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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선장 잃은 현대호 어디로 가나
[포커스] 선장 잃은 현대호 어디로 가나
  • 이현호 기자
  • 승인 2003.08.1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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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열사별 독립 경영제나 미망인 승계 유력…MH 지분 상속 여부 향방 좌우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의 갑작스런 투신 자살로 ‘현대그룹호’가 좌초 위기에 놓였다.
재계에서는 앞으로 현대그룹의 지분과 경영 구도가 어떻게 바뀔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일각에서는 여러 가지 ‘시나리오’가 제기되기도 한다.
특히 느슨한 형태의 지배 구조를 유지해 온 현대그룹이었던 만큼 구심점이었던 정 회장의 부재로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안개 속과 같은 형국에 처하게 됐다.


한때 80개가 넘는 계열사를 거느리며 재계 서열 1위로 군림했던 현대그룹은 2000년초 형제들간의 경영권 다툼인 이른바 ‘왕자의 난’을 계기로 형제 배분 형태로 자동차·제철(정몽구 회장)과 중공업(정몽준 회장)이 분리됐다.
이후 현대건설과 현대전자 등이 속속 떨어져 나가면서 현대그룹은 현대엘리베이터와 현대상선, 현대택배 등 11개 계열사를 가진 소규모 그룹으로 축소돼 내리막길을 걷게 됐다.


더욱이 핵심 계열사인 현대건설과 현대종합상사, 하이닉스(옛 현대전자) 등은 정 회장의 지분이 모두 정리된 상태이거나 매각 작업에 들어가 사실상 그룹의 영향력을 받지 않고 있다.
실제 정 회장이 직접 지분을 보유한 곳도 현대상선 4.9%와 현대종합상사 1.2% 두 곳뿐이다.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현대그룹은 지난 4월 자산 규모 10조2천억원으로 재계 서열 15위 수준에 머물고 있다.


게다가 현대그룹은 2000년 이후 정 회장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대북사업에만 전념하면서 계열사별로 전문경영인이 맡아 독립 경영 체제를 유지해 왔다.
그룹총수 지위는 사실상 ‘상징적’인 것에 불과하다.
다만 지주회사 격인 현대상선이 현대증권 16.63%와 현대택배 30.1%, 현대아산 40%, 현대정보기술 4.84% 등 일부 계열사에 출자하고 있어 정 회장이 느슨한 지배 구조를 이어 주며 구심점 역할을 했다.



정부·재계 속내는 MK 개입

그렇다면 현대그룹의 향방은 어떻게 결정될까. 일단 정 회장의 자살로 현대그룹이 미약하나마 가지고 있던 구심점을 잃게 돼 해체 작업이 더욱 빨라질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각 계열사별 독립 경영 체계가 힘을 얻고 있는 것이다.
정 회장의 투신 자살 원인이 계열사의 유동성 위기가 아니라 대북사업과 연관돼 있는 만큼 전문경영인의 독자적인 경영으로 위기를 돌파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실제 계열사들은 이미 독자 생존의 길을 견고히 다져 가고 있었다.
현대엘리베이터는 올해 1분기 837억원의 매출을 기록해 지난해 동기보다 매출이 13% 늘어났다.
영업이익과 경상이익도 각각 30%와 60% 증가했다.
국내 3대 택배업체인 현대택배는 경기위축으로 영업 환경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도 올해 1분기 984억원의 매출을 기록하며 10억원의 당기순이익을 달성했다.
현대상선 역시 지난해 자동차 운송 부문 매각을 통해 부채 비율이 1363%에서 442%로 대폭 개선됐다.


재계 등 일각에서는 현대차그룹이 정 회장의 지분을 넘겨받아 현대그룹을 이끌어 갈 것으로 예상하기도 한다.
현대가의 맏형으로 집안사에 대한 책임을 질 것으로 내다보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주회사 격인 현대상선의 정 회장 지분 4.9%, 150억원만 투자하면 현대그룹을 손쉽게 장악할 수 있다.
정부와 재계의 속내도 경제 전반의 안정을 위해 현대그룹을 현대차그룹이 맡아 주길 바라는 눈치다.


특히 정 회장이 자살한 지난 4일 현대차그룹 정몽구 회장이 현장을 진두지휘했던 모습은 이러한 예상에 더욱 힘을 실어 준다.
형제들 중 가장 먼저 계동 사옥으로 달려와 시신을 수습하고, 가족회의를 주재해 맏형 역할을 톡톡히 했다.
빈소에서는 서먹서먹했던 관계를 풀지 못하고 떠나보낸 미안함이 정몽구 회장 얼굴에 가득했다는 것이 주변 사람들의 관측이다.
삼성증권 김학주 자동차팀장은 “정몽구 회장은 장자로서의 입지 때문에 동생이 남기고 간 현대그룹에 대해 어떤 식으로 든 현대차를 관여시킬 수밖에 없다”고 분석한다.


