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6 17:03 (금)
[커버] 보험 계약자는 봉? 이젠 왕!
[커버] 보험 계약자는 봉? 이젠 왕!
  • 장승규 기자
  • 승인 2003.08.08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8월말부터 상품 비교·공시 의무화


“이런 식으로 보험사를 1위부터 18위까지 줄 세우는 게 말이 됩니까. 보험 상품이 공산품처럼 무조건 싸다고 좋은 것도 아닌데, 평가 기준이 너무 엉터리예요. 하위 순위에 든 보험사는 가뜩이나 어려운데 아예 죽으라는 소립니까. 일부 보험사는 소송을 불사하겠다고 나서고 있어요.” 한국소비자보호원이 지난 7월21일, 우리나라에선 처음으로 내놓은 ‘종신보험상품 비교 조사’ 결과를 접한 보험업계 관계자는 격한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보험 상품의 비교 자체가 낯선 데다, 보험료, 해약 환급금 등 민감한 내용을 한눈에 비교할 수 있게 정리 해 놓아 충격이 더했다.
보험료가 비싼 것으로 ‘밝혀진’ 보험사엔 당장 고객의 항의 전화가 빗발쳤고, 영업에 ‘비상’이 걸렸다.
그러나 보험사들이 정말 맘을 단단히 먹어야 하는 건 이제부터다.
종신보험 상품 비교는 작은 시작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8월30일, 개정 보험업법이 발효되면 싫든 좋든 협회 차원에서 무조건 보험 상품을 비교, 공시해야 한다.
속속 등장한 보험 소비자 단체들은 사업비 등 보험료 산출 근거를 밝히라는 압력을 한층 강화하고 있다.
폐쇄적인 보험시장에도 어느새 소비자 주권시대가 성큼 다가온 것이다.




소보원의 종신보험 상품 비교는 사실 절반의 성공에 그쳤다.
우선 시도 자체가 의미 있다는 데는 대개 이견이 없다.
“지난 2월부터 준비 작업을 했어요. 그동안 보험 소비자는 설계사가 권하는 상품을 사느냐 마느냐 선택하는 게 전부였죠. 미처 못 짚은 부분도 있지만 보험 상품도 비교 가능하다는 걸 알렸다는 데 의미가 있어요.” 이번 조사를 이끈 소보원 장학민 서비스거래팀장의 말이다.
그러나 조사 내용을 꼼꼼히 살펴보면 적잖은 문제점이 발견된다.
평가 결과에 ‘분노’한 보험사들도 이 약점을 집중 공격했다.
소보원은 생보 시장의 현재 주력 제품인 종신보험 상품을 한 보험사당 1개씩만 비교했다.
게다가 상품 정보를 생보협회를 통해 해당 보험사에서 받아, 대상 선정의 공정성에 논란이 일고 있다.
자사의 여러 종신보험 상품 중에서 구석에 처박아 놓고 잘 팔지 않는 가장 싼 상품을 제출해 좋은 등수를 받는 것도 가능했다는 뜻이다.



소보원 등급 발표에 보험사 ‘쇼크’

각종 특약을 제외한 채 주 계약만 놓고 가격 비교를 한 것도 논란거리다.
ING생명 노구미 차장은 “종신보험에 들 때 주 계약만 가입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며 “보통 질병이나 재해 관련 특약을 넣게 되는데, 보험사에 따라 주 계약을 비싸게 하고 특약을 싸게 하거나, 반대로 주 계약을 싸게 하고 특약을 비싸게 하는 등 판매 전략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를 무시하고 주 계약 보험료만 단순 비교하는 것은 객관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여기다 서비스의 질까지 고려하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그러나 기존 보험에 비해 종신보험의 상품 비교가 훨씬 쉬운 것만은 분명하다.
보험소비자연맹 조연행 사무국장은 “기존 상품은 보험료가 싼 대신 위험을 교통, 재해, 일반 사망 등으로 세분화해 그것만 보장해 준다”며 “이 경우 보험사마다 보장 내용이 다 달라 상품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
거기 비하면 종신보험이나 정기보험은 금방 비교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종신보험의 확산이 보험 상품 비교의 활성화를 촉진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보험사들이 소보원 평가에 강하게 반발하는 진짜 이유는 딴 데 있다.
바로 ‘순위’다.
소보원은 조사 대상인 18개 보험사를 각 부문별로 1위부터 18위까지 순위를 매겼다.
생보협회 관계자는 “당초 소보원과 상위 몇 개사만 공개하거나 ABC로 등급을 매겨 발표하는 방안을 협의했는데, 소보원에서 막무가내로 전부 발표해 버렸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소보원 관계자는 “처음부터 사업자 순위 매기기가 관심사는 아니었지만 소비자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한다.


