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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부동산 잡으려다 금융 흔들라
[포커스] 부동산 잡으려다 금융 흔들라
  • 이경숙 기자
  • 승인 2003.11.2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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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ELF 등 파생상품으로 부동자금 유도…리스크 관리 어려워 ‘블랙먼데이’ 부를 수도 이건 많이 팔려도 고민, 안 팔려도 고민이다.
한 투자신탁사 사장은 말한다.
“많이 팔리면 주가 하락 때 워런트(장외에서 만든 풋옵션) 헤지 물량이 나와 시장의 하락 압력을 더 높일 가능성이 있어요. 팔리지 않아도 문제입니다.
부동자금을 금융시장으로 흡수하려는 정책의 실효성이 없어지니….” 11월20일, 정부의 독려 속에 한국 금융업 사상 최대의 공동기획상품이 나왔다.
코리아ELF(주가연계펀드), 줄여 켈프라 불리는 상품이다.
은행, 증권, 투신 등 전 금융권이 제각기 자기 회사 이름을 붙여 팔고 있지만 구조는 모두 똑같다.
‘KOSPI200 인덱스 투자+풋옵션(워런트) 투자’. 켈프는 주가하락 때 손실률을 성장형은 9.4%, 안정형은 4%로 차단했다.
만기 때 KOSPI200 지수가 가입 당시 기준지수보다 성장형은 10%, 안정형은 8% 높아야 원금이 보장되고 플러스 알파의 수익을 내기 시작한다.
12월4일부터 17일 사이 형성되는 기준지수가 종합주가지수 770이라고 가정하면 성장형의 원금보장지수는 840이고 8.5% 수익을 내는 지수는 924가 된다.
이 상품은 환매조건이 까다로운 기존 ELS와 달리 환매수수료 2%만 내면 언제든 중도환매할 수 있다.
이 상품 마케팅에는 금융계 수장들이 앞장섰다.
판매 첫 날 김진표 경제부총리가 국민은행에서 2천만원, 오호수 증권업협회 회장이 LG투자증권에서 5천만원, 신동혁 은행연합회장이 한미은행에서 2천만원, 홍성일 한국투자증권 사장이 자사에서 2천만원을 이 상품에 넣었다.
수장들의 첫 날 가입금만 모두 합해 1억1천만원이 넘는다.
정부의 ‘켈프’ 띄우기에 시장 반응 썰렁 한국 주식시장에서 돈 벌려면 금융권 수장들만 따라하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한국 정부의 주가 부양정책이 잘 먹혀들어간다는 얘기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장기증권저축 등 그간 정부가 주가 부양차원에서 내놓은 상품들은 대개 높은 수익률을 내곤 했다.
그렇다면 정부가 밀고 있는 켈프에도 시중자금이 물 밀듯 들어와야 마땅할 텐데, 시장 반응이 영 썰렁하다.
증권업협회가 대형증권사 3개를 조사해보니 11월20일 발매 첫 날 켈프 판매액이 9억8천여만원이었다.
증권업협회 한 직원은 “12월3일까지 2주나 판매하다 보니 사나흘 정도 파는 다른 상품보다 시장 반응이 느리게 나타나는 것 같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대박상품은 첫 날부터 보통 100억원을 넘나든다는 것이 업계 통설이다.
판매창구의 일선 직원들은 벌써 켈프가 히트상품이 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한 은행직원은 “원금을 완전히 보장해주는 데다 양방향 수익구조까지 가진 다양한 상품이 있는 판에 지수가 올라도 원금 보장이 안 된다는 상품을 투자자들이 쳐다나 보겠냐”고 말한다.
최근엔 지수가 오르면 인덱스 펀드로, 지수가 떨어지면 리버스 인덱스 펀드로, 잠시 쉬고 싶으면 MMF(머니마켓펀드)로 자유롭게 갈아타면서 수익을 낼 수 있는 상품도 나와 있다.
그에 비해 켈프는 원금 손실 위험이 있는 데다 수익을 내는 지수대도 다른 상품보다 높다.
안정적 수익을 지향하는 투자자는 원금 손실 위험을 감수하지 못할 것이고 공격적 투자자는 인덱스 투자나 주식고편입 펀드 투자가 낫다고 느낄 터. 게다가 켈프는 원가 비용이 적지 않게 든 것으로 보인다.
투신권의 파생상품 전문가들은 기존 ELS와 비교해볼 때 켈프의 워런트는 헤지비용이 꽤 비싸게 먹힌 상품이라고 평가한다.
켈프 수익구조를 보면 기준지수보다 해지시점지수가 8∼10% 올라야 원금이 보장된다.
투자자 입장에선 지수가 오른 만큼의 이득을 헤지비용으로 내는 셈이다.
주가연계상품의 헤지비용 즉 워런트 가격이 비싸지는 원인은 크게 두 가지다.
주가변동성이 커 헤지가 어렵거나, 풋옵션(주식을 팔 권리)의 행사가격이 높아지거나. 11월 중순부터 종합주가지수는 770~800 안팎을 오간다.
한국 주식시장의 역사로 보아 투자 부담을 느낄 만한 지수대인 데다 안보 위협, 내수 위축으로 내재적 변동성도 높은 상황이다.
이런 때 주가상승을 기대한 주가연계상품을 만들려다 보니 기대수익률은 낮고 헤지비용은 많이 들 수밖에 없다.
