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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국민연금 개편안은 개선?개악?
[포커스] 국민연금 개편안은 개선?개악?
  • 이경숙 기자
  • 승인 2003.08.2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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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계·재계, 국민연금 개편안 반발…근본적 문제 개혁 위한 로드맵 마련해야

8월18일 오후 1시, 서울 여의도 전국경제인연합회관 앞. 빗줄기 사이로 노랫소리가 가느다랗게 퍼진다.
“흩어지면 죽는다.
흔들려도 우린 죽는다….” 이날 열린 ‘국민연금 개악 저지’ 집회 겸 국민연금관리공단 고 송석창씨 추모 집회 자리에는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노조원 700여명이 모였다.
남원지사 가입자 관리과에서 일하던 송씨는 8월4일 밤, 자신이 일하던 사무실 창가 기둥에 목을 매 숨진 채 동료에게 발견됐다.
그가 남긴 유서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먹고살기도 힘들다는 사람들에게 일방적으로 보험료를 조정하겠다는 문서를 만들었습니다.
기준도 없이 무턱대고 밀어붙이는 이 일들이 싫습니다.
…제가 하는 일이 이렇게 부실한데 5년, 10년, 그 뒤에 벌어질 일들을 생각하면 정말 두렵습니다.
작년에는 납부예외율 축소 때문에 벙어리 냉가슴을 앓았는데 산을 하나 넘고 보니 올해는 소득 조정이라는 더 큰 강이 버티고 있네요. 제 목숨을 걸고 호소하고 싶습니다.
정말 국민들한테 사랑받는 국민연금을 만들어 주시길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내일도 어제처럼, 오늘처럼 산다면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이 시각, 전경련회관에서 열린 ‘국민연금 제도 개선 및 기금운용위원회 상설화 방안에 대한 공청회’ 자리에선 새 방안을 두고 갑론을박이 오갔다.
고려대 경영학과 이필상 교수는 국가 책임론을 펼쳤다.
“노후 부모를 봉양하는 체제가 무너진 상태에서 국민연금은 마지막 생계 수단이다.
국민연금은 국민들이 알아서 하라기보다는 국가도 일정 부분 책임을 져야 한다.
” 중앙대 사회복지학과 김연명 교수는 ‘세대간 공평한 부담’ 논리를 반박했다.
“현재 30~50대 사람들은 60~80대 노부모의 부양비와 자신의 국민연금 부담액을 합해 소득의 30%를 부담하고 있다.
국민연금이 현세대들의 노후를 보장하기 위해서라도 후세대 보험료율 인상은 불가피하다.



구조 결함 제쳐두고 재정 안정에 초점

노동계와 재계의 견해는 엇갈렸다.
한국경영자총협회 김정태 상무는 국민연금과 법정 퇴직금제를 함께 운용해 기업 부담이 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을 40%로 하향 조정하고 보험료율은 현행 9%로 유지해 기업 부담을 줄일 것을 요구했다.
민주노총 김형탁 부위원장은 “고용시장 유연화로 비정규직 등 법정 퇴직금 제도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노동자는 소수”라고 반박했다.
민주노총은 국민연금 재정추계기간을 현행 70년에서 60년으로 낮추고 예상 출산율을 현재 1.4∼1.5명에서 선진국 수준인 1.8명 수준으로 높이면 보험료율을 11.7%까지 낮출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날 공청회는 방청석 질문은커녕 연단 위의 토론자, 발제자의 토론조차 없이 예정 시간보다 40분이나 일찍 끝났다.
토론자들의 엇갈리는 주장 속에 공청회 참석자들은 오히려 더 큰 의문을 품고 자리를 떠나야 했다.
노동계, 재계 등 가입자 집단이 직접 추천한, 내로라하는 연금 전문가들이 모여 1년 가까이 머리를 싸매고 만든 국민연금 개선안은 왜 참여 단체들한테조차 강한 비판을 받고 있을까? ‘더 내고 덜 받는’ 국민연금 개선안 말고 다른 선택지가 있는 것일까? 개선안이 나왔는데도 성실하고 유능했다던 한 국민연금관리공단 직원은 왜 목숨까지 내던지며 변화를 호소한 것일까?

첫 번째 원인은 동상이몽에 있다.
이번 기회를 통해 정부는 재정 안정화를, 노동계는 확실한 노후 보장책을, 재계는 기업의 부담 감소를 원한다.
그러나 개선안은 국민연금의 개혁 과제 중 재정 안정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국민연금 하나에 집중된 단층적 연금제도, 기초연금과 소득비례연금이 혼합된 구조적 결함 등 재계와 노동계가 제기하는 문제의 뿌리는 다뤄지지 않았다.


한국개발연구원(KDI) 문형표 재정복지팀장은 노조와 기업가가 반대하는 건 당연하다고 말한다.
“노조는 현세대의 노동자, 경총이나 전경련은 현세대의 기업을 대변하는 이익단체이다.
국민연금 재정 개선안은 미래세대 부담을 줄이려는 방안이다.
이들은 반대할 수밖에 없다.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브라질에서도 마찬가지 반발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면 전 세계 정부가 왜 국민한테 욕을 들으면서 연금 재정을 개선하려고 들겠는가? 이대로 두면 얼마 안 가 기금이 바닥나 미래세대의 복지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보건복지부는 국민연금이 현행대로 유지되면 2047년에 기금이 소진된다고 밝힌다.
재정 안정화는 국민연금 개혁 과제 중 가장 시급한 과제다.


하지만 정부는 재정 안정화 뒤 다음 과제의 개선 일정은 따로 밝히지 않았다.
보건복지부의 한 직원은 “제도 전반의 개선에 대한 검토는 아직 정해진 바 없다”고 말한다.
단계적 개혁의 로드맵이 없다 보니 여러 이익단체가 여러 요구를 이번 개선안 때 담으려고 나서면서 논의는 더욱 복잡해졌다.


국민연금이 국민에게 “국민연금이 아니라 국민용돈”이라는 비아냥을 듣지 않고 우리 기업한테 “기업 경쟁력 강화를 발목 잡는 애물단지” 취급을 받지 않으려면 재정 안정화에 이어 좀 더 구체적이고 근원적인 개혁이 뒤따라야 한다.



세계은행도 다층 노후 보장 체계 권고

한국사회보험연구소 김용하 소장(순천향대 교수)은 기초연금과 소득비례연금의 분리를 주장한다.
“현행 국민연금은 국민의 절반밖에 수혜를 받지 못한다.
원칙적으로는 모든 국민이 가입할 수 있다고 하나 소득이 없거나 파악되지 않는 사람, 적은 사람은 가입하기 어렵다.
일본은 소득이 있건 없건 국민 모두가 혜택을 받는 기초연금제와 급여 생활자, 자영업자가 따로 가입하는 직역연금이 나누어져 있다.
일본의 기초연금이 국고 지원을 받는 것은 그런 근거다.
” 다시 말해 국민 절반 이상이 수혜를 입지 못하는 현행 국민연금제는 국민 전체의 돈으로 형성된 국고를 지원받을 근거가 없다는 얘기다.


세계은행의 연금 개혁안 역시 노후 소득보장 체계에 다층 구조를 형성하길 권한다.
1층은 공적 연금 위주로 구성된 국가의 기초 보장, 2층은 정부가 강제 적용하되 민간 부문에서 운용하는 소득비례연금, 3층은 개인이 자발적으로 가입하는 추가적인 소득비례연금. 우리나라는 지금 1층과 2층 사이에 국민연금 하나만 있다.
이런 상태로는 제도의 형평성, 정당성, 효율성에 갖가지 논란이 일 수밖에 없다.


가입자의 믿음을 얻지 못한 상태로 현행 제도를 고집하거나 제도 개선을 강행하면 여러 가지로 무리가 따르게 된다.
국민연금관리공단 직원의 죽음은 상징적 사건이다.
최근 그는 가입자 소득 조정으로 큰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것은 관리공단이 추정한 가입자의 실제 소득을 신고 소득과 비교해 가입자가 실제 소득과 가깝게 돈을 내도록 조정하는 업무였다.
자영업자들은 세원 노출 등 여러 가지 ‘불이익’을 피하려고 대개 자신의 소득을 줄여서 신고한다.
그러나 법에 따르면 국민연금은 신고 소득에 비례해 요율과 소득대체율을 정하게 되어 있다.
공단 직원이 가입자한테 신고 소득을 조정하라고 강요할 법적 근거는 없다.
바랄 것은 가입자의 자발적 참여뿐.

연금관리공단 노조 전두현 정책부장은 말한다.
“이번 개선안이 통과되면 우리만 더 죽어난다.
요율은 높아지고 소득대체율은 낮아지는데 누가 소득을 조정하려 들겠는가.” 지금 국민연금 개선에 필요한 건, 믿음직한 개혁의 로드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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