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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 PC, 홈쇼핑서 퇴출 위기
[비즈니스] PC, 홈쇼핑서 퇴출 위기
  • 이희욱 기자
  • 승인 2004.02.0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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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진 낮고 수요 줄어 찬밥 신세…주요 업체, 방송횟수·시간 일제히 줄여 갑신년 벽두, 국내의 한 홈쇼핑업체에선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인사 이동이 있었다.
컴퓨터·멀티미디어 상품기획팀을 맡았던 2명의 담당자 가운데 한 사람이 다른 부서로 발령을 받은 것이다.
이 상품기획팀의 주력 상품은 PC와 휴대전화. 올해부터 번호이동성제도와 맞물려 휴대전화시장이 한창 대목인 점을 감안하면 쉽게 이해하기 힘든 조치다.
이 업체 관계자는 “한 사람의 담당자로 충분한 데다, 지금은 휴대전화 판매에 온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고 말하며 “이것이야말로 ‘PC’라는 상품에 대한 회사의 시각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라고 귀띔했다.
지난 2002년까지만 해도 PC는 홈쇼핑업체의 외적 성장을 주도한 대표 상품이었다.
2001년 업계 최초로 연매출 1억원을 달성한 LG홈쇼핑의 경우, 2001년 말 집중적인 PC 판매에 힘입어 전체 매출의 16%를 PC에서 거둬들였다.
2001년 한해 동안 국내 PC시장이 24% 뒷걸음질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로 놀랄 만한 성과인 셈이다.
CJ홈쇼핑 또한 2002년 전체 매출액의 20% 가량을 PC에 기댈 정도로, PC는 주요 성장 도우미였다.
PC 제조업체들도 홈쇼핑업체를 마다할 수 없었다.
PC 불황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새로운 돌파구로 홈쇼핑에 주목한 것이다.
다소 출혈을 감수하더라도 박리다매로 새 유통망을 확보할 수 있는 데다 PC 점유율을 높일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홈쇼핑 업체들은 지난 2002년 한해 동안 전체 PC 유통의 20% 가량을 소화하는 등 연일 기염을 토했다.
졸업·입학 대목에도 특집방송 편성은 미지수 하지만 이는 화려한 옛 기억일 뿐이다.
지난해부터 상황은 역전됐다.
매주 4~5회 이상 내보내던 PC 판매방송은 2회 안팎으로 떨어지고, 방송 시간도 2시간에서 30분 내지 1시간으로 단축됐다.
그나마 방송을 지속하는 업체들도 더 이상 PC 판매로 인한 수익을 기대하지는 않는 분위기다.
우리홈쇼핑은 지난해 상반기까지만 해도 재방송을 포함해 주 2~3회의 PC 판매방송을 내보냈다.
하지만 마진율이 적고 수익성이 떨어지자 지난해 하반기부터는 주 1회로 방송횟수를 줄였다.
그나마 올해부터는 월 1.5회로 재편성했으며, 올 하반기에는 이보다 더 줄어들 전망이다.
우리홈쇼핑 관계자는 “PC업체의 대목인 졸업·입학 시즌이 곧 다가오지만, 특별방송 편성 여부는 미지수”라며 “시장 여건이 나아지지 않는다면, PC 판매 중단도 충분히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농수산홈쇼핑은 얼마 전부터 PC 판매방송을 아예 중단했다.
여기에는 PC 자체가 수익성이 떨어지는 탓도 있지만, 식품류의 방송 비중이 80% 이상을 유지해야 하는 회사의 특수성 때문에 PC와 같은 이질적 품목을 취급하기 힘든 이유도 있다.
회사쪽은 “예전에도 PC는 회사 이미지와 별로 맞지 않는 탓에 일년에 고작 5∼6회 정도밖에 방송하지 않았다”면서 PC 판매 중단을 굳이 알려 쓸데없는 오해를 받고 싶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홈쇼핑 선두업체인 LG홈쇼핑과 CJ홈쇼핑의 사정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LG홈쇼핑의 경우 많게는 주 4~5회 정도 내보내던 PC 판매방송을 지금은 주 3회로 줄였다.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 내보내는 순환방송(재방송)에도 PC 판매방송은 그나마 거의 편성되지 않는 실정이다.
지난해부터 방송 횟수를 주 2회로 줄인 CJ홈쇼핑은 당분간 별다른 정책변화 없이 현재 수준을 유지하겠다는 입장이다.
CJ홈쇼핑 관계자는 “이해 당사자인 PC 제조업체들조차 신학기임에도 별다른 기획전을 열 움직임이 없는데, 마진율도 적은 제품을 우리가 굳이 나서서 판매에 열을 올릴 이유가 없다”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이 밖에 현대홈쇼핑도 지난해부터 PC와 가전제품 등의 방송을 주 1회 수준으로 대폭 줄인 상태다.