판매·운용사로서도 이 상품은 마땅치 않다.
이 상품의 운용 수수료는 1%대. 다른 펀드가 1.5~2.7%에 이르는 데 비해 낮은 편이다.
더구나 ELS의 핵심인 워런트는 골드만 삭스가 만든 것이다.
켈프뿐 아니라 켈스, 뉴켈스 등 올해 들어 정부가 판매를 독려했던 ELS 상품의 워런트는 모두 외국계에서 사온 것이었다.
정부의 독려로 국내 금융사한테 돌아올 이윤은 여러모로 따져봐도 많지가 않다.
이래저래 매력이 낮은 상품이 아니냐고 물으니 한 은행 부행장은 말을 돌린다.
“정부쪽에 물어봤더니 하락 방어율 때문이라고 설명하더군요. 이전에 판매한 뉴켈스(KELS)는 기준지수 대비 30% 하락 때까지만 원금을 보장해주지만 켈프는 하락을 무한대로 방어하다 보니 비용이 많이 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어느 상품이 더 좋다고 사전적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고 그는 덧붙인다.
이런 상품을 왜 정부는 두둔하고 나서는 것일까? 이 상품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거기엔 10·29 부동산시장 안정대책이 있다.
10월29일, 정부는 부동산시장의 투기를 조장하는 혐의를 가진 시중 부동자금을 다스리기 위해 몇 가지 금융대책을 내놓았다.
그 하나가 켈프 등 장기 주식투자 기반을 확충하는 금융상품을 육성하는 것이고, 또 하나가 부동산담보인정비율(LTV) 축소였다.
LTV 축소는 부동산시장으로 흘러갔던 신용 흐름을 빠르게 흡수하는 데에 일단 성공했다.
그 다음은? 고여 있는 부동자금이 과연 정부가 의도한 대로 켈프 등 주식시장의 장기자금으로 흘러가줄까? 켈프가 폭발적 인기를 끌어 대량으로 판매되면 증시는 안정적 장기 수요를 확보하게 될까? 주식시장을 위해선 켈프가 대량 판매되지 않는 편이 낫다.
1987년 10월19일 다우존스지수가 하루 만에 22.6%나 떨어진 원인을 아는가. 물론 직접적 원인은 누구도 모른다.
밝혀진 사실은 하나. 당시 유행했던 포트폴리오 인슈런스기법을 사용하는 펀드에서 주가하락이 시작되자 대량의 풋옵션을 행사해 하락 압력을 엄청나게 높이면서 주가가 급락했다는 사실뿐이다.
자본시장 장기 육성, 세금으로 접근해야 포트폴리오 인슈런스는 자산 배분을 초단기적으로 변경하면서 시장가격 변화 추세를 자산 운용에 반영하는 기법으로 켈프, 켈스, 뉴켈스 등 우리 정부가 미는 ELS뿐 아니라 다른 ELS의 풋워런트를 구성하는 데에 흔히 사용됐다.
주가 대폭락 때 풋워런트가 얼마나 강력하게 작용하는지 경험했던 미국, 일본 같은 시장에선 포트폴리오 인슈런스를 사용하는 대형펀드가 거의 없다.
펀드운용자는 물론 투자자들까지 동일한 포트폴리오 인슈런스 전략을 한꺼번에 많이 사용하는 데 따르는 위험을 체득하고 있는 탓이다.
이런 상품을 우리 정부가 나서서 마케팅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에서 장외 파생상품을 운용했던 한 펀드매니저는 말한다.
“세금 문제를 건드리지 않고 부동자금을 주식시장으로 끌어들이려고 하니 정부가 파생에 자꾸 눈을 돌리는 것 같아요. 이해는 하겠는데 단일 상품만 미는 것은 투기에 가까운 일입니다.
” 그렇다고 정부한테 팔리지 않아 다행이라고 위로해줄 순 없는 일이다.
좀 더 실효성 있는 자본시장 육성 방안에 대해 한 은행 부행장은 ‘오래된’ 대안을 내놓는다.
세금감면혜택 말이다.
“지금 우리 자본시장에는 장기기반을 육성할 주체가 없습니다.
은행도, 증권도 서로 리드하지 못하고 단기시장에 갇혀 있는 상황이죠. 정부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초기엔 세금 감면 등 세제지원을 하면서 장기투자를 유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 한 투신사 사장은 다양한 상품의 육성을 권한다.
“판매사마다, 고객마다 모두 니드가 다릅니다.
여러 판매사에서 동일한 상품을 파는 것이 효율성이 있겠습니까? 정부가 가이드라인만 제시해주고 여러 상품을 육성하는 것이 장기적 수요기반을 마련하는 데엔 더 효과적일 겁니다.
” 11월20일 열린 경제부처 차관들의 부동산 안정 대책 점검반 회의에선 올해 안에 ELS 담보대출을 허용하고 내년 중 ELS 발행 절차를 간소화하겠다는 방안이 나왔다.
파생은 세계적 투자자 워런 버핏도 두려움을 느낄 만큼 파장 예측과 위험 관리가 어려운 영역이다.
우리 시장은 현재까지 발행된 ELS의 위험 수준도 미처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부동산시장을 잡겠다고 굳이 금융시장을 뒤흔들 불안을 잉태할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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