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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 누구를 위한 특소세 인하인가
[진단] 누구를 위한 특소세 인하인가
  • 이현호 기자
  • 승인 2003.07.1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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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압력에 밀리고 당리당략에 이용되고

정부의 자동차 특소세 인하조치에 대해 시민단체들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
지난 11일 국회 재경위는 승용차 특별소비세를 인하하기로 하는 등의 세법개정안에 잠정합의했다.
이에 따라 앞으로 승용차 특소세는 배기량 2천cc를 초과하는 차량은 10%, 2천cc 이하는 5%로 각각 인하된다.
소비자 판매가격이 낮아지는 것은 물론이다.
참여연대의 한 관계자는 “이번 특소세 인하는 소비진작 등 경기부양 차원이 아니라 미국의 통상압력에 의한 정책”이라고 주장했다.
특소세 인하의 본질이 왜곡됐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정부 방침이 오락가락했던 데서도 읽혀지는 대목이다.
재경부는 이 문제를 놓고 한 달도 안 돼 말바꾸기를 했다.
지난 6월18일 국회에서 김진표 재경부장관은 “특소세 인하는 경기부양 효과가 별로 없다”며 소비진작에 부정적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김광림 재경부차관은 지난 7월8일 국회 재정경제위원회에서 “특소세 인하는 경기 진작과 한미 통상문제를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대목에서 시민단체들은 좀 더 구체적인 근거를 내민다.
특소세가 인하되면 소형차의 경우 세율이 2%포인트 낮아지지만 중·대형차는 4~5%포인트나 인하된다.
자연스레 배기량이 큰 미국의 수입차가 큰 가격효과를 보는 셈이다.
국내 수입차시장에서 고전하던 미국 자동차업체의 특소세 인하압력을 사실상 정부가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한나라당 또한 통상압력을 감안해 1500cc 미만 승용차에 대한 특소세 폐지주장을 철회하고 인하폭만을 늘리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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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여당, 조기 인하로 돌연 입장 바꿔

정치권이 내년 총선을 의식한 선심성 정책을 내세우면서 혼선을 빚었다는 지적도 있다.
올 연말까지는 특소세 인하가 전혀 없을 것이라던 민주당은 갑작스럽게 특소세 인하방침을 들고 나왔다.
한나라당도 이번 특소세 인하를 빌미로 감세정책을 주장하고 있다.


특소세법 개정논란은 지난 98년 한·미 자동차협상에서 합의했던 ‘특소세 경감 조치’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부가 2005년까지 자동차 세율 인하를 검토하겠다는 약속을 내놓은 것이다.
특히 2002년 8월에 열린 한·미 통상현안 점검회의에서 미국측의 특소세율 체계 단순화 요구에 대해 현행 3단계에서 2004년부터 2단계로 개편하는 방안까지 제시했다.


이를 위해 재경부는 지난해 5월 조세연구원에 승용차 특소세법 개정을 위한 연구용역을 의뢰하기도 했다.
또한 이 결과를 바탕으로 하반기 공청회를 열어 의견을 수렴한 뒤 법 개정안을 정기국회에 제출해 내년부터는 시행한다는 계획이었다.
특히 세율 수준과 배기량 기준은 세부담의 형평성과 교통대책 및 환경정책 등을 고려한다는 방침까지 정했다.


따라서 정부는 한 달 전만해도 특소세를 조기에 인하할 마음이 없었다.
지난 6월18일 김진표 경제부총리는 국회에서 열린 초·재선 의원모임에서 “자동차 특소세 인하 발표를 당기면 대기수요가 생기기 때문에 인하하기 어렵다”며 부정적인 입장을 분명히 했다.
또한 김 부총리는 인위적인 경기부양은 안 된다며 추가 경기부양조치가 없을 것임을 시사하기도 했다.
LG경제연구원 오문석 상무는 “김 부총리의 발언에 대해 올초부터 재계가 요구해온 특소세 인하를 수용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으로 해석했다.


이런 가운데 특소세 논란에 기름을 붓는 사건이 발생했다.
연말까지는 승용차의 특소세율 인하가 어렵다던 정부와 민주당이 지난 7월3일 조기 인하방침을 발표했다.
정부와 여당은 의원입법을 통해 입법기간을 단축해서라도 조기 시행하겠다는 결의까지 보였다.


여기에 야당도 자기 주장을 내세우면서 사태는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한나라당은 특소세 품목에 가전제품을 추가할 것을 요구했다.
더 나아가 고급가구와 모터보트, 골프용품 등도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여야가 경기부양이라는 본래의 취지와는 상관없이 특소세 인하문제를 당리당략 차원에서 활용했다는 비난을 면키 어렵게 됐다.


결국 한나라당이 주장해온 근로소득세 경감 등 감세방안을 정부가 받아들이는 대신 추경예산 규모는 정부가 제출한 4조2천억원이 삭감 없이 통과되는 거래가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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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자동차업계는 뒤늦게나마 자동차 특소세 인하가 결정된 것에 환영하는 분위기다.
업계 전문가들은 특소세 인하로 올해 자동차 판매량이 지난해에 비해 4~5만대까지 늘어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자동차업체로서는 적지 않은 혜택을 보는 셈이다.


그러나 세법개정안 국회 통과가 지연되는 과정에서 업계가 되레 피해를 입었다는 지적도 일고 있다.
관련 법안의 국회통과 여부가 오락가락하는 과정에서 피해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자동차업계에 비상이 걸린 것은 지난 7월3일 특소세 인하방침이 나오면서부터다.
이때부터 자동차업계는 사실상 8일간 출고가 올스톱되는 개점휴업사태를 겪어야 했다.
쏟아지는 미출고 차량으로 재고가 97년 6월 이후 최대수준인 12만대에 육박하는 등 손실도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런 현상이 벌어진 것은 정부 방침이 확정될 때까지 소비자들이 구매행위를 중단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동안 한창 구매상담을 해온 고객들은 구입결정을 미루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미 자동차를 구입한 고객들도 특별소비세 인하 때까지 출고를 연기하거나 계약을 해지해 줄 것을 요구하면서 일선 영업점들은 곤혹을 치러야 했다.
언제부터 특소세 인하혜택을 받고 차를 살 수 있는지, 혹은 최근 구입한 차에 대해서 특소세 인하 소급혜택을 받을 수 있는지 등을 묻는 문의전화만 빗발쳤다.


문제는 예상보다 여야 합의가 오래 걸린 데다 방향도 갈피를 잡을 수 없으면서 업계가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는 것이다.



국회 통과 지연으로 업계 막대한 피해

상황이 이렇게 되자 자동차 업계가 일대 혼란에 빠져 버렸다.
한국자동차공업협회에 따르면 개편발표 이후 8일 동안 국내 완성차 재고물량은 현대차 6만대, 기아차 3만8천대, GM대우차 7500대, 쌍용차 5300대, 르노삼성차 3340대 등이다.
대기수요자의 급증으로 재고량이 적정수준의 두 배를 상회한 것이다.
매출에 있어서도 하루 평균 563억원씩, 대략 3500억원의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집계됐다.


미출고 차량과 기존 재고가 뒤엉켜 출하장마다 빼곡이 쌓였다.
현대차의 경우 전국 각지의 출고센터마다 미출고 차량을 최대한 분산시키고 있지만 포화상태에 도달했다.
기아차도 소하리출하장과 화성출하장이 이미 꽉 차서 시화부지와 서산부지로 미출고 차량을 옮겼다.
때문에 자동차업계는 여야합의가 조금만 더 지연됐다면 조업단축이나 생산중단까지 갔을 것으로 보고 있다.


더욱이 완성차 업계의 생산 차질은 도미노 현상으로 이어진다.
부품업계의 부품 조달 축소와 생산 중단으로 확산될 수 있다.
한국자동차공업협회에 따르면 1차 부품업체 1200여곳을 비롯해 총 1만여곳에 이르는 업체가 8일 동안 대략 280억원의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집계됐다.
서울증권 최대식 연구원은 “최근 차업계는 파업과 내수부진에 따른 재고증가 등의 이중고를 겪고 있다”며 “조속한 특소세 인하결정이 절실했다”고 지적했다.


급기야 한국자동차공업협회는 지난 10일 국회가 조속히 특소세 개편안을 통과시켜 줄 것을 요구하는 건의문을 발송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기존 계약고객의 해약사태를 막기 위해 이들에게도 소급혜택을 줘야 한다는 주장을 덧붙이기도 했다.


이런저런 부정적인 여론에 밀려 결국 국회는 뒤늦게나마 여야합의를 이뤘다.
하지만 일각에선 경기진작책이 오히려 내수경기의 발목을 잡은 셈이라며 이번 사태에 대한 책임을 묻기도 한다.
업계 관계자들은 “뒤늦게나마 결정된 특소세 인하방침이 앞으로 제대로 된 효과를 발휘해 빠른 시일 내에 판매가 정상화돼야 할 것”이라고 주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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