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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퍼니] 산업은행, 장기 비전 선포
[컴퍼니] 산업은행, 장기 비전 선포
  • 장승규 기자
  • 승인 2003.08.1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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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은행, 장기 비전 수립…경영 자율권 법제화, 수익 모델 확보 선행돼야


“세계 수준의 국제 투자은행을 꿈꾼다.
” 지난 1월19일, 한국산업은행이 금융연구원의 연구 용역 결과를 토대로 내놓은 장기 비전이다.
산업은행은 이를 위해 1단계로 2005년까지 우선 기업금융 전문은행으로 입지를 탄탄하게 다지고, 2단계로 2011년까지 아시아의 리딩뱅크로 도약한다는 세부 계획도 발표했다.
이에 따라 지난 2월엔 대대적인 조직 개편을 단행하기도 했다.
산업은행 등 국책은행의 자율 경영 논의도 다시 불붙었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변화된 시장 환경에 맞춰 국책은행에 더 많은 권한을 주는 방향으로 관련 법령을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이때만 해도 산업은행의 발전 방향은 확실하게 가닥을 잡아 가는 듯했다.



조직 개편 밥 먹듯이…모호한 정체성은 그대로

그러나 최근 나온 설문 조사 결과는 전혀 다른 사실을 말해 준다.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 산업은행지부가 실시한 설문 조사에서 직원들은 산업은행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 요인으로 모호한 정체성(36.2%)을 가장 먼저 꼽았고, 총재가 해결해야 할 최우선 과제로 명확한 비전 제시(47.2%)를 들었다.
상당수 구성원이 여전히 산업은행의 ‘비전’에 의구심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산업은행의 한 관계자는 “선언적인 비전만 있고 현실성 있는 비전이 없다고 생각한다.
아시아 리딩뱅크, 좋은 말이지만 그걸 어떻게 달성할 건지 구체적인 방안은 솔직히 하나도 없다.
비전이 너무 자주 바뀌는 것도 문제다.
97년 이후 조직 개편을 12번 했고, 총재도 5명이나 거쳐 갔다.
금방 짐 싸고 자리 바꾸는 게 일이지만, 경영 자율권 강화 등 핵심적인 문제는 하나도 나아진 게 없다”고 말한다.
그는 올해도 크게 달라진 게 없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연초에 나왔던 예산, 인사에서의 자율성 확대를 위한 법령 개정 논의는 3월 이후 쑥 들어간 상태다.
그 사이 우여곡절 끝에 총재도 바뀌었다.


물론 산업은행이 국책은행으로 남는 한 자율성 논란은 항상 따라다닐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산업은행이 경영 자율권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정부에서 일방적으로 지시해 놓고 문제가 생기면 책임을 모두 떠넘기는 행태가 수없이 반복돼 왔기 때문이다.
그럴 바에야 자율권을 달라는 주장이다.
시장의 환경 변화도 무시할 수 없다.
금융시장이 자유화되고, 시중은행이 대형화되면서 산업은행의 고유 영역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많은 업무에서 시중은행과 직접 경쟁하지 않으면 안 된다.
투자은행을 지향한다면 자율성 확대는 더 절실한 문제가 된다.