물론 보험사들이 느끼는 억울함은 ‘자업자득’인 측면이 많다.
오죽 정보 공개를 안 했으면 ‘비전문 기관인’ 소보원에서 나섰겠냐는 것이다.
소보원은 종신보험에 이어 손해보험 상품 비교도 곧 실시할 계획이다.


그러나 보험사들이 상품 비교의 공정성과 객관성에 이런저런 불만을 쏟아 내고 있을 때 보험 소비자들의 관심은 더 민감한 영역으로 향했다.
단순한 가격 비교 차원을 넘어 가격 산출의 근거를 밝히라고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보험료 논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업비다.
소비자가 내는 보험료에는 설계사에게 주는 수당 등 보험사업 유지에 들어가는 비용이 포함돼 있다.
그건 나중에 돌려받을 수 없는 일종의 수수료다.
고객을 직접 찾아 나서 상품을 팔아야 하는 특성상 보험은 다른 상품에 비해 이 ‘수수료’ 비중이 상당히 높다.
문제는 은행이나 투신사는 고객이 내는 돈 중에서 자신들이 가져가는 수수료를 투명하게 공개하는 반면, 보험사는 이걸 전혀 밝히지 않고 있다.
약관에 이해하기 어려운 형태로 표시하거나(표 참조) 개별 보험사 전체의 사업 비율을 업계 평균을 100으로 놓고 상대 비교하는 ‘지수 방식’으로 공시하는 데 그쳤다.



예정 사업비보다 실제 사업비 밝혀야

그러나 보험사에 유리한 이런 방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됐다.
최근 금융감독원은 보험 소비자가 예정 사업비를 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공시 제도를 개선키로 했다.
“2000년 4월부터 보험 가격이 자유화됐죠. 보험사가 자율적으로 가격을 조정할 수 있게 해, 계약자에게 좀 더 낮은 가격으로 상품을 제공하는 경쟁체제로 가라는 의도였어요. 보험 소비자가 선택의 기회를 정확하게 행사하고, 이에 따라 보험사들이 선의의 경쟁을 하는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무엇보다 사업비 등 보험 정보가 투명하게 공개돼야 합니다.
” 금융감독원 박병명 상품계리실장의 말이다.
금융감독원은 지난 7월 보험 상품 공시 실태를 점검해 다양한 위반 사례를 적발했다.
(표 참조)

