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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읽기] 북한 압박·봉쇄는 안될 말
[경제읽기] 북한 압박·봉쇄는 안될 말
  • 최용식 21세기경제학연구소장
  • 승인 2003.12.1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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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사회에는 통일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무작정 통일이 싫다는 사람도 있고, 통일비용이 천문학적으로 들어서 반대한다는 사람도 있다.
그들에게 이렇게 되묻고 싶다.
‘북한이 망하면 일본에 주자는 것이냐, 중국에 주자는 것이냐, 아니면 러시아에 주자는 것이냐?’ 조금 세련된 자들은 북한을 더욱 봉쇄하고 압박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들에게는 이렇게 되묻고 싶다.
‘지난 50여년 간 봉쇄하고 압박해서 얻은 것이 무엇이냐, 이미 실패한 정책을 왜 고집하자는 것이냐?’ 패전국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통일을 이룩한 독일의 정책은 우리에게 훌륭한 타산지석이다.
사실 독일도 처음에는 봉쇄정책을 채택했다.
초대 수상인 아데나워(1948~1963년 재임)는 서독 정부만 독일 국민을 대변할 권한이 있다며 동독 정부와의 어떤 접촉도 거부했으며, 다른 나라가 동독과 외교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하는 ‘할슈타인’ 원칙을 고수했다.
이런 봉쇄와 압박정책은 결국 1958년 서베를린 봉쇄라는 긴박한 사태를 일으킨 중요한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이후 동서독은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가혹한 긴장관계 속에 빠져들었고, 베를린 장벽을 넘다가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그러나 1966년 브란트가 외무부장관으로 취임한 후(69년 수상 취임) ‘동방정책’으로 불리는 평화통일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그 결과 1971년에는 베를린협정을 체결해 상업과 관광 목적의 동독 방문을 허용하는 등 본격적인 인적 교류를 시작했다.
이때 경제적으로 아주 중요한 정책이 하나 채택되는데, 동독 방문자는 동독화폐를 의무적으로 일정액 교환하게 했던 정책이 그것이다.
동독 방문자가 늘어나고 의무교환액이 점점 커지면서 동독의 중요한 외화 수입원으로 정착했고, 동독 경제의 서독 경제에 대한 의존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72년에는 ‘동서독 기본조약’을 체결하여 자유왕래가 정착되었고, 동독과 서독이 서로 상주대표부를 설치하는 등 제도화된 협력관계가 구축되었다.
제2차 석유파동이 터지자 동독은 중대한 경제위기에 처한다.
그러자 1983년 서독 정부는 시중 은행단이 동독에 10억마르크의 차관을 제공하는 데 보증을 섰으며, 그 대가로 동서독 경계선의 자동 발사장치를 제거하고 동서독 주민의 상호 방문에 대한 통제를 해소하기로 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동독 경제를 서독 경제에 의존토록 했던 것이 평화통일의 기반을 다진 열쇠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왕래가 자유로워지면서 동독 주민들이 경제력 격차를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됐다.
서독의 경제 지원에도 불구하고 동독 경제사정은 개선될 조짐을 보이지 않자, 1980년대 후반부터는 동독 주민의 서독 탈출이 줄을 이었다.
급기야 1989년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자 동독 정부는 점차 사회 통제력을 잃어 갔다.
그런 가운데 소련이 붕괴되는 과정에서 동독이 공식적으로 소멸을 선언함으로써 통일을 이룩할 수 있었다.
서독은 봉쇄와 압박이 아니라, 과감한 퍼주기를 통해서 동독의 붕괴를 유도했던 것이다.
따라서 봉쇄와 압박을 통해서 북한체제를 붕괴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점을 눈여겨봐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도 각종 경협과 대북사업 등을 통해 북한 경제를 우리 경제에 더욱 의존토록 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지금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다.
물론 통일을 위한 여건을 충분히 조성했다고 하더라도 독일과 같은 행운이 한반도에서 반복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북한체제가 붕괴된다는 보장 역시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통일이 별것이던가. 남북한 국민이 어느 곳이나 여행할 수 있고, 서로 자유롭게 방문할 수 있으며, 어느 곳에서나 삶의 터전을 마련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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