산업은행 안동명 경영전략팀장은 “특별하게 법령이 바뀐 건 없지만, 올 들어 기본 영업계획 안에서 운영상의 재량권이 점차 확대되고 있다”며 “금융시장 불안으로 논의가 잠시 주춤하고 있으나, 어차피 장기적으로 보면 자율성 확대로 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노조의 입장은 좀 다르다.
산업은행 노조 이인기 교육홍보실장은 “지금도 예산 배정이나 정원 조정을 재정경제부에서 일일이 다 한다.
당장은 간섭이 다소 줄었다고 해도 상황이 바뀌면 언제든 문제가 다시 터질 수 있다.
무엇보다 자율성을 제도적으로 보장받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투자은행이 현실성 있는 방향이냐는 의문도 쉽게 해소되지 않고 있다.
안동명 팀장은 “세계적인 투자은행과 당장 경쟁하는 건 분명 무리다.
그렇다고 동북아 금융허브를 하자고 하면서 장소만 제공하고 말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지금부터라도 역량을 키워야 한다.
특정 금융 기법이나 자본력에서는 떨어지지만 고객 측면에서는 산업은행이 상당한 강점이 있다”고 말한다.
금융산업의 발전을 위해선 투자은행이 필요하고, 국내 은행 중에선 산업은행이 거기에 가장 가깝게 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이 투자은행으로서의 성공까지 보장하지는 않는다.
미래에셋증권 한정태 연구위원은 “산업은행의 거래 기업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투자은행 문제는 그것과는 다른 맥락에서 봐야 한다.
아직까지 우리나라엔 투자은행의 마땅한 수익 모델이 없다.
회사채나 주식을 발행해 주는 거론 얼마 못 번다.
결국 M&A나 자산 관리를 해야 하는데 우리나라엔 아직 이 시장이 크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산업은행의 고민은 좀 더 복잡한 문제와 결부돼 있다.
상황이 조금 바뀌긴 했지만 산업은행이 국책은행으로서 해야 할 역할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데는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동의한다.
그동안 산업은행은 장기 외채를 거의 독점적으로 끌어와 이를 기업의 장기 설비 자금으로 공급했다.
외환 자유화 이후 이런 사정이 바뀌었다.
이제는 일반 은행도 외자를 자유롭게 끌어오고 있고, 특히 대기업은 자신의 높은 신용도를 갖고 직접 해외 자본시장으로 나가기도 한다.



“북한·동북아 사업서 투자은행 역할해야”

그러나 재정경제부 은행제도과 이강식 서기관은 “예금을 받아 운용하는 시중은행이 기업의 장기 설비 자본을 공급하는 데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
또 지역 경제 활성화 같은 건 시장 기능으론 감당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앞으로 북한이나 동북아 개발 사업을 추진하는 데도 산업은행이 해야 할 일이 많다”고 말한다.
안동명 팀장은 외환위기 이후 산업은행의 역할이 오히려 더 중요해졌다고 강조한다.
그는 “산업은행의 선도 역할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
IMF 이후 은행들이 쉬운 주택 담보 대출만 하고 리스크가 큰 기업 금융은 꺼린다.
나라 경제 전체로 볼 때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이다.
얼마 전 카드채 사태처럼 회사채 시장이 경색됐을 때 첫 물길을 뚫는 역할도 맡아야 한다”고 말한다.


문제는 기업 금융의 수익성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것이다.
안동명 팀장은 “시중은행이 기업금융을 하지 않으려는 이유가 있다.
리스크가 큰 만큼 높은 수익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업은행은 그걸 하도록 법으로 정해져 있다.
기업금융이 산업은행의 임무인 것이다”고 말한다.
같은 기업 금융을 해도 예금에 의존하는 시중은행은 단기 기업 금융에 그친다.
반면 장기 외채와 산업금융채권을 발행할 수 있는 산업은행은 장기 기업 금융을 주로 한다.
경기가 하락하면 큰 적자를 낼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안 팀장은 “비전에 대한 고민은 결국 기업 금융의 낮은 수익성을 다른 분야의 수익으로 리커버하자는 데서 출발한다.
투자은행 업무나, 컨설팅으로 수수료 수익을 얻어 그걸 산업자금으로 공급 하자는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취약 산업 지원이나, 지역 경제 활성화같이 정부가 정책적으로 지원하는 것까지 산업은행이 직접 벌어 충당해야 하는 건 아니다.
이런 분야는 정부 재정에서 자금이 나온다.
산업은행은 이를 대신 집행하기만 하면 된다.


시중은행의 인수 합병과 민영화에 가려 산업은행 문제는 아직 물밑에 가라앉아 있다.
취임 3개월이 지났지만 유지창 총재는 여전히 신중한 행보를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산업은행이 선언적인 ‘비전’에서만 머물러 있는 한 산업은행의 미래를 둘러싼 치열한 논란이 한 차례 불가피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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