보험소비자연맹 조연행 사무국장의 주장은 여기서 한발 더 나간다.
조 국장은 사업비를 공시할 때 ‘예정’ 사업비보다 오히려 ‘실제’ 사업비를 밝혀야 한다고 지적한다.
조 국장의 주장을 이해하려면 약간 전문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보험은 기본적으로 예정률을 사용한다.
미래의 불확실성 때문이다.
즉 보험료를 정할 때, 사망 확률, 금리, 사업비 등을 미리 예상해 그걸 기준으로 삼는다.
이 때 대부분 과거 통계치를 ‘할증’해 사용한다.
보험사의 안정성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건 실제 꼭 필요한 금액보다 보험료를 더 걷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보험에는 배당 제도가 있다.
바로 배당부 보험 상품이다.
예정률을 쓰는 대신 이익이 남으면 사후 정산을 통해 돌려주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대부분의 보험사가 무배당 상품만 팔고, 배당 상품을 거의 내놓지 않고 있는 게 문제다.
조 국장은 “무배당 상품은 나중에 탄생한 상품이다.
배당을 없애고 대신 가격을 크게 낮춰 경쟁하겠다는 의도였다.
신생 보험사들이 경쟁 전략으로 도입하기 시작한 거다.
따라서 사후 배당이 없는 무배당 상품은 예정률이 아니라 실제율을 공시하는 게 너무나 당연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 사업비 공개는 보험사들이 가장 꺼리는 부분이다.
금융감독원이 추진하고 있는 예정 사업비 공시조차도 여전히 논란거리다.
“소비자 입장에선 당연히 더 세세한 부분까지 공시되는 게 좋죠. 하지만 보험사의 영업 전략이 누설되는 건 곤란해요. 사업비가 다 밝혀지면 과당 경쟁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높아요. 과당 경쟁이 당장은 소비자에 유리한 듯하지만 장기적으론 그 부담이 그대로 소비자에게 돌아갑니다.
” 보험개발원 보험연구소 안철경 동향분석팀장의 말이다.



외국계 보험사 약진이유 곱씹어봐야

같은 연구소 조혜원 선임연구원은 “영국에서 보험료 중 모집 중개인 수수료와 투자 관련 경비로 얼마를 가져가고 실제 적립 금액이 얼마나 되는지 알려 주는 건 분명하지만 모든 상품이 그런 건 아니고 투자형 보험 상품에 한할 뿐”이라며 “보장성 보험 상품은 그런 정보를 주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그는 “보험 상품의 특성을 잘 모르는 일반 소비자에게 사업비를 모두 공개할 경우 보험 상품 자체에 대한 불신만 커질 수 있다”고 덧붙인다.


서울산업대 경영학과 류근옥 교수는 “보험 가격 자유화 이전에는 정부가 가격을 통제해 예정 이율이나 사업비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가격 자유화 이후에는 사정이 다르다.
자유 경쟁 아래서 가격이 꼭 원가에 마진을 더해 결정되는 건 아니다.
정부는 독과점 횡포가 발생하지 않도록 경쟁 여건만 갖춰 주는 데 그쳐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업체들이 적정 이윤을 가져가고 있다고 말할 때, 소비자들은 흔히 ‘바가지’를 쓰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어쨌든 보험사가 소비자 눈치 보지 않고 일방적으로 가격을 정하던 ‘호시절’은 분명 다시 오기 어렵다.
사실 그동안 한국의 보험 소비자는 제대로 된 보험 ‘서비스’를 경험해 본 적도 드물다.
보험소비자협회 이미숙씨는 “서로 최고의 서비스를 내세우지만 보험 가입하고 실제 서비스 해주는 게 뭐 있냐”며 “고객 끌 때뿐이고, 가입하고 1년만 지나면 벌써 보험사 태도가 달라진다”고 항변한다.


보험관련 소비자 상담만 10년 넘게 했다는 한 전문가는 “보험만큼 장사하기 좋은 게 없다”고도 한다.
일단 보험료를 받으면 웬만해선 돌려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보험금 지급 사유가 생기면 가능한 한 안 주거나 늦게 주려고 든다.
보험료 분쟁이 생기면 보험사가 흔히 쓰는 무기가 ‘채무 부존재 소송’이다.
그런 소리를 들으면 소비자는 막막해진다.
그는 “보험사들이 피를 좀 봐야 한다”며 “가입을 까다롭게 하는 대신 사유가 생기면 즉시 지급하는 외국계 보험사가 최근 약진하는 이유도 한번 생각해 봐야 한다”고 말한다.


전문가들은 투명한 정보 못지않게 소비자의 인식 전환을 강조한다.
소비자가 적극인 행동에 나서지 않는 한 ‘시장의 자율적인 조정 기능’은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