 큰 만큼 악영향도 크다.
SK 최태원 회장의 구속과 SK글로벌의 분식회계가 SK그룹 전체의 위기로 확산된 것이 가까운 예다.
최근엔 삼성그룹의 지주 역할을 하는 삼성생명 상장 소식이 퍼지면서 삼성전기처럼 비싼 값에 삼성생명 주식을 사들인 계열사는 되레 주가 상승에 제한을 받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좋은기업만들기시민행동 최정철 운영위원은 “한국에선 기업 지배구조가 기업 지속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지적한다.


이런 한국 현실에서 지속가능성 지표가 기업의 지속가능성을 보장해줄 수 있을까? 지속가능성 지표에는 대개 지배구조 평가가 빠져 있다.
세계적인 공동 지표로 자리잡은 GRI(Grobal Reporting Initiative)의 지속가능성 보고 가이드라인도 기업의 경제, 사회, 환경적 성과만 알려주지 지배구조를 알려주지는 않는다.
GRI 가이드라인에 근거해 개발된 것으로 전해지는 산자부의 지속가능성 지표가 어떤 평가 기준을 담았는지는 뚜껑을 열어봐야 알 것이다.


최근 기업 지배구조와 기업 지속가능성의 연계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GRI는 국제기업지배구조네트워크(ICGN)와 함께 7월9일 암스테르담에서 이에 대한 콘퍼런스를 열기로 했다.
최 운영위원은 “GRI가 2004년 가이드라인 개정 때 기업 지배구조 평가를 포함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고 귀띔한다.
한국의 기업지배구조 연구진영들은 거꾸로 사회적 책임성을 강조하는 기업의 지속가능성, 사회책임투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6월 중순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는 기업지배구조와 사회책임투자의 연관성에 대한 자료를 발간할 예정이다.



사회보고서 발간 기업조차 없는 현실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 김주영 소장은 기업지배구조 개선운동과 사회책임투자 운동이 기업의 투명성 증진, 타인의 권리 존중이라는 목적을 공유한다고 말한다.
기업 지배구조 개선운동 진영에서 보면 다른 이해관계자의 권리를 침해하면서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은 회계부정 논란, 환경공해 배상소송 같은 리스크에 노출되기 쉬우므로 좋은 지배구조를 가졌다고 볼 수 없다.


기업 투명성, 타인에 대한 존중이 낮은 기업들은 사회책임투자자뿐 아니라 국제사회, 시민단체, 소비자의 견제를 받아 기업 지속가능성도 낮아진다.
또 EU 등 환경 규제가 강하고 사회적 책임이 강조되는 지역에선 수출 물량을 따내기도 어렵거니와 나쁜 회사 이미지 탓에 좋은 가격을 받기도 어려워진다.
지구 환경과 무역을 연계한 그린라운드에 이어 노동 기준을 적용한 블루라운드까지 오면 이런 기업들이 설 자리는 더 좁아질 전망이다.


에코프론티어 임대웅 실장은 선진적 기업 사이에선 이미 투자자, 임직원, 협력사, 지역사회 등 이해관계자들의 파트너십이 좋아야 기업 역량, 즉 기업 지속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인식이 퍼져 있다고 전한다.
사회주의 운동, 여러번의 불황, 환경오염 등 경제발전 과정에서 나타나는 여러 갈등과 위기를 기업뿐 아니라 사회 전체가 겪으면서 얻은 교훈일 것이다.


한국에서 아직 기업 지속가능성이나 사회책임투자는 당위론적 명제로만 들린다.
지속가능성 보고서는커녕 제대로 된 사회보고서를 낸 기업조차 하나도 없는 것이 한국 현실이다.
법으로 사회보고서 제출을 의무화한 프랑스나 수많은 관련 지표를 가진 미국, 영국 등 서구국가들과는 동떨어진 분위기다.


당위를 현실로 바꾸려면 행위가 필요하다.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 김주영 소장은 우선 기업에 공시 의무가 있는 사업보고서에 지속가능성 보고서 항목 일부를 포함시키는 방법을 제안한다.
현재 사업보고서 항목에 들어 있는 노조 존재, 법규 위반에 대한 제재 부분을 더 발전시키는 것도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란다.


기업지배구조개선지원센터 정광선 원장은 투자자의 힘을 강조한다.
미국에서 기업 지배구조 개념을 전파시킨 것은 기관투자가들이다.
사회책임투자펀드인 에코펀드가 높은 인기를 끌고 있는 일본에선 올 3월까지만 해도 54개 기업이 지속가능성 보고서를 냈다.
지난해 1년 동안 나온 보고서가 17건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괄목할 만한 성장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장을 바꾸는 건 투자자들이다.
그 옛날 민초들의 생활 기반인 솔숲을 지킨 이들은 민둥산에 나무를 심은 사람들이었다.










“파트너십이 좋아야 기업도 발전”


지난해 네덜란드에 뿌리를 둔 다국적 기업 필립스는 실적 악화로 프랑스 르망의 휴대전화 공장을 폐쇄해야 했다.
필립스가 이 지역에서 고용한 인원은 휴대전화 공장만 해도 2600여명. 그러나 필립스가 떠난 뒤에도 실업자 수는 늘지 않았다.
대부분 필립스의 주선으로 재교육을 받아 다른 자리에 취직하거나 필립스와 지방정부가 공동 지원하는 업체에 취직한 덕분이었다.


영국의 중소은행 코아퍼레이티브 뱅크는 지난해 두자릿대 성장률을 보이는 기염을 토했다.
세전 이익은 2001년보다 14%가, 가계예금과 대출도 11%, 12%씩 높아졌다.
이 은행은 기업의 사회책임을 이행한다는 차원에서 수익성이 낮은 시골에도 예금입출금기를 설치하는 등 여러 가지 사회사업을 벌였다.
에코프론티어 임대웅 실장은 “이들의 이런 모습이 기업 이미지와 실적을 높여줬다”고 말한다.
기업 이미지과 매출의 연관성이 높은 금융 등 서비스산업이라 그 효과는 더욱 컸다.


이 두 기업의 공통점은 주주뿐 아니라 임직원, 고객, 협력사, 납품업체, 지역사회와 국제사회, 심지어 미래세대까지 기업의 파트너로 여기고 존중한다는 데에 있다.
기업의 생명을 지속하는 힘, 기업의 목적인 가치의 창출이 이들한테서 나온다는 이유다.
코아퍼레이티브 은행은 아예 지속가능성 보고서를 파트너십 보고서라고 부른다.
파트너 간 균형과 책임이야말로 기업을 지속하게 하는 힘이라는 뜻이다.


지속가능성 보고서의 진짜 힘은 실행력에 있다.
필립스코리아 유재순 이사는 3월 지속가능성 보고서가 나온 뒤 필립스메디칼시스템즈의 대표가 여자로 바뀌었다고 귀띔한다.
필립스 임원이 대부분 백인 남자라는 평가가 나온 탓이다.
절전·무수은 등 환경친화적 제품은 벌써 오래 전부터 개발돼나오고 있다.


하지만 사회책임성이 높은 기업이라고 늘 소비자의 호응을 얻는 건 아닌 모양이다.
필립스의 환경친화형 형광등인 그린라인은 미국 시장에선 출시되자마자 두자릿수 점유율을 기록했지만 한국 시장에선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했다는 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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