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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소비자 주권 수호
[특집] 소비자 주권 수호
  • 황보연 기자
  • 승인 2003.10.3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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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넘어 정책으로...불매운동·소송 등 통해 기업 감시자로 자리잡아…정부 정책으로 역할 확대해야

사건의 발단은 지난 7월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소비자문제를 연구하는 시민의 모임’(소시모)은 천연화장품으로 알려진 로뎀제품에 방부제가 들어 있다고 폭로했다.
비타민C가 전혀 들어 있지 않았다는 것도 문제가 됐다.
독점계약을 맺은 CJ홈쇼핑의 로뎀 판매방송에서 “마셔라”, “비타민C가 듬뿍 들어 있다” 등의 자극적인 광고가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올 상반기에만 180억원의 매출을 올리며 승승장구하고 있던 게비스코리아로선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즉각 재시험에 나섰다.
한국화학시험연구원 등 5개 기관에 6차례 실험을 의뢰했다.
방부제는 나오지 않았다.
이런 결과를 근거로 게비스코리아는 소시모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고, 뒤이어 김자혜 사무총장 등 간부들에 대한 부동산 가압류도 신청했다.


이때부터 양쪽의 팽팽한 신경전이 이어졌다.
게비스코리아가 결백을 주장할 때 소시모의 폭로전도 계속됐다.
세균검사 결과 유럽연합 가이드라인보다 훨씬 많은 세균이 나온 데다, 수입 완제품이라는 광고와는 달리 무허가 업자를 비롯해 국내 5개 업체에 OEM방식으로 생산을 맡겼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게비스코리아쪽에선 “용기와 포장 제작만을 하청업체에 맡겼을 뿐”이라며 반박했다.


3개월이 넘는 공방끝에 게비스코리아는 최근 4개 일간지에 사과문을 내고 소를 취하하면서 꼬리를 내렸다.
물론 식품의약품안전청이 화장품법 위반으로 게비스코리아를 고발하면서 상황이 계속 불리해져간 것도 원인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더이상 싸움을 계속하다간 회사문을 닫아야 할 판이었기 때문이다.
게비스코리아 감오균 이사는 “이번 싸움으로 입은 피해액이 100억원에 달할 것”이라고 털어놨다.
소시모와 화해하지 않고는 제품판매를 재개하기 힘들다는 게 이유였다.


이번 사건은 본격적인 소비자시대가 열리고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줬다는 데서 주목할 만하다.
“소비자가 왕”이라는 말은 더이상 교과서에 나오는 말이 아니다.
갈수록 커지고 있는 소비자단체의 영향력은 이런 현실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천연화장품 논란이 미친 파장이 예상보다 훨씬 컸다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CJ홈쇼핑은 소시모의 발표가 있은 직후 바로 로뎀화장품 구매자들을 상대로 환불조치를 취했다.
제품은 다 쓰고 용기만 가져와도 환불이 가능했다.
이를 위해 들어간 비용은 총 30억원에 달한다.
한 달여간 로뎀은 물론이고 다른 수입화장품까지 판매를 중지했다.
최근 증권사 유통담당 애널리스트들은 CJ홈쇼핑의 3분기 실적이 부진했던 이유중의 하나로 로뎀화장품 리콜사태를 꼽기도 했다.


파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소시모 김애경 사무국장은 “문제의 핵심은 TV홈쇼핑의 지나친 과장광고”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방송위원회에 TV홈쇼핑 업체의 방송자격을 한층 엄격히 제한해 줄 것을 촉구할 계획이다.
다른 홈쇼핑 업체에도 언제 불똥이 튈지 모를 일이다.



소협, “소비자 피해상담 해마다 10% 증가”

70년대 초만 해도 소비자운동은 여성단체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던 중 76년 한국소비자연맹이 결성된 이후 전문적인 소비자운동을 표방하는 단체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한다.
현재 국내 대표적인 소비자단체로는 한국소비자연맹과 소시모, 녹색소비자연대 등을 꼽을 수 있다.
소비자운동이 활성화되면서 정부쪽에서도 지난 87년 재경부 출연기관인 한국소비자보호원(소보원)을 설립하면서 소비자정책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소보원 집계에 따르면 설립 초기인 87년 8천건으로 시작한 소비자들의 피해상담은 지난해 44만건이 넘을 정도로 늘어났다.
10개 민간소비자단체가 속해 있는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소협)도 지난해 소비자 상담건수가 41만5854건에 달했다고 밝혔다.
소협 이성옥 부장은 “해마다 10% 정도씩 증가하는 편”이라고 말한다.