그러나 재계는 의외로 미망인 현정은씨에게 주목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경영권은 장자가 승계하는 게 관례이지만 큰딸은 대학생이고 장남은 고등학생이기 때문에 미망인인 현씨가 현대그룹 경영을 맡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게다가 정 회장의 장모이며 현씨의 모친인 김문희씨가 현대그룹의 지주회사로 부상한 현대엘리베이터의 최대주주로 지분 18.7%를 보유하고 있다.
현대그룹 관계자도 “현씨가 전문경영인을 내세우는 대신 전면에 나서 직접 현대그룹을 장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현씨가 현대그룹을 맡기 위해서는 전제 조건이 있다.
정 회장이 보유한 현대상선 4.9%의 지분과 동시에 정 회장이 지급 보증 형태로 지고 있는 현대상선의 부채 2천억원을 상속받아야 한다.
상속법은 사망자의 재산과 부채를 동시에 상속받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전망이다.
주 채권은행인 산업은행 역시 현대상선이 올해 흑자 구조로 전환하면서 2천억원의 부채는 큰 부담이 되지 않을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현씨 시대’가 전개될 거라는 관측에 가장 힘을 실어 주는 건 장남 영선씨가 본격적으로 현대그룹 경영권을 넘겨받으려면 장기간의 물밑 작업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고등학생인 영선씨가 경영 수업에 나서기까지 최소 10여년간은 어머니 현씨와 외할아버지인 현영원 현대상선 회장이 주축이 된 경영권 구도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다만 정몽헌 회장의 가신그룹인 현대엘리베이터 강명구 회장과 현대상선 노정익 사장의 지원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현대그룹의 최대 변수로는 무엇보다 대북사업이 손꼽힌다.
그동안 1조2천억원의 투자비가 들어갔지만 수익이 전혀 없고 구심점이었던 정 회장의 자살로 좌초 위기에 놓였기 때문이다.
물론 현대아산 김운규 사장은 강한 의지를 보이지만 재무구조가 자본잠식 상태에 놓일 만큼 어렵기 때문에 회의론이 팽배하다.
또한 일반적인 예측과 달리 현대차그룹은 “시장 논리에 비춰 대북사업엔 전혀 동참할 수 없다”고 강하게 거부하고 있다.



대북사업 회의론 팽배, 앞날 안개 속

대북사업은 잘못하다가는 현대그룹 전체의 몰락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정 회장의 죽음을 계기로 대북사업에 대한 정부의 직·간접 지원이 있겠지만, 결국 현대아산에 대한 계열사의 인적·물적 지원이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고 정주영 명예회장과 정몽헌 회장이 대북사업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표명했기 때문에 그룹 차원의 지원을 피하기는 어렵다.
여기에는 경영상의 판단보다는 경영외적인 것들이 영향을 끼친다.
고려대 북한학과 남성욱 교수는 “현대차그룹이 대북사업에 끼어들지 않겠다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지적한다.


정 회장의 투신 자살로 현대그룹은 사실상 해체될 위기에 몰리게 됐다.
지난 수십년간 한국 경제를 이끌며 국내 최대 재벌로 군림했던 현대그룹의 향방은 세간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현재 현대그룹은 바람 앞의 등불 신세에 불과하다.
하지만 분명한 건 현대그룹의 향방을 가름할 단초는 유가족이 정 회장의 지분을 상속받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현대차그룹의 경영 개입설은 상속 여부가 결정된 이후에나 변수로 작용할 수 있을 뿐이다.










‘피’보다 ‘실리’가 중하다?


“사업을 할 때는 형제 간의 ‘우애’보다는 ‘실리’가 강하다.
” 현대차그룹 정몽구 회장이 가문의 장자인데도 동생인 현대아산 정몽헌 회장의 현대그룹을 지원할 것이라는 일반의 예측과 달리 대북사업에 나서지 않겠다고 밝히면서 재계 등 일부에서 회자되는 말이다.
더욱이 정몽구 회장이 자신의 뿌리인 현대그룹의 향배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고 공식화했기에 사람들은 더욱 의아해하고 있다.
그러나 정몽구 회장은 평소에 입버릇처럼 자동차사업에만 전념할 것이라고 말해 왔기 때문에 그 말은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차그룹이 투명 경영을 내세우는 이유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과거 한 식구였던 시절 현대차그룹과 현대그룹 계열사의 끈끈했던 거래 관계는 형제 간의 분란인 ‘왕자의 난’ 이후 분명하게 벌어진다.
현대차그룹과 현대그룹은 서로 대부분의 거래를 끊었다.
심지어 지난해 현대중공업 정몽준 고문의 대선 출마 당시에도 현대차그룹은 ‘정경 분리’를 선언하며 평소의 소신을 다시 한 번 굳히기도 했다.


지난해 현대그룹의 지주회사 격인 현대상선이 경영 악화로 위기에 놓였을 때 현대차는 더욱 거리감을 두며 협력 관계를 단절했다.
결국 현대상선은 현대차의 수출 물량 운송을 전담했던 자동차 운송사업부를 매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뿐이 아니다.
현대상선이 20%의 지분을 갖고 있어 정몽헌 회장의 영향권에 속해 있던 금강기획도 시련을 겪고 있다.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던 현대차그룹 광고가 떨어져 나간 것이다.
현대차그룹이 경쟁을 통해 광고대행사를 선정함으로써 금강기획은 경쟁사인 제일기획과 에이블리 등에 광고 물량을 대부분 빼앗겼다.


광고업계는 이러한 현대차그룹의 행태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
금강기획 측도 “현대차 광고를 만들기 위해 금강기획이 탄생했다는 배경을 살펴볼 때 이러한 일련의 사태는 상당한 충격”이라고 털어놓을 정도다.
때문에 재계 일부에서는 현대차가 사업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시장 논리로 가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으로 해석한다.


현대그룹의 알짜배기 계열사는 피해가 더욱 심각하다.
예컨대 현대차에 오디오와 비디오기기, 내비게이션 등을 대부분 공급하는 현대오토넷이 그렇다.
현대차가 계열사인 본텍을 지원하면서 현대오토넷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현대오토넷은 ‘MK가 먹여 살리는 MH 회사’라고 할 만큼 매출의 상당 부분을 현대차그룹에 의존하고 있지만 그것이 언제까지 갈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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