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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임금피크제, 약인가 독인가
[포커스] 임금피크제, 약인가 독인가
  • 황보연 기자
  • 승인 2003.08.0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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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노사간 도입 놓고 신경전…정년 연장·임금 감소폭 등도 논란거리


임금피크제를 도입할 것이냐, 말 것이냐. 금융권을 중심으로 임금피크제를 둘러싼 논란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임금피크제란 정년을 보장해 주는 대신 일정 연령이 지난 시점부터 임금을 계속 줄여 가는 것을 말한다.
최근 금융노조가 임단협 협상 과정에서 정년을 현행 58살에서 63살까지 연장하는 대신 늘어난 나이만큼에 대해 임금피크제를 도입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이면서 노사가 팽팽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임금피크제는 고령화 사회가 빠르게 진전되고 있는 데다, IMF 이후 조기 퇴직까지 활성화되면서 고용 안정을 위한 새로운 해법으로 거론돼 왔다.
지난해 한국노동연구원의 기업체 실태 조사에 따르면, 전체 1443개 기업 중 정년 제도를 갖고 있는 곳은 전체의 76.2%에 달한다.
반면 조사 대상 기업에 다니는 직원 중 50살 이상은 전체의 5%에 그치고 있다.
상당수의 기업이 정년 제도를 유지하고 있지만 대부분은 정년이 되기 전에 회사를 떠난다는 것이다.
실제 같은 조사에서 지난 3년간 고용 조정을 실시한 적이 있는 사업체의 대다수가 명예 퇴직자를 선정하는 가장 큰 기준으로 근속 연수와 연령을 꼽았다.


특히 IMF 이후 대대적인 구조조정의 몸살을 겪어야 했던 금융권은 조기 퇴직 열풍이 좀 더 심각한 지경이다.
정년이 엄연히 58살로 규정되어 있지만 50살이 넘어서도 임원이 되지 못한 사람들은 조용히 회사를 떠나야 한다.
한 시중은행의 경우 지난해 합병을 앞두고 만 51살 이상의 직원들은 대부분 명예 퇴직시켰다.
또한 지점장들은 모두 3년 계약직으로 전환시켜 실적에 따라 재계약을 결정하는 식이다.
이 은행에 다니는 지점장 김아무개씨는 “사실상 정년이 50살이 되다 보니 나이가 들면 안정적으로 일을 할 수가 없어 업무 성과도 더 나오지 않는 실정”이라고 전했다.



신용보증기금, 지난달 국내 첫 도입

심지어 50대는 물론이고 40대까지 자리 보존을 하기 힘들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한동안 45살이 정년이라는 뜻의 ‘사오정’이 유행이었지만 지금은 그 의미가 또 달라지고 있다”며 “사오정의 ‘오’가 5에서 0로 바뀌어 지금은 40살이 정년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라고 말한다.
자연스레 이미 정해져 있는 정년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임금피크제를 도입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 고개를 들게 된 것이다.


이런 가운데 신용보증기금은 7월1일부로 국내 기업중에서 처음으로 임금피크제를 도입하면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앞으로 신용보증기금에서 만55살이 되는 직원들은 채권 추심이나 경영 지도 등 별정직으로 업무를 옮기고, 연차적으로 임금을 줄여 받게 된다.
첫해엔 종전 임금의 75%, 그 이듬해엔 55%, 세 번째해엔 35%를 주는 방식이다.
퇴직금은 임금피크제가 적용되는 시점에서 중간 정산을 해줘 불이익을 없애고 이후 3년은 변경된 급여를 기준으로 다시 퇴직금을 지급하도록 했다.


금융노조 신용보증기금지부 남상종 위원장은 “이번 합의는 종전의 임금피크제 개념보다는 일자리 나누기 개념인 워크쉐어링(Work Sharing)에 가깝다”고 설명한다.
무조건 임금을 줄이는 게 아니라 55살이 넘으면 업무 자체의 난이도가 떨어지는 직군으로 전환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에 따른 임금조정이라는 주장이다.
또한 정년 퇴직 이후에도 본인의 희망에 따라 최대 3년간 계약직으로 근무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이런저런 필요성이 부각되고 있는데도 임금피크제가 도입되기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어떤 방식으로 실시할 건지에 따라 노사 양쪽의 이해 관계가 첨예하게 엇갈리기 때문이다.
금융노조 문태석 정책부국장은 “자칫 임금 삭감을 주안점으로 둔 임금피크제가 도입될 수 있다”며 “고령자들의 지위와 역할을 축소시켜 되레 조기 퇴직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악용될 소지도 있지 않느냐”며 우려를 표명했다.