지난해부터 홈쇼핑에서 PC의 위상이 이처럼 바뀐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지난해부터 홈쇼핑업계에 새로 적용된 회계기준의 영향이 크다는 분석이다.
2003년부터 바뀐 회계기준에 따르면 매출액은 총액, 즉 상품판매 대금이 아니라 판매수수료와 재고를 부담하는 상품판매 대금인 순액을 따른다.
따라서 시장점유율과 성장성 등을 재는 기준도 전체 매출액이 아닌 판매수수료로 바뀌었다.
얼마나 덩치가 크냐가 아니라, 얼마나 수익을 올렸느냐가 기업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 것이다.
게임의 룰이 바뀌었으니, 홈쇼핑업체들의 전략도 당연히 수정된다.
자체 브랜드(PB) 상품처럼 판매수수료가 높은 상품과 독점 공급상품의 비중이 늘어난 것이다.
따라서 수수료가 30%를 웃도는 의류와 가정용품이 주력상품으로 떠오른 반면, 마진율이 5~8%에 불과한 PC는 천덕꾸러기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업계 관계자는 “실제로 방송 제작비와 이런저런 부대비용을 빼고 나면 마진율이 0에 이를 때도 있다”며 “수익성이 없는 상품을 밀어붙일 이유가 있겠느냐”고 되묻는다.
물론, PC가 인기상품이었던 2002년에도 마진율은 홈쇼핑업계의 숙제였다.
하지만 당시엔 낮은 수수료를 상쇄할 만큼의 수요가 뒤를 받쳐 줬다.
이 때문에 홈쇼핑업계는 어느 정도 출혈을 감수하더라도 PC를 앞다퉈 판매할 수 있었으며, 싼값에 좋은 제품을 고객에게 제공한다는 명분까지 덤으로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PC 수요가 급격히 줄어든 지금, 홈쇼핑업체 입장에선 비싼 제작비와 낮은 마진율을 감수하면서까지 PC를 판매할 이유도 명분도 없는 셈이다.
파괴력은 무시 못해…‘극약처방’은 힘들 듯 경기 불황도 홈쇼핑 업체들이 PC를 외면하게 하는 주된 이유다.
홈쇼핑은 경기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업종 가운데 하나다.
지난해부터 불어닥친 경기불황은 소비심리 위축으로 이어지고, 소비자의 지갑은 값싸고 실속 있는 제품 앞에서만 겨우 열리는 형편이다.
값비싼 가전제품이나 PC를 밀어내고 주방용품이나 생활 건강용품 등이 TV 화면을 도배했다.
그나마 고객들이 꾸준히 찾는 디지털 카메라나 MP3플레이어 등이 디지털 기기의 체면을 지켜 주고 있는 상황이다.
마지막으로 소비자들의 PC 구매 유형이 바뀐 것도 이유로 들 수 있다.
예전처럼 PC 수요가 많지 않은 데다, 제품 업그레이드 주기가 짧아지면서 그나마 교체주기가 다가온 고객들도 구매를 미루는 경향이 짙어진 것이다.
우리홈쇼핑 관계자는 “요즘엔 PC를 사려는 사람도 시차를 두고 구매하려는 분위기인 데다, 이런저런 사은품까지 요구하는 일이 잦다”며 “앞으로는 남겨도 뒤로는 손해 보는 상품이 PC”라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이 관계자는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PC 판매를 중단하는 것도 충분히 고려할 수 있다”며 극약처방도 가능할 것임을 암시했다.
물론 수익성을 이유로 들어 무 자르듯 PC 판매방송을 중단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을 듯하다.
홈쇼핑 또한 공익적 역할을 전혀 무시할 수 없는지라, 단 한 명이라도 찾는 고객이 있는 한 서비스 차원에서도 계속 공급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직은 PC가 고객의 시선을 묶어 두는 눈요기거리 또는 구색상품의 역할은 충분히 하고 있다는 인식도 방송중단을 주저하게 만든다.
잘 팔릴 땐 단 한번의 방송으로 1500여대, 20억원대의 매출을 올려 주는 파괴력도 홈쇼핑업체들이 PC를 섣불리 포기하기 힘든 이유다.
하지만 이런 낙관적 상황이 언제까지 지속되리라고는 장담하기 힘들다.
홈쇼핑도 수익을 우선하는 기업인 만큼, 마냥 백조가 될 날만 기다리며 미운오리 새끼를 키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비싼 제작비용을 감수하면서 TV 방송을 내보내는 대신, 주 구매층이 몰리는 인터넷 쇼핑몰을 통한 판매로 선회하려는 움직임도 일부 홈쇼핑업체를 중심으로 가시화되고 있다.
한때 화려한 비상의 날개를 펼치며 홈쇼핑업체의 러브콜을 받던 PC가 ‘퇴출’이라는 극약처방을 받는 날이 과연 올 것인가. 근본적인 체력 회복이 이뤄지지 않는 한, PC 업체들은 당분간 숨죽인 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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