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6 17:03 (금)
[비즈니스] 외국계 큰손들 M&A의 법칙
[비즈니스] 외국계 큰손들 M&A의 법칙
  • 장승규 기자
  • 승인 2003.11.28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수익성 위주 경영, 되파는 데 열중…리스크 털어낸 한미은행 매물로 내놔 은행권이 다시 한 번 술렁이고 있다.
진원지는 한미은행 인수 3년 만에 이를 다시 인수합병(M&A)시장에 내놓은 미국계 투자펀드 칼라일. 자산 42조원으로 국내 7위 규모인 이 은행이 과연 누구에게 넘어갈 것인가가 초점이다.
칼라일은 보유 지분 매각제한이 풀린 지난 11월15일에 딱 맞춰 국내외 주요투자가로부터 입찰제안서를 받았다.
투자펀드의 속성상 은행 매각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지만, 시티은행, 홍콩상하이은행(HSBC) 같은 세계적인 상업은행들이 인수 의사를 밝힌 것으로 알려져 관심을 끌었다.
한미은행이 엄청난 브랜드 파워와 선진 금융기법을 갖춘 이들 주요 은행에 넘어간다면, 국내 은행산업의 경쟁구도가 완전히 새롭게 짜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영국계 스탠다드차타드은행(SCB)과 싱가포르 국영투자기관 테마섹 등 2곳만 실제 입찰제안서를 제출했지만, 매각 시한이 따로 정해져 있는 협상이 아닌 만큼 결과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
한미은행 매각 추진과 함께 지난 99년 12월 제일은행을 인수해 4년째 운영하고 있는 뉴브리지캐피털의 선택에도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뉴브리지캐피털의 경우 지분 매각제한이 이미 지난 2001년 풀린 상태. 최근 뉴브리지캐피털과 HSBC가 제일은행 인수와 관련해 접촉을 가진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한국을 방문한 HSBC 고위관계자는 한미은행이나 제일은행보다는 오히려 민영화를 앞둔 우리금융지주에 더 관심이 있다고 밝혔다.
사실 이런 최근 움직임 뒤에 놓인 진짜 동기가 무엇인지 알아내기는 쉽지 않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손에 쥔 패를 보여주지 않는 것이 인수협상의 기본 문법이기 때문이다.
뉴브리지캐피털 역시 “제일은행을 당장 매각할 계획은 없다”면서도 “앞으로 적당한 기회가 오면 고려해볼 수 있다”는 입장이다.
뉴브리지캐피털 “적당한 때 제일은행 팔겠다” 칼라일과 뉴브리지캐피털의 은행 인수는 처음부터 뜨거운 찬반 논란을 불러온 사건이다.
국민경제의 중추인 은행을 단기차익을 노리는 국제 투자펀드에 넘겨줘서는 안 된다는 비판이 일반적이었다.
그럼에도 외환위기 직후 금융구조조정이 한창이던 당시 상황에서 국내은행을 사겠다고 선뜻 나서는 투자가가 많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결국 뉴브리지캐피털은 1년여의 협상 끝에 제일은행의 지분 51%를 5천억원에 인수했다.
2000년 11월15일, 칼라일도 JP모건과 콘소시엄을 구성해 한미은행의 지분 36.6%를 4890억원에 사들이는 데 성공했다.
인수 후 두 은행엔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물론 그 변화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갈린다.
많은 금융권 관계자들은 한미은행이나 제일은행이 새로 선보인 선진 금융기법이나 리스크 관리기법이 거의 없고, 오히려 단기수익성 위주 경영이라는 부작용만 키웠다고 비판한다.
한마디로 실망스럽다는 것이다.
그러나 칼라일과 뉴브리지캐피털의 입장에서 보면 평가는 조금 달라진다.
아무도 사려고 하지 않을 때 리스크를 떠안고 매수해, 모두가 탐내는 매력적인 매물로 탈바꿈시키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부실기업을 헐값에 인수해 구조조정을 한 다음, 이를 비싸게 되파는 프라이빗에쿼티(PE) 펀드의 전형적인 투자패턴이다.
한국금융연구원 김우진 연구위원은 “처음부터 투자펀드에게 선진금융기법 전수를 요구하는 건 무리”라며 “주어진 조건 속에서 매각 가치를 극대화하는 게 이들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말한다.