초기 소비자 상담의 상당 부분은 가전제품에 대한 AS처리를 둘러싼 불만이었다.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소비자단체를 통해 이런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하지만 기업들이 자체적으로 소비자상담실을 개설하고 AS센터에 대한 투자를 늘리면서 최근에는 오히려 새로운 영역에서 소비자문제들이 불거져나오고 있다.
금융이나 의료, 전자상거래로 인한 분쟁 등이 대표적이다.
이성옥 부장은 “의류회사들이 이전보다 고급스러운 소재를 사용하면서 세탁물 관련 분쟁도 잦아졌다”고 말한다.



“사전에 예방하자” 기업서도 보호센터 운영

소비자단체가 기업에 끼치는 영향은 소비자 상담을 기반으로 한 각종 상품테스트나 조사활동에서 비롯된다.
소비자주의보를 내리거나 불매운동이라도 하게 되면 매출감소는 물론이고 기업 이미지는 지대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기업들은 소비자단체의 지적을 받아들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컨대 지난 91년 분유회사들이 대중매체를 활용한 분유광고를 중단하기로 결단을 내린 것도 소비자단체들이 모유 수유를 줄기차게 권장해 왔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기업들이 불만을 표시하는 일도 적잖이 눈에 띈다.
올해들어 소보원은 각종 품목에서 비교 테스트를 시행하고 있다.
지난 9월 말에는 김치냉장고를 생산, 판매하는 6개 업체 11개 모델에 대한 비교시험 결과를 발표했다.
저장성능이나 냉각속도, 소비전력량 등을 꼼꼼히 비교분석해 공개한 것.

그러나 시장점유율 1위를 달리고 있는 위니아만도에선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았다.
위니아만도의 한 관계자는 “소비자들의 선택권을 충분히 주자는 기본 취지는 동의하지만 테스트 방법은 좀 더 신중을 기해서 결정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김치냉장고의 경우 적어도 1∼3개월간 테스트를 해서 김치맛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중점에 두고 조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천연화장품 논란을 빚은 게비스코리아는 “충분한 소명기회를 주지도 않고 기업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힐 수 있는 결과를 발표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냐”고 하소연하기도 한다.
소비자 피해가 발생할 때 합의권고나 분쟁조정으로 끝날 지, 소송으로 이어질지도 이런 기업들의 태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한켠에선 이런 불만을 제기하기 전에 자체적으로 사전예방에 만전을 기하자는 움직임도 늘고 있다.
기업마인드 자체가 고객 위주로 돌아서지 않으면 갈수록 치열해지는 시장경쟁에서 살아남기 힘들다는 위기의식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LG홈쇼핑은 지난 7월 사장 직속으로 200여명 규모의 ‘소비자보호센터’를 발족시켰다.
기존 상담부서가 고객불만을 진화하는 데 그쳤다면 소비자보호센터에선 사전에 고객불만을 예측해 미리 경고하고 예방하는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다.


고객대면이 잦은 통신업체들 사이에서도 고객만족을 둘러싼 경쟁이 한창이다.
24시간 고객대응체제를 구축하는가 하면 단말기가 고장난 경우 소비자가 원하는 장소로 직접 찾아가 수리까지 해준다.
점차 소비자에 대한 서비스가 중요한 마케팅 수단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런 가운데 소비자단체가 개별 기업 차원을 넘어서 궁극적으로 정부 정책에 관여하는 쪽으로 역할을 확대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미 국내에서도 그런 사례가 없진 않다.
지난 2001년 정부가 농산물 및 식품에 대해 GMO(유전자변형식품) 표시제도를 도입한 것이 대표적이다.
서울여대 생활교육학부 송보경 교수는 “영국에선 전력민영화를 앞두고 민영화 이후 가난한 소비자들의 권익을 어떻게 보장해줄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소비자단체들의 핵심 이슈가 된 적이 있다”고 말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한국소비자연맹 강정화 사무총장은 “기업이 제품개발을 하는 데 있어 장애인 소비자도 염두에 두도록 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실제 이런 의견이 반영돼 LG전자에선 점자가 표시된 버튼이 장착된 세탁기가 출시되기도 했다.
업계에 이런 분위기가 정착될 수 있는 분위기 조성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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