사용자 쪽의 분위기는 좀 더 냉랭하다.
은행연합회 노사협력팀 공성길 팀장은 “굳이 임금피크제를 도입하지 않더라도 일정 연령이 되면 후선으로 배치되기 때문에 임금 감소 효과가 있다”고 주장한다.
은행들이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동안 노사 양쪽이 모두 적극적으로 임금피크제를 제기하지 않았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지난 7월30일 시중은행을 비롯한 31개 금융기관의 산별 교섭장에서도 이런 분위기는 물씬 느껴졌다.
금융 노조가 정년 연장과 임금피크제를 연동해서 논의할 수 있다는 의견을 보이긴 했지만, 정년 연장 쪽에 더 마음이 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다시 말해 정년 연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에는 논의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임금피크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면 노사 모두 첨예하게 부딪칠 쟁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임금피크를 적용할 연령을 언제부터로 할 것인지, 임금 감소폭은 어느 정도로 할 것인지가 문제가 된다.
사용자 쪽은 대체로 50대 초반부터 임금을 줄여 나가자는 데 비해 노동계는 적어도 55살 이후가 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정부도 연말까지 가이드라인 마련

또한 회사를 그만두기 직전 3개월간의 평균 임금을 산정해서 지급하는 퇴직금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지도 쟁점으로 떠오를 소지가 크다.
국민은행 김정태 행장이 지난 4월 임금피크제를 도입할 뜻을 밝힌 뒤 인사팀에서 도입 방안을 검토해 왔지만 이렇다 할 진척 사항이 없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제도를 도입한 신용보증기금 노사도 합의점을 찾기까지 1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여기에다 기업마다 사정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노조 내부에서도 의견이 엇갈리는 대목이 있다.
“50살이 넘으면서 직장을 떠날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은 대부분 시중은행입니다.
이에 비해 국책 기관들은 정년이 지켜지는 곳이 많죠. 이런 입장에서 보면 괜히 임금만 줄어드는 거 아니냐는 생각에 소극적으로 나올 수가 있어요.” 한 시중은행노조위원장의 말이다.


이런 가운데 정부는 연말까지 임금피크제 도입에 필요한 모델 개발이나 가이드라인 등을 마련해 제시할 방침이다.
기본적으론 기업 자율에 맡길 일이지만 고령자 고용 촉진의 차원에서 임금피크제 도입을 권유하겠다는 것이다.
한국노동연구원 김정한 박사는 “임금피크제를 도입하는 데 있어서 노사 모두 전향적인 자세가 요구된다”고 조언한다.
사용자는 단순히 고령자의 임금 삭감 방안으로 악용해선 안 될 것이며, 노조 쪽도 저성장기에는 고용 유지에 우선 순위를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


71년 62.3살이었던 평균 수명은 2000년 들어 75.9살로 늘어났다.
앞으로 기대수명을 80살로 잡을 경우 만일 45~50살에 일찌감치 회사를 그만두게 되면 30~35년을 일하지 않고 보내야 한다.
국민연금을 받을 수 있는 60살까지도 10~15년을 기다려야 한다.
어떤 해법을 찾든지 간에 가만히 앉아서 노후를 맞이할 수만은 없는 다급한 사정이 여기에 있다.







일본에선 어떻게 하나


일본의 기업들은 정년 이후의 일자리에 더 큰 관심을 보인다.
한국 기업들이 정해져 있는 정년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는 것과 대비되는 모습이다.
한국노동연구원 김정한 박사는 “고령화 사회에 먼저 진입한 일본의 기업들은 70년대 중반에 이미 정년을 55살에서 60살로 연장하는 대신 임금을 조정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정년제를 폐지했거나 재고용, 근무 연장 등을 통해 65살까지 직원을 고용하고 있는 기업의 비중은 96년 24.3%에서 2002년에 68.3%까지 늘어났다.
95년 4월 고령법 개정으로 60살 정년이 의무화된 것도 이런 산업 현장에서의 자발적 움직임이 뒷받침이 됐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예컨대 산요전기는 지난 2000년 4월 노사 합의에 따라 ‘60살(정년) 이후의 고용 연장 제도’를 도입했다.
보직자를 제외한 모든 사원이 해당되며, 본인이 희망하는 경우에 한해서만 실시된다.
예컨대 65살까지 일을 계속하고 싶은 사람은 55살이 되는 시점부터 종전 임금의 25~30% 정도를 적게 받아야 한다.
또한 정년까지는 원칙적으로 현직을 유지시켜 주지만, 그 이후에는 고령층에 맞는 직무로 바꾸어 준다.


무엇보다 이런 제도들은 98년부터 노사가 공동으로 착수한 고용 및 처우 개선을 위한 프로젝트의 결과물이라는 데에 의미가 있다.
얼핏 보면 산요전기의 사례는 국내 기업 신용보증기금의 경우와 비슷하다.
하지만 일본에선 55살 이후의 임금 삭감폭이 그리 크지 않다는 점과 이런 사례가 업계에서 드물지 않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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