시티은행이나 HBSC 입장에서도 한미은행과 제일은행의 인수 리스크가 한결 줄어든 게 사실이다.
지난 3~4년 동안 잠재 부실채권 문제, 외국인 대주주에 대한 거부감, 사업 포트폴리오의 재조정, 그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노사 갈등 등 많은 위험 요소가 제거되거나 완화됐기 때문이다.
변화는 무엇보다 달라진 대출 포트폴리오에서 발견된다.
2000년 한미은행의 대출 자산 가운데 기업대출과 가계대출의 비율이 72대 28이었으나, 올 상반기에는 이 비율이 60대 40으로 나타났다.
가계 대출의 비중이 커진 것이다.
제일은행에선 이런 변화가 더 극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99년 기업대출과 가계대출의 비율이 82대 18이었는데 반해, 올 상반기에는 그 비율이 38대 62였다.
기업대출과 가계대출의 비중이 완전히 뒤바뀐 셈이다.
1983년 대한상공회의소 등 국내 기업계와 미국 뱅크오브아메리카(BOA)의 합작투자로 탄생한 한미은행은 전통적으로 중소기업 금융에 강점을 보이고 있었다.
칼라일이 인수한 후에도 중소기업 대출이 꾸준히 증가했지만, 가계대출의 증가폭은 이보다 훨씬 컸다.
2001년 3월 칼라일이 시티은행에서 영입한 하영구 행장은 취임 초 “2004년까지 기업대출과 가계대출의 비율을 50대 50으로 맞추겠다”고 선언했다.
대출 자산의 증가는 특히 신용카드부문에서 두드러진다.
지난해엔 직원들에게 승용차까지 상품으로 내걸고 신용카드 고객유치 캠페인을 벌여 거센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한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한미은행은 매각협상에 유리한 신용카드나 가계대출, 중소기업 대출자산을 집중적으로 늘렸다”며 “반면 장기적인 성장전략은 찾아보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제일은행은 최근 빠른 속도로 자산을 불려가고 있다.
올 3분기에 그동안 숙원이던 자산 40조원 목표를 가볍게 돌파했다.
로베어 코엔 제일은행장은 “현재의 인원과 조직으로 적정 수준의 수익성을 유지하기 위해선 우선 자산이 40조원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자산 증가에 좀처럼 가속도가 붙지 않았다.
새로운 관리시스템 구축과 점포 리모델링에 적잖은 투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 들어선 주택담보대출을 중심으로 가계대출 자산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부동산시장 과열 우려로 다른 은행은 주택담보대출을 대폭 줄이고 있는 상황이라, 일부에서는 제일은행의 이런 ‘과속’을 우려하기도 한다.
외국 금융기관, 한국 소매시장에 매력 한미은행과 제일은행이 대출 포트폴리오 재조정에 필사적으로 매달린 이유는 무엇일까. 원론적으로 본다면 가계대출과 기업대출 비중이 균형을 이루는 게 리스크 관리 측면에서 가장 바람직하다.
편중된 자산구조는 위험이 닥치면 치명적일 수 있다.
대기업 대출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던 제일은행이 외환위기 때 거래기업의 잇따른 부도로 흔들린 것이나, 최근 경쟁적으로 가계대출, 특히 신용카드대출을 늘린 은행들이 연체율 폭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것이 좋은 사례다.
그러나 칼라일이나 뉴브리지캐피탈에게 더 중요한 것은 한미은행과 제일은행의 잠재적인 매수자인 외국 금융기관들이 한국 소매금융시장의 성장성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티은행이나 HSBC, SCB 모두 이점에선 차이가 없다.
한미은행은 본격적인 매각절차가 이미 시작됐다.
반면 제일은행과 관련해선 아직 뚜렷한 움직임이 없다.
제일은행 매각은 예상보다 지연될 가능성이 높다.
정부가 51.44%(신주인수권 행사분 포함)의 주식을 갖고 있는 데다, 뉴브리지캐피털이 보유지분을 매각하는 데 여러가지 조건이 붙어 있기 때문이다.
우선 뉴브리지캐피털이 지분을 30% 이상 매각하려면 정부지분도 동일비율, 동일조건으로 매각해야 한다.
보유지분을 주식시장에 재 상장할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