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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 pl법 도입 1년 성적표
[비즈니스] pl법 도입 1년 성적표
  • 류현기 기자
  • 승인 2003.07.2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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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부 김아무개(38)씨는 지난달에 구입한 핸드믹서로 과일을 갈다가 손가락을 크게 다쳤다.
김씨가 사용한 핸드믹서에는 ‘위험경고 문구’가 없었다.
하지만 김씨는 핸드믹서를 구입할 때부터 칼날이 노출되어 사고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조사를 상대로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만약 김씨가 제조물책임(PL)법을 들어 문제를 제기했다면 배상을 받을 수 있었지만, 이를 알지 못했던 김씨는 병원비를 고스란히 자신의 돈으로 지불했다.
제조물의 결함으로 손해가 발생할 경우 소비자가 사업자의 고의, 과실을 입증할 필요 없이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소비자의 권리를 강화한 제도로 평가받는 PL법이 도입된 지 1년이 됐다.
이 제도가 도입될 때만 해도 기업측에서는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PL법이 시행될 경우, 소송 빈발로 업체가 심각한 타격을 입을 것”이라며 적극적인 반대 입장을 편 것이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결과는 싱거웠다.
PL법 시행 후 1년 동안 단 한 건의 소송도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업측에서 걱정했던 소송 사태는 기우에 불과했다.
산업자원부도 PL법 시행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하고 손을 놓았다.
때문에 현재 산자부에는 PL법을 전담하는 부서는 물론이고 전담 사무관조차 단 한 명도 없다.
하지만 소송이 1년 동안 단 한 건도 없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소비자가 기업에서 직접 배상을 받고 소송으로까지 가져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PL법이 소비자에게 유리하게 돼 있다고는 하지만 소비자 입장에서는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하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시간적·금전적으로 부담이 크고 반드시 승소한다는 보장도 없기 때문이다.
물론 기업도 자신들의 이미지 관리를 위해 합의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기업이 적극적으로 합의를 하는 이유 중에는 ‘국내 최초 PL소송 사례’라는 오명을 피하기 위한 노력도 한몫 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부작용이 발생하기도 한다.
전문 신고꾼이 기업을 협박해 돈을 뜯어내는 경우도 일어나기 때문이다.
기업 입장에서는 비록 심증은 가지만 물증이 없기 때문에 울며겨자먹기로 돈을 지불하기도 한다.
또한 차라리 소송으로 가면 승소할 수 있는 사안인데도 기업측에서 민감하게 반응해 합의를 보는 경우도 많다.
한국PL협회 박영식 원장은 “원인을 분석하면 회사 책임이 아님에도 책임을 지는 경우도 있다”며 “기업측의 합의 유도가 반드시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다”고 지적한다.
소송이 없는 또 다른 이유는 PL법 사건을 제대로 처리할 만한 정부 기관이 없기 때문이다.
소비자가 PL사건으로 신고를 해도 결국 소비자보호원으로 넘어가 다른 소비자신고 사례와 함께 처리되는 경우가 많다.
박 원장은 “PL법에 대해 모르는 소비자가 대부분이고 중소기업도 PL법이 있다는 정도만 아는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
PL법 관련 소송이 한 건도 없었다는 사실 자체에 이의를 제기하는 입장도 있다.
재정경제부 소비자정책과 김형원 사무관은 “법원에서 처리되는 사건을 구별할 수 없어서 그렇지 PL법 관련 사건은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김 사무관은 “만약 소송이 한 건도 없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실제로 신체에 문제가 생기는 정도의 사고는 발생 빈도가 낮기 때문에 소송까지 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PL법은 제품 결함으로 신체나 재산상 손해가 발생하는 경우에만 해당된다.
하지만 PL법 시행으로 소비자의 권리가 증진된 것은 사실이다.
예컨대 전자제품 PL상담센터에는 지난 1년간 300여건의 상담이 접수돼 그중 상당수가 보상을 받았다.
리콜 횟수 또한 늘었다.
2001년에 66건에서 PL법이 시행된 2002년에는 106건(자발적 리콜 90건)으로 60% 이상 증가했다.
기업은 제품 표시상의 결함을 줄이기 위해 경고표시 사례를 연구하고 이를 제품에 반영하기 시작했다.
소비자의 제품 오사용 비율을 줄이고 올바른 제품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다.
예컨대 LG홈쇼핑은 제품의 결함으로 사고가 나면 ‘소비자경보’라는 것을 발령한다.
텔레마케터의 모니터에 ‘브로드캐스팅바’라는 경보를 띄워 전 상담원이 제품에 대한 경고 조치를 하도록 하는 것이다.
PL보험에 가입한 회사도 늘었다.
산업자원부에 따르면 PL보험 실적은 지난해 7월말 가입건수 1658건(보험료 합계 48억원)에서 올해 1분기까지 1만4273건(283억원)으로 가입이 계속 증가 추세에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소기업청은 재판외 분쟁해결기구인 PL상담센터를 각 업종 단체별로 운영하도록 하고 있다.
소비자와 기업이 PL관련 분쟁을 상담을 통해 일차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에 따라 전자, 자동차, 식품 등 14개 업종별로 PL센터가 운영되고 있다.
PL센터는 소비자 상담, 피해구제 알선, 분쟁 조정, 결함 및 사고조사, 기업에 대한 안전 관련 정보제공 등을 본래의 업무로 하고 있다.
그러나 PL센터가 제기능을 못하고 있다.
PL센터의 대부분은 조사는 꿈도 못꾸고 조정이나 상담 수준에 그치고 있다.
PL센터의 운영비를 각 업종 단체만 보조하고 있을 뿐 정부에서는 뒷짐만 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력도 전기, 전자제품 센터가 고작 5~6명 정도의 직원이 있을 뿐 나머지 PL센터는 1~2명이 근무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나마 전임자는 전혀 없는 경우도 많다.
전자제품 PL상담센터 관계자는 “인력과 재정 부족으로 조사를 나간 경우가 단 한 번도 없다”고 밝혔다.
게다가 14개 센터 가운데 12개 센터가 서울에 위치하고 나머지 2개 센터도 서울 인근에 위치하고 있어 지방의 소비자나 기업은 원천적으로 이용에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다.
PL법에 대비하는 과정에서 우월적 지위에 있는 기업이 관련 기업에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홈쇼핑업체의 경우 많은 중소기업 제품들을 취급하기 때문에 PL관련 분쟁에 노출돼 있다.
분쟁을 피하기 위해 홈쇼핑업체는 납품업체에 고액보험가입을 강제하거나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경우가 많다.
홈쇼핑에 물품을 납품하는 업체들은 ‘약자’의 입장이기 때문에 울며겨자먹기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PL보험 가입률 증가는 ‘도덕적 해이’라는 또 다른 문제를 유발하기도 한다.
기업들이 “보험에 가입했으니 안심해도 된다”는 생각에 PL관련 대책을 소홀히 하기 때문이다.
PL 관련 소송이 없고 경기가 어려워지자 보험 해약률이 증가하고 있다.
PL법을 시행한 지 1년이 지났지만 기업의 인식은 아직 기대에 못 미치고 있다.
특히 중소기업은 심각하다.
중소기업청이 실시하는 PL법 교육을 받은 중소기업은 전체 중소기업수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PL법 관련 전문가들은 “PL법과 관련해 기업의 인식이 정착되려면 5~6년의 기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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