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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 IMF 이후 ‘제2의 명예퇴직’ 바람
[진단] IMF 이후 ‘제2의 명예퇴직’ 바람
  • 류현기 기자
  • 승인 2003.10.1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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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로 퇴출’, 무대책은 여전 국제통화기금(IMF) 환란은 많은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그 가운데 ‘명예퇴직’이란 단어는 대다수 직장인들에게 쓰라린 기억으로 남아 있다.
한동안 잠잠하던 직장가에 최근 다시 명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KT, 두산중공업은 시작에 불과하고 대한항공, 우리은행 등 명퇴 신청을 받는 기업들이 점점 늘고 있다.
테이프를 먼저 끊은 곳은 KT다.
KT는 공기업 민영화 이후 속병만 앓던 인원조정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기 위해 9월 말 대규모 명예퇴직 신청을 받았다.
KT는 유례없는 조건을 직원들에게 제시함으로써 5500명의 명예퇴직 신청을 받을 수 있었다.
이번 명예퇴직 신청자는 4만3700명에 이르는 총 직원 가운데 12.6%나 된다.
단일 기업 1회 감원 규모로는 최대이다.
KT가 분기마다 실시하는 일반 명예퇴직 신청자가 보통 300명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많은 수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번 KT의 명예퇴직에 신청자가 몰린 것은 아무래도 일반 명예퇴직 때보다 50~70% 이상 더 많은 위로금을 주기 때문이다.
KT는 특별 명예퇴직을 실시하면서 위로금조로 최대 기본급 76개월치를 지급하기로 했다.
위로금 액수도 1억원에서 1억8천만원까지 다양하지만 평균적으로 1억5천만원 정도를 지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KT는 이번 명예퇴직으로 연간 3300억원의 인건비를 절감할 수 있게 됐다.
매출액 대비 인건비 비중도 23.7%에서 20%로 낮아진다.
비록 명예퇴직으로 당장 8200억원의 비용이 들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경쟁력 확보에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KT가 명퇴를 통해 대규모 구조조정을 실시하자 뒤이어 두산중공업이 명예퇴직을 받기 시작했다.
두산중공업은 2003년 9월23일부터 10월4일까지 과장급 이상 관리직원을 대상으로 명예퇴직 신청을 받아 이미 365명이 신청했다.
뒤이어 대리급 이하 직원을 대상으로 명예퇴직을 확대하기 위해 노조와 협의 중이다.
명예퇴직 조건은 사무직의 경우 2년치 연봉과 퇴직 뒤 3년 동안 학자금을 지원하는 것이다.
생산직 근로자도 이에 준하는 대우를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명퇴, 한국형 구조조정 형태로 자리잡아 명예퇴직 바람이 다시 불고 있지만 그 분위기는 1997년과는 사뭇 다르다.
IMF 사태 때만 해도 명예퇴직보다는 ‘강제퇴직’의 의미가 더욱 강했다.
하지만 최근에 불고 있는 명예퇴직은 ‘강제적’이 아닌 ‘선택적’인 의미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두산중공업 관계자는 “명예퇴직을 신청한 사람들 중 창업이나 공부를 하려는 사람들도 적잖게 있다”며 “대부분 이번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제는 명예퇴직이 한국형 구조조정 형태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어차피 인원조정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명예퇴직 위로금은 정규직 근로자들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이고 기업들도 이를 어쩔 수 없이 지급하겠다는 분위기다.
KDI 최경수 연구원은 “명예퇴직은 고용경직성에 대한 일종의 프리미엄”이라며 “한국적 인원조정 형태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삼성경제연구소 장상수 상무도 “명퇴는 이제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며 “어느 한 시점에 이뤄지는 대규모 명퇴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명퇴를 포함한 구조조정이 이제는 상시적으로 이뤄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명예퇴직이 한국형 인원조정 형태로 자리잡은 것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IMF 사태 때만 해도 기업들은 사회 분위기에 편승해 큰 어려움 없이 대규모 감원을 할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정부에서도 노동법을 바꿔 정리해고 조항을 넣었다.
구조조정을 이유로 해고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내용을 살펴보면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개정 내용이 이미 판례로 인정되던 것을 조문에 수용한 것에 불과한 터라 현장에서 피부로 느끼는 변화는 거의 없었다.
이런 여건에서 기업이 무리 없이 인력조정 방법으로 명퇴를 선호하게 된 것이다.
KT도 예외는 아니다.
KT는 1998년 3100명, 1999년 9600명을 감원하고 이후에도 해마다 1천여명을 감원했다.
하지만 그 규모로는 충분치 않았다.
왜냐하면 사업조정으로 변화를 시도하는 KT에게는 유선사업 중심이던 시절의 인력이 여전히 짐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과거 공기업으로서 KT는 실업인구를 끌어안아야 하는 부담이 있었기에 구조조정이 쉽지 않았다.
일반 민간기업에 비해 인력구조의 왜곡현상이 더 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 민영화된 KT는 그런 부담에서 상대적으로 가벼울 수 있게 됐다.
때문에 KT는 새로운 변화를 위해 대규모 감원을 시도하게 된 것이다.
두산중공업의 경우도 KT와 별반 다르지 않다.
강성노조 때문에 오랫동안 구조조정을 미루다 인력구조가 다이아몬드형의 기형적 구조로 바뀌었다.
두산 관계자는 “5년 동안 신입사원을 받지 못했다”며 “이번 구조조정은 장기적인 경쟁력 확보를 위한 측면이 강하다”고 밝혔다.
두산중공업은 그동안 강성노조로 인해 미뤄온 구조조정을 명예퇴직이라는 다소 유리한 조건을 제시해서 실시하려고 한다.
두산중공업은 이번 구조조정으로 매출액 대비 인건비 비중을 상당히 낮출 수 있을 것으로 예측하였다.
현재 경쟁사는 매출액 대비 인건비가 12~13%에 머물고 있지만 두산중공업은 25%에 이른다.
다행히 KT나 두산중공업의 경우 노조가 다소 협조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
KT는 아무래도 명예퇴직 조건이 좋다보니 노조가 아직까지 거부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두산중공업노조 역시 ‘강성노조’라는 이미지와 달리 유휴인력 정리 필요성에 공감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명퇴를 수용하는 분위기다.
이 밖에 대한항공과 우리은행이 명예퇴직 신청을 받고 있지만 대부분 사용자쪽과 노동자쪽이 별다른 충돌 없이 구조조정을 실행하고 있다.
사실 기업들이 모든 인력을 끌고 갈 수 없다는 것은 노동자쪽이나 사용자쪽이나 이미 공감하고 있다.
특히 KT나 삼성전자 등 첨단기술이 요구되는 기업들은 적절한 인력조정이 더욱 절실할 수밖에 없다.
KT의 경우도 유선전화가 보급되던 시절에는 장치설비에 인력이 필요했지만 설비투자가 완료되면서 인력조정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자신들만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에 분개하였다.
특히 노조가 강한 곳일수록 그렇다.
이에 대해 삼성경제연구소 장상수 상무는 “노동조합이 객관적인 상황분석을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노조와 사용자쪽이 상황을 제대로 분석해 인력조정을 해야 장기적 관점에서 회사가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삼성전자는 명예퇴직과는 다른 성격의 인원조정을 실시하고 있다.
사업부 분사나 아웃소싱으로 반드시 필요한 인력만을 확보한다는 것이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IMF 사태와 같은 극단적 상황이 아니라면 명예퇴직과 같은 인원조정은 없겠지만 사업부문 매각이나 분사를 통한 인원조정은 지속적으로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인건비 부담에 노조도 수긍…中企로 불뚱 튈 듯 그러나 구조조정의 후유증은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최근 명예퇴직과 함께 쏟아지는 대규모 인력의 처리가 청년실업과 맞물려 사회문제로 작용할 것이라는 우려가 높다.
하지만 기업이나 정부는 아직 뾰족한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대규모 명예퇴직에 동의한 KT 노조 관계자도 “명퇴자들 중 젊은 사람들은 재취업이 가능하겠지만 나머지는 알아서 자기 삶을 살아갈 것”이라고 밝혔다.
KT에서 노조도 놀랄 정도로 대규모 인력이 명예퇴직을 신청한 이유는 ‘사오정 오륙도’로 비유되는 고용불안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
어차피 쫓겨날 것이라면 한몫 챙기고 나가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막상 이들이 회사문을 나서서 할 일은 많지 않다.
KT 명퇴자 가운데는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딴 사람도 있고 유학이나 창업을 꿈꾸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모두가 공인중개사가 될 수도, 창업을 할 수도 없다.
결국 국가적인 인력시스템 대책이 절실히 요구된다.
그나마 KT는 다른 기업에 비해 명예퇴직 조건이 좋아 퇴직 이후 다른 길을 찾을 수 있는 여유가 있다.
KT는 명퇴를 신청한 직원들 중 희망자들을 임시직으로 1년간 채용하는 보완책도 마련해놓았다.
1년 동안 일을 하면서 퇴직 뒤를 대비할 수 있는 시간을 주겠다는 의미다.
그러나 그 이상의 대책은 없다.
두산중공업도 재취업 컨설팅을 전문으로 하는 컨설턴트 8명을 상주시켜 재취업을 도와주도록 하고 있다.
또한 두산중공업에서 신규 인력을 채용할 경우 자녀에게 인센티브를 제공할 계획도 세워놓고 있다.
하지만 두산중공업 역시 퇴직자에게 직접적인 도움은 주지 못하고 있다.
결국 명퇴자들의 상당수는 창업을 시도하거나 실직 상태로 남아야 한다.
앞으로 명예퇴직이 신드롬처럼 번져나갈 경우 그 불똥이 대기업에서 중소기업으로 튈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중소기업의 명예퇴직은 대기업과는 또 다른다.
KT나 두산중공업과 같은 충분한 보상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최근에 다시 고개 드는 명예퇴직 바람은 1997년의 경우와 다르다.
하지만 회사문을 나선 사람들에 대한 ‘무대책